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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7_1121_수요일_06:00pm
작가와의 대화 / 2007_1206_목요일_04:00pm
협찬/후원_월간 객석_운생동 건축사무소_한국문화예술위원회_갤러리 정미소_서울문화재단
관람시간 / 11:00am~07:30pm / 월요일 휴관
갤러리 정미소 서울 종로구 동숭동 199-17번지 객석빌딩 2층 Tel. 02_743_5378 www.galleryjungmiso.com
이미지-스크린에 상영되는 욕망의 흔적 ● 1. 매체의 지위와 대상성에 관한 작업 /『표본실의 청개구리』(담 갤러리, 1998), 『눈이나 귀는 육체로 즐긴다』(갤러리 정미소, 2005) ● 안옥현이 한국에서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998년 전시 『표본실의 청개구리』와 2000년 사진비평상 우수상 수상을 통해서이다. 이 때 사진작업은 마치 정지된 시간을 보여주는 듯하다. 뚜렷하지 않은 이미지 속에서 파편적으로 등장하는 대상은 무엇인가 밀폐된 공간, 시간의 조우 속에서 그 물질성이나 공간적 특성, 시간적 우연성 등의 경계들을 무화시키는 사진이었다. 또한 어떤 경우에, 대상은 빈 방이나 밀폐된 공간 속에 멈추어 있는데, 그 대상은 육중한 무게로만, 혹은 움직이는 속도로만 보여지기도 한다. 이러한 사진에서 대상은 배경과의 경계 구분이 모호하며, 뚜렷한 특징을 갖는다기보다는 오히려 대상성의 지위 즉, 중심의 지위를 상실한 채로 등장하고 있다. ● 이러한 사진과 대상성에 관한 문제적 제안들은 2005년의 갤러리 정미소에서의 전시 『눈이나 귀는 육체로 즐긴다』에서 더욱 확장된다. 이 때 전시에서 안옥현은 사진과 더불어 비디오 작품을 전시하였다. 같은 거리, 같은 장소에서 지나가는 행인들을 멈추어 세우고 찍은 이 사진들은 일종의 연작 작업으로 보인다. 인물 대상은 화면의 중앙을 차지하고는 있지만, 그 대상은 이 연작들 속에서 의미를 획득하는 대상들이라기보다는, 사진의 구성물 중의 하나로 보인다. 배경, 포획된 대상 모두 어떤 흐름이자 흔적으로만 남는다. 사진이라는 속성은 대상중심적일 수밖에 없지만, 안옥현의 사진은 사건자체이자 흔적으로 존재하며, 무대상성의 매체로 남는다는 아이러니를 보여준다.
이 전시에서 보여준, 비디오 작품 「초록티를 입은 여자」, 「극장안내원 여자의 작은 손전등」은 파편화된 내러티브의 작품이다. 일종의 액자 구조 속에서 에피소드는 중층적이며, 또한 이미지와 사운드도 서로 엇갈려있고, 작품내에 내러티브를 파괴하는 다른 환상의 장면이나 다른 에피소드가 삽입되어있다. 전체적으로 해체적 편집 방식에 의해 제작되어, 관객으로 하여금 어떤 하나의 사건에 주목하기 어렵게 만든다. 오히려 엇갈리는 사운드와 영상,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넘나드는 이러한 장면들은, 카메라, 관객, 대상, 장면, 에피소드 등의 시선의 관계를 끊임없이 유동하고 교차하게 한다. 이는 보기라는 것에 결부된 응시의 차원을 돌출시킨다. 즉 바라보는 주체와 대상의 자리를 대상화, 객관화시키며 또한 나아가 그 자리를 무화시키는 것에까지 이르게 되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이 작품으로부터 어떤 개성적 내러티브를 재조합을 해낸다면, 그것은 현실과 비현실, 환상을 오가는 것 속에서 이루어지게 될 것이다. 즉 이 작품에서는 현실의 요소들, 환상의 요소들, 매체의 요소들이 서로 빗나가는 교환들 자체가 무대화되고 있는 것이다. 일련의 안옥현의 작품을 보면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떠올릴 수 있다. 우리의 현실과 비현실이 우리로 하여금 실재적 현실로 자각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리고 그 실재적 현실이라는 것이 오인 속에서 재구성되는 것이라 하더라도, 왜 그것은 어떤 진실된 감정을 환기시키는 것일까. 왜 그 오인은 우리에게 치명적일정도로 중요하단 말인가. ● 이러한 질문들은 이번 갤러리 정미소에서의 전시 『Mirror Ball』를 통해서 보다 분명하게 된다. 아마도 이 전시는 이미지의 지위에 대한 전시이자, 그 이미지-스크린에서 주체와 대상간의 환상이 공명의 지점을 발견하는 것에 대한 전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안옥현의 작품 세계에서는 현실의 장소, 현실의 대상, 현실의 어떤 불완전한 원칙들이 재연된다. 그리고 그것은 현실의 조직하는 환상의 이미지들로써 재연된다. 안옥현의 작품해체적 작품으로부터 어떤 재조합을 해낸다면, 그것은 현실과 비현실, 환상을 오가는 것 속에서 이루어질 것이 요되는 것이다. 즉 이 작품에서는 현실의 요소들, 환상의 요소들, 매체의 요소들이 서로 빗나가는 교환들 자체가 무대화되고 있는 것이다.
