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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2_0613_수요일_06:00pm
후원 / 서울문화재단_한국 문화예술위원회
관람시간 / 10:00am~07:00pm
갤러리 이즈 GALLERY IS 서울 종로구 관훈동 100-5번지(인사동길 52-1) Tel. +82.2.736.6669 www.galleryis.com
위로와 치유를 위해 건네는 손, 열려있는 커다란 귀. ● 미술 작품을 통해 예술가를 만나고 소통하고 일을 하지만 결국은 사람이 더욱 소중해서일까? 어둡거나 고통스러운 정서를 담은 작품을 지속해서 작업하는 작가에 대해 훌륭한 작품을 내놓지 않아도 좋으니 멈추라고 하고 싶을 때가 있다. 이러한 요구가 지극히 단순한 반응이라는 것을 알기에 혼자 웃고 만다. 그러나 작품은 작가의 내면세계를 반영할 수밖에 없다는 믿음으로 때로는 절실한 마음이 되기도 한다. 빈센트 반 고흐나 잭슨 폴록이 아무리 인상적인 작품을 남겼다고 해도 내게 그들과 같은 삶을 살아볼 것을 창조자가 제안한다면 단번에 거절하고픈 심정도 마찬가지 생각에서이다. 이런 나와는 다른 선택을 하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고 삶의 가치는 오히려 고통 속에서 드러날 수 있다는 견해를 지닌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삶의 궁극적인 목적이 행복은 아니지만 고통도 아닐 터 어쩌면 눈앞에 보이는 행복이나 고통 이면에 내재한 동기가 무엇인지에 대해 먼저 따져봐야 할 수도 있다. 삶에서 펼쳐지는 현상에 대한 동기와 과정, 결과 모두를 살펴보았을 때 유의미한 무엇인가가 포착된다면 우린 그것을 삶의 가치라고 말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송영규의 작품을 통해 드러나는 절망과 고통의 신호에 대해 면밀하게 생각해보고 싶은 이유가 그것이다. 더구나 그의 작품은 10년이 넘는 시간동안 굳건하게 그러한 기조를 유지하고 있으며 이러한 사실로 인해 그가 표현하는 일관된 정서는 더욱 호소력을 지닌다.
작품은 어두운 무대 위에 단 하나의 작은 조명만을 밝힌 채 연기하는 모노드라마를 연상시킨다. 물론 2007년을 전후로 하여 흰색 배경에 컬러감이 들어간 작품들이 나타나기도 한다. 작가는 그 당시 색다른 시도를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과감히 밝은 색상을 선택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작품들 속의 흰색이 그리 밝아 보이지 않는다. 작품은 연극적이며 은유적인 방식으로 작가의 생각을 대변하고 있다. 직접적인 감정의 분출보다는 마치 감독이 배우에게 연기를 주문하는 것처럼 송영규는 작품속의 이미지에게 어떤 연기를 하도록 지시하는 듯하다.
모노드라마의 연기자는 작가 자신과 주변 인물들, 신체의 일부인 손과 귀, 가장 최근작으로는 화분이다. 각각의 작품에서 그들은 모두 주인공인데 거의 대부분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은 단 한 명이기 때문이다. 신체 일부분을 비롯하여 정물에 속하는 화분까지도 등장인물이라 명한 것은 그것들이 분명 감정을 가진 존재로 표현되기 때문이다. 움직임이 없는 화분이지만 그의 일련의 작품들이 가진 맥락을 통해 보면 고립되고 에너지를 잃은 인물이나 시간마저도 멈춘 듯 그려진 화분은 같은 운명을 지닌 존재로 간주할 수 있다. 작가는 화분을 대지로부터 '분리된 존재', 관계로부터 '단절된 존재'로 상정하여 작품의 소재로 선택했다고 설명한다. 이 등장인물들은 작가가 자기 자신과 동일시하여 표현한 것이기도 하고, 작가가 이해하는 인간실존의 한 측면이기도 하다. 주인공은 홀로이며 단절되어 있고 고통스러워하거나 숨 막힐 듯하다. 완전한 독존. 그러나 그것은 온전한 모습이 아니다. 주인공의 고통이 단절로 인한 것인지, 고통으로 인해 스스로를 고립시킨 것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러나 이유야 어떠하건 간에 누구와도 교류되지 않는 상태는 설명할 필요 없는 고통 그 자체이다.
