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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2_0316_금요일_06:00pm
기획 / 쿤스트독 갤러리
관람시간 / 11:00am~06:00pm / 월요일 휴관
쿤스트독 갤러리 KunstDoc Gallery 서울 종로구 창성동 122-9번지 Tel. +82.2.722.8897 www.kunstdoc.com
그만 울어!―눈물에 반대함 ● 옛날에 영화를 보는데 여주인공이 울기 시작했다. 30초 정도 울면 될 것을 그 배우는 5분 이상 울고 있었다. 좀 지루하다고 느끼는 순간 앞자리의 어떤 '남성'이 소리를 꽥 질렀다. "그만 울어!" 그 일갈에 나는 속으로 전적으로 공감했다. 그 여배우는 정말 질질 늘어지게 지겹게 울고 있었다. ● 그로부터 30여년이 지난 지금 나는 한국의 대중문화에 대고 소리지르고 싶다. "그만 울어!" 좀 더 비평적으로 소리지른다면 "우는 장면 클로즈업 해서 미디어 상품으로 팔아먹는 짓 좀 그만 둬!"라고. 정말 너무 많이 운다. 그리고 우는 장면을 너무 많이 울궈 먹는다. 드라마도 울고 예능도 울고 남극, 북극, 아마존도 울고 김연아도 운다. 정말 나 빼고 다 우는 것 같다. 사람이 우는 현상 자체는 자연적인 것이다. 아프거나 슬프면 당연히 눈물이 나는 것이다. 강아지도 우는데 말이다. 문제는 인위적으로 짜내는 눈물이다. 요즘의 미디어는 줌렌즈의 클로즈업 기능을 한껏 발휘해 눈물을 짜내고 있다. 오디션 프로그램의 출연자가 심사위원들의 혹독한 소감을 들으며 눈물 지으면 카메라는 그의 눈물방울에 대폭 클로즈업해댄다. 대개 그의 어머니는 암에 걸려 있고 자기가 가수로 나서는 것이 집안을 일으키는 유일한 출구인데 심사위원은 그에게 혹독하다. 그 딱한 모습에 시청자들도 줄줄 운다. 눈물은 시청자를 적시고 비판의식을 적시고 무의식을 적시고 미디어라는 필드를 적시고 대한민국을 적신다. 한 때는 컨템포러리 아트 전시 같은데서 '미디어의 확장'이라는 말을 곧잘 썼는데 이제는 '눈물의 확장'이라는 말을 써야 겠다. 나훈아가 "울지마, 울긴 왜 울어" 했지만 그 노래도 울고 있었다.
눈물이란 한국 사람들의 정서를 단단히 포박해 버린 운명의 동아줄 같이 느껴진다. 그런데 컨템포퍼리 아트 마저 눈물이라니. 물론 아트가 흘리는 눈물은 다르다. 아트는 어떤 사태에 대해 바로 반응하는 양식이 아니라 성찰하고 표상하고, 그것에 대해 또 성찰하고 표상하는, 무한 반복되는 성찰의 회로이기 때문에 대중문화와 다른 양식이다. 즉 척 보고 좋은 작품도 다른 눈으로 보면 안 좋게 보일 수도 있다는 경고를 자체 안에 품고 있는 것이 아트다. 무조건 좋은 것이니 받아들이라는 것은 아트가 아니다. 『타짜』에서 백윤식이 "도박을 아트의 경지로 끌어올렸다"고 말했을 때 바로 그런 차원을 언급한 것이었다. 그는 도박을 배우고 싶어 안달이 난 조승우에게 도박의 길로 들어서지 말라고 여러 번 경고한다. 둘이 같이 사업을 하러 다니는 동안에도 도박을 하지 말라고 여러번 경고한다. 즉 도박을 하되 도박에 대해 성찰하는 것이 타짜의 대가의 태도였다.
따라서 아트가 흘리는 눈물은 대중문화가 흘리는 눈물과 다르다. 아트는 눈물을 흘리면서 도대체 이래도 되는가 스스로 성찰한다. 대중문화가 "같이 눈물에 푹 빠져 흠뻑 젖어봐요"라고 꼬드긴다면 아트는 "이렇게 울어도 되는 것인가"라고 스스로 회의한다. ● 반면 대중문화의 눈물은 다분히 노출증적이다. 왜냐면 남에게 눈물을 보이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인데 자신의 부끄러운 모습을 남에게 보이며 묘한 쾌락을 느끼는 것은 성적 도착의 한 형태인 노출증이기 때문이다. 바바리맨 같은 것 말이다. 그렇다면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 변태인가? 그 개인은 변태가 아닐지 모른다. 그러나 그런 설정을 하고, 매주 그런 장면이 나오고, 또 시청자는 그런 장면이 나올 것을 알고 기대하며 채널을 틀고 하는 모든 행위들 전체는 기묘하게 왜곡돼 있고 변태적이다. 대중문화가 그런 것인줄 알고 출연하는 사람도 변태적 행위의 공모자라고 할 수 있다.