2. 이미지의 지위에 대한 작업, 주체와 대상의 환상이 공명하는 이미지-스크린 / 『Mirror Ball』(갤러리 정미소, 2007) ● 안옥현의 작품 세계에서는 현실의 장소, 현실의 대상, 현실의 어떤 불완전한 원칙들이 재연된다. 그런데 그것은 현실의 조직하는 환상의 이미지들로써 상영된다. 사진과 비디오 매체는 여기서 중요한 도구가 되고 있다. 안옥현의 2007년 『Mirror Ball』에서 사진과 비디오 작품은 이러한 현실의 불완전한 현실원칙의 어떤 틈새를 '이미지' 자체로부터 드러나도록 한 작업이라 할 수 있다. 즉 이미지라는 것의 환상적 측면, 그것의 지위, 지점에서 주체는 어떻게 욕망을 구성하는가에 관한 작업이 된다. ● 이번 전시의 일련의 연작처럼 보이는 사진작품에서, 주된 대상은 여성이다. 그녀들은 각자 가정의 거실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들은 약간 야하거나 여성성을 강조하는 차림을 하고 비스듬하게 누워있다. 표정은 무표정이다. 이것은 작가의 설정이다. 마치 사진 자체는 마치 여성잡지에 흔히 나오는 소파 광고라든가, 실내 인테리어 광고처럼 보일 정도의 설정이다. 그렇지만 무표정하게 응시하는 그녀들의 시선은 도대체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인지를 알 수 없도록 한다. 만일 그녀들이 그러한 복장을 하고서, 우리에게 유혹의 눈길이라도 던졌다면 우리는 보다 편하게 그녀들을 보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들과 '유혹'이라는 약호로 소통할 수 있다는 안도감을 갖기 때문이다. 즉 사진의 여자들은 여성이라는 대상, 그녀들의 포즈와 차림새와 같은 설정 속에서는 매우 자명한 이미지이다. 가령 유혹의 이미지가 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 약호로서의 유혹의 소통이라는 것을 할 수 없게 만드는 요소가 있다. 일종의 그 약호의 원칙을 배반하는 것은 그녀들의 무표정이다. 그로부터 우리는 어떤 불안감에 휩싸이게 된다. 도대체 그녀들은 무엇을 원하는가.... 이로부터 우리의 시선과 그녀들의 시선은 끝도 없는 교환의 상태에 접어들고 만다. 그 교환의 자리인 이미지의 표면이 바로 욕망과 환상의 조우의 지점이 된다. '도대체 당신은 무엇을 원하는 것입니까.', '그렇게 차려입고, 누웠는데도 왜 분명하게 유혹하지 않음으로써 우리를 이토록 괴롭게 만든단 말입니까'라는 질문 속에서... ● 안옥현은 약호화된 이미지의 차원을 드러내면서 동시에 그 약호들을 파괴한다. 그럼으로써 주체와 대상과의 관계 속에서 모호한 욕망이 끊임없이 교환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이제 주체와 대상의 관계는 약호를 넘어서, 욕망과 환상이 조우하기만을 간절하게 학수고대하는 순간으로 접어들게 되는 것이다. ● 또 다른 비디오 작품에서 작가 스스로 퍼포먼스를 한다. 퍼포먼스를 하는 여자는 주로 사랑에 관한 노래를 립싱크하고 있다. 그런데 그녀의 표정과 감정은 실로, 너무도 '리얼'하다. 구애의 눈길과 제스쳐는 우리에게 한껏 사랑으로의 매혹을 선사하는 듯하다. 하지만 이것은 진짜가 아니다. 아니 진짜인지 가짜인지 알 수 없다. ● 작가는 자주 데이빗 린치의 「멀홀랜드 드라이브」영화를 예로 든다. 이 영화에서 두 주인공 여자가 한 밤중에 보러간 공연장면이다. 영화에서 이 장면은 눈물을 흘리면서까지 열창을 하던 공연자가 쓰러지고 나서도, 사운드는 울려 퍼지며 극장의 두 주인공 여자들이 서로 손을 꼭 부여잡고 감동의 눈물을 흘리는 장면이다. 마치 뭔가 현실의 외피들, 즉 이미지는 허구의 것으로 벗겨지지만 그래도 우리의 감정과 정서, 감동들을 그것을 넘어서 울려 퍼지고 있는 듯한 것을 느낄 수 있는 장면이다.