또한 그의 작품들은 간혹 섬뜩한 느낌마저 지닌다. 그것은 작품이 묘사하는 감정적인 고통이나 짙은 어둠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주문한 음식을 기다리다가 접시위에 날 것 그대로의 재료가 나왔을 때와 같은 당혹스러움이다. 기대 이상의 날것과 같은 사실성으로 인해 작품을 보는 순간 놀라게 되는 것이다. 매우 사실적이고 솔직한 표현을 통해서 작가가 말로 다 할 수 없는 진심을 담았음을 느낄 수 있다. 그 내용이 무엇이든 간에 누군가의 진심이 드러나는 순간은 모골이 송연할 정도의 경이로운 체험이 된다. 그것이 비록 매우 짧은 순간일 지라도 말이다. ● 곧이어 양가적인 감정이 찾아온다. 놀라면서도 공감되며, 섬뜩하면서도 연민을 불러일으킨다. 절망스러우나 그러기에 희망적이다. 송영규는 끊임없이 고독감과 상처를 그리는데 나는 자꾸 그림에서 그 반대의 것을 향한 갈망을 함께 느낀다. 그는 마치 고발자 같기도 하고 자백하는 사람 같기도 하다. 사실 이 고통에 대해 책임을 물을 수 있는 대상은 없다. 굳이 말하자면 이러한 사태의 책임자는 우리 모두이다. 그러기에 실존의 조건이라 할 수 있겠다. 이것은 옳고 그름의 문제라기보다는 있는 그대로의 현실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러므로 단절, 소통의 부재, 그로인한 인간의 고통 그 자체는 악(惡)이라 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폭풍과 같고 홍수와 같고 가뭄과 같은 그저 있는 그대로의 인간의 조건이다. ● 그러나 우리는 자명한 현실 앞에서 저항하고 분노한다. 송영규의 작품은 고스란히 그것을 드러내주고 있다. 어둠속에서 낱낱이 보여준다. 그의 작품에서 어둠은 고통과 상처를 효과적으로 드러내주는 배경이 되고 있으며 한편으로 그것을 감싸안아주는 장치이기도 하다. 그것은 밝은 배경의 작품들과 비교해 보면 확연히 드러난다. 간혹 어둠이 제거된 그의 작품에는 동시에 빛도 제거되어 고통을 어루만져줄 공간적이고 심리적인 장치가 떨어져나간 것처럼 보인다. 그의 작품에 있어서 공간은 그저 3차원을 묘사한 회화적 기법의 결과만이 아니라 심리적이고 정서적인 보호자 역할을 하는 것이다. 안전하게 숨을 수 있기에 상처를 드러내도 좋은 곳으로서의 어둠. 이것은 어쩌면 빛보다 따스한 어둠이다. 이것은 고통스러운 그의 작품이 절규로만 끝나지 않을 수 있는 가능성이 탄생하는 지점이다.