눈물은 왜 나쁜가. 우선 습도가 높다. 사람이 명징하게 사고하려면 더운 것 보다는 좀 서늘한 것, 축축한 것 보다는 건조한 쪽이 좋다. 옛말에 발은 따뜻하게, 머리는 차갑게 두라고 하지 않았던가. 습도가 너무 높으면 감각이고 사고고 눅눅해져서 정상적인 판단과 성찰이 불가능하다. 그래서 눈물이 나쁘다. 대부분의 기계는 습도가 너무 높으면 안 좋은데 인간의 의식이라는 기계도 습도가 너무 높으면 망가져 버린다. 눈물이 나쁜 또 다른 이유는 전염성이 강하다는 것이다. 헝겊이나 종이에 물이 떨어지면 점점 번져나가 적신다. 눈물도 번져나가는 속성이 있다. 그래서 미디어의 프레임 안에서 흐르는 눈물은 그 프레임을 타고 넘어 시청자의 안방을 적시고 뇌리도 적시고 온 나라를 적신다. 컴퓨터를 물에 빠트리면 못 쓰게 되듯이, 그렇게 젖은 의식은 바보가 된다. 웃음에는 거리두기와 비판이 가능하지만 눈물에는 함께 푹 젖어버리기, 그래서 머리가 휑하게 비어버리기 밖에 없다.
물론 사람들은 말 할 것이다. 한민족에게는 한이 많다고. 과연 그럴까. 19년하고도 180일간 317만명 이상의 군인, 민간인이 죽은 베트남 전쟁(베트남 사람들은 아메리카 전쟁이라고 부른다)만큼 한 만은 전쟁도 있을까. 600만명이 학살당한 유태인, 미국인들에게 대부분 학살 당하고 보호구역으로 내몰린 아메리카 원주민들, 스페인 사람들에게 도륙당한 라틴 아메리카 원주민들, 수도 없는 내전으로 참혹한 학살극을 겪은 아프리카 사람들 만큼 한 맺힌 사람이 또 있을까. 내가 보기에 한이란 눈물로 푹 젖은 영화나 음반 많이 팔아먹기 위한 핑계일 뿐이다. 눈물은 우리의 운명도 무의식도 아닌, 그저 21세기 대중문화의 한 코드일 뿐이다. 그래서 나는 눈물에 반대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할까. 애도에 대해 생각해야 겠다. 애도(mourning)는 요즘 인문학의 주요한 주제 중 하나이다. 역사적으로 수많은 크고 작은 슬픈 일들이 일어나고, 사람들은 끊임 없이 희생되고 짓밟힌다. 거기서 생긴 한은 눈물만 나게 하는 것이 아니라 피해자와 주변사람들의 가슴에 피멍을 남긴다. 그런 트라우마는 사라지지 않는다. 사라지면 트라우마가 아니기 때문이다. 고통스러운 기억이 계속 반복해서 떠오르는 것이 트라우마다. 그래서 그것을 풀어내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 누군가는 그 피멍 어린 한들을 풀어줘여 한다. 그래서 애도가 필요한 것이다. 기존에 나와 있는 애도의 형식은 개인적인 차원에서는 울음이나 곡이 있다. 규모가 더 크고 공적인 것으로는 제사나 위령제 같은 리추얼, 추모비 같은 모뉴먼트가 있다. 트라우마가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역사적인 것이라면 애도하는 이벤트의 규모도 커진다. 추모곡이나 영화, 다큐멘터리 같은 것을 만들어서 애도하는 경우도 있다. 9.11 테러 같은 경우는 워낙 큰 사건이고 희생자도 많았기 때문에 애도의 형식도 다채롭고 규모도 크다. 즉 개인적 트라우마와 역사적이고 집단적인 트라우마는 대처방안도 다른 것이다.
그렇다면 컨템포러리 아트는 애도의 형식으로 적절한가? 여기서 문제는, 트라우마는 개인 주체의 실존적 조건에 깊숙이 얽혀 있는 것이기 때문에 공적인 차원으로 끄집어내기 힘들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작가가 자신이 겪은 트라우마에 대한 작업을 했다고 했을 때 관객이 그에 대해 조금이라도 공감할 확률은 결단코, 분명히 0이다. 작가가 겪은 수치스럽고 끔찍한 경험에 대해 아무리 절절히 작업해 놓아도 보는 사람은 더 냉담해 질 뿐이다. '그건 니 사정이고'일 뿐이다. 더군다나 컨템포러리 아트라는 난해한 형식으로 돼 있을 때 관객이 작품 자체에 공감할 확률도 0이다. 끔찍한 일을 당한 당사자에게는 매우 미안한 말이지만, 트라우마를 적절히 표현하는 방법은 이 세상에는 없는 것 같다. 따라서 컨템포러리 아트를 통해 어떤 희생이나 트라우마에 대해 애도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펜데레츠키가 작곡한 「히로시마 희생자들을 위한 비가」에는 추상적인 소리의 덩어리(클러스터)만이 있을 뿐이다. 그 소리의 불협화음에 몸서리를 칠 사람은 많아도 그 음악이 은유하는, 혹은 환유하는 히로시마의 희생에 대해 몸서리를 치는 것은 카프카의 소설 『단식광대』를 읽으며 단식농성하는 국회의원에 대해 연민을 품는 것 만큼이나 힘든 일이다. ● 눈물이란 그래서 힘든 것이다. 이제까지 쓴 것은 평론가가 눈물에다 겹겹이 두른 철조망이다. 안옥현, 이제 눈물에 어떻게 접근할텐가? ■ 이영준
Vol.20120316c | 안옥현展 / AHNOKHYUN / 安玉鉉 / photography.vide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