안옥현의 또 다른 비디오 작품에서는 이러한 이미지의 실재차원에 관한 이야기가 매우 직접적으로 드러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미지라는 약호화된 차원을 넘어서, 혹은 그 교환 속에서 드러나는 것은 무엇일까. 대상으로부터 환기되지 않는 성적 매력, 혹은 사랑의 기호들과 같은 어떤 상징적 차원을 넘어서는 어떤 약호 혹은 매개란 것이 있을 수 있을까. 물론 주체와 대상 사이에서 이미지-약호를 통과하지 않는 소통의 관계는 존재할 수 없다. 그렇지만 주체와 대상 사이에는 무엇인가, 즉 그러한 약호, 이미지-스크린에는 소통의 차원을 넘어서는 무엇인가가 교환되고 있다. 그런데 바로 그 교환의 지점에서 주체와 대상의 지위는 무화될 뿐만 아니라, 끊임없이 이루어지는 욕망과 환상의 교환 속에서 새롭게 그 지위가 생성되고 소멸되고, 새로 생기는 일종의 변증법적 연쇄고리가 형성되는 것은 아닌가. ● 아마도 안옥현은 이미지-약호-스크린의 이면에서의 욕망과 환상의 교환을 통해서, 우리 현실이 지탱되고 있음을 이야기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일상 속에서 그러한 욕망의 투영, 빗나간 조우, 환상의 불가능한 시나리오를 자주 접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에 일종의 행복한 구속을 당하고 있다. ● 현실을 잘 포장한 이미지들, 가령 광고라든가, 환상의 시나리오로 엮인 영화라든가 하는 것들 속에서 우리가 발견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물론 우리는 그러한 이미지가 실재적이라고는 여기지 않지만, 우리는 더욱 더 그 이미지를 리얼하게 만들고 싶어한다. 이 가공된 이미지들은 가짜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진짜라고도 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그것이 없다면 우리는 어떠한 소통도 할 수 없다.
이렇듯 안옥현의 작품은 이 소통의 기호, 약호들에 관한 작업이자, 그 약호들의 이면에 관한 작업이 된다. 우리가 누구인지 알 수 없지만 이미지로만 보고 있는 대상들은 그 외피, 즉 이미지를 넘어서 무엇인가 간절하게 원하는 욕망의 주체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동시에 그 대상은 아무런 특별함도 없는 공백이자 무의 상태일 수도 있다. 단지 이들을 이미지자체로 조직화하는 것은 바로 주체와 대상간의 환상의 공명, 그리고 욕망의 교환을 통해서일 뿐이다. 즉 기호 혹은 이미지라는 장치를 무시하거나, 통과하지 않고서는 욕망도 환상도 현실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결국 안옥현의 이 이미지들, 이 대상들의 소통의 약호들은 그것을 벗어내려고 하는, 그것을 빗나가는, 그것에 딱 들어맞지 않지만 그것이 없이는 아무것도 아닌 그런 이미지-스크린이다. ● 그리고 결국에 우리는 그 이미지-스크린을 넘어선 어떤 차원, 즉 주체의 환상이 공명하는 그 차원에서 우리의 실체를 발견하게 된다. 우리는 이 이미지들에게, 과연 이 이미지들이 실재적인가 하는 질문을 던져볼 수 있다. 그 대답은 아마도, 대상의 규격화된, 통제된, 절제된, 즉 약호화된 이미지에서 우리의 환상이 공명하는 그 지점으로 귀결되는 어떤 빗나간 차원을 발견할 수 있느냐에 달려있을 것이다. 안옥현의 작품은 우리가 바라보고 있는 이미지, 소통의 약호들이 얼마나 완벽한 이미지가 될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 그렇지만 그 완벽함에의 기대는 오히려 빗나감으로써 완성된다. 그 빗나감의 장소인, 약호화된 이미지-스크린에서 우리의 수많은 감정들, 욕망의 교환, 우리의 환상은 발견되고, 상영될 것이다. ■ 이병희
Vol.20071123g | 안옥현 사진.영상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