현대 심리학에서는 인간이 타인과 관계를 맺을 때 드러내는 모든 성향은 유아기의 경험을 통해 형성된다고 밝힌다. 그리하여 그 시기에 형성된 경향성이 평생을 걸쳐서 반복(reaction)되어 한 인간의 가족관계, 연애관계, 사회적 관계 등 모든 대상관계를 결정한다는 것이다. 널리 알려진 외디푸스 콤플렉스도 그러한 경향성 중의 한 가지이다. 그런데 그 경향성의 종류는 그다지 다양하지 않다. 두려움, 분노, 결핍, 욕망을 얼마나 크거나 적게 억압했느냐에 따라 몇 가지 정도의 유형을 보인다. 이토록 단순한 경향성의 종류를 알게 되면 인간이 이렇게 단순하고 비슷한 존재인가라는 사실 앞에 허탈함을 느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기에 우리는 모두 다 사랑받길 원하고 안정을 누리기를 원하며 인정받고 싶어 한다. 그리고 송영규의 작품을 대하면서 비슷한 공감과 위로를 받는 것이다. 타인과의 관계에서 겪는 소통 불능의 절망은 태어나면서부터 반복될 운명이었다. 어떤 부모도 아이의 욕구와 정서를 정확하게 파악하여 채워 줄 수 없으며 개인은 자라나면서 자신의 원초적 감정을 억제하고 포장하는 것을 배우면서 사회성을 획득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소통이라 할 때 생각을 나누는 언어 주고받는 행위를 떠올릴 수도 있지만 소통이란 더 깊은 차원의 것이다. 서로의 감정을 알아주는 것이 핵심이다. 마음의 신호-두려움, 분노, 욕망 등은 실패를 거듭하면서도 교류되기를 원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감정을 타인에게 드러내는 것을 수치스러워하며 감춘다. 피상성은 거기서 비롯되며 심지어 자기 자신과의 관계마저도 피상적이 되는 일도 일어난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란 바로 그런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닐까? 송영규의 작품은 피상적인 관계에 대한 적극적인 고발이며 끊임없는 방어이다. 그리고 동시에 그는 피상성으로부터 벗어난다. 왜냐하면 그는 적어도 자신의 두려움과 절망과 소통하기 때문이다.
정신분석학은 병리적인 심리 상태를 겪고 있는 개인을 치유하기 위해 그가 경험한 모든 감정을 분석한다. 매우 장기적으로 진행되는 이 과정은 인간이 자신도 모르게 부정적인 감정의 경험을 반복하는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한 것이다. 이 이론에 따르면 인간이 온전한 관계를 맺지 못하는 이유는 상처받은 채 해소되지 못한 감정을 반복하려는 마음의 경향성 때문이다. 여기서 '분석한다' 함은 상처 입은 감정을 제대로 다시 '만나주는 것'이다. ● 한편 불교의 오래된 구도 방법 중에 '위빠사나'라는 것이 있다. 위빠사나의 원리를 한 마디로 말 한다면 '보면 사라진다' 정도가 될 것이다. 인간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감정과 생각을 명료히 바라보면 그 대상-생각과 감정-이 사라진다는 것이다. 여기에서도 '사라진다'함은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는 말이다. 만난다는 것, 본다는 것이 자유를 가져다준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그것은 피상적인 관계에서 진정한 관계로 나아갈 수 있는 힘이 생긴다는 뜻이다.
아픔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 그리고 그것을 인정하는 것. 이것이 자유로운 존재가 되고 진정한 소통을 경험 할 수 있는 첫 번째 'action'이자 가장 큰 치유의 열쇠가 되는 것이다. 송영규의 작품은 마치 작가의 손끝으로 쓰다듬는 것처럼 심리적인 고통과 절망을 그려내고 있다. 정면으로 직시한 실존의 고통은 짜릿하면서도 서글프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작업은 의미가 있다. 드러내고, 보고, 만지고, 느끼고, 듣고, 인정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한 장 한 장의 그림이 쌓이면서 그의 마음에서는 자유의 폭이 그만큼씩 더 넓어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어둡고 탁한 그의 작품이 그 무엇보다도 따뜻한 위로를 전해줄 수 있는 것은 그 때문인지도 모른다. 문득 그가 그린 두 손으로 정성스럽게 감싸 안은 '커다란 귀'가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 신혜영
Vol.20120613b | 송영규展 / SONGYOUNGKYU / 宋英圭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