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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2_0315_목요일_05:00pm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월,공휴일 휴관
갤러리 아트사이드 GALLERY ARTSIDE 서울 종로구 통의동 33번지 Tel. +82.2.725.1020 www.artside.org
홀로서기, 그것은 나에게로 향하는 지난한 여정 ● 삶에서 가장 신비로운 일은 나의 몸이 자신의 소유이며, 자신의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실제로 자신의 몸의 기능들을 자신의 의지대로 작동시킬 수 있을까. 우리가 맥박이 뛰고 있는 심장에게 갑자기 멈추라고 명령한다고 해서 심장이 멈추는 것은 아니다. 또한 누군가가 우리의 눈에 손가락을 갖다 대면, 우리의 눈은 이내 눈꺼풀이 닫히는 것을 알게 된다. 우리가 자존심을 내세워 억지로 눈을 뜨고 있으면, 우리의 눈은 이내 눈물이 글썽거리는 것을 느낄 수 있다. ● 그러한 현상은 신경 생리학에 의하면 두뇌의 신경 기능의 작용에 의해 생기는 생리현상이라고 말하며, 또한 심리학에 의하면 우리는 우리의 심약한 마음으로 인해 자신의 몸을 통제하지 못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우리는 그러한 설명을 통해 자신의 몸과 마음을 알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몸은 서구 근대와 모던 철학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정신과 분리되어 있으며, 우리의 정신이 사용하고 나면 폐기처분 해버리는 물질에 불과한 것인가. 물질은 미시 물리학에 의하면 바라보는 이와 분리되어 있지 않으며, 홀로그램의 원리를 통해 초자연적인 현상을 설명하는 마이클 탈보트(Michael Talbot)에 의하면 ""홀로그램의 모든 부분들이 전체상을 담고 있는 것과 똑같이 우주의 모든 부분들이 전체를 품고 있다.""(마이클 탈보트, 홀로그램 우주, 정신세계사, p.80.) 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의 몸은 마음과 분리되어 있지 않으며, 인간과 자연의 모든 행위들은 서로에게 영향을 끼침으로써 각자의 몸에 기록되는 것이다.
송진화의 조각은 삶을 통해 느껴지는 그러한 내면의 심리적인 상황을 여성의 다양한 신체적인 동작으로서 풀어헤치고 있다. 그의 인체 조각은 현대 미술에서 주된 논의가 되는 몸을, 그것도 여성 신체의 표정을 주된 소재로 하여 다루고 있다. 하지만 그의 인체 조각은 페미니즘에서 논의하고 있는 젠더(gender)의 문제와는 동떨어져 있다. 그의 인체 조각은 페미니즘에서 말하는 남성과 다른 여성의 생리적인 신체 조건을 있는 그대로 들추어냄으로써 본질적인 실체를 인식하고자 하는 것도 아니며, 사회··문화적인 체계에 의해 여성의 신체를 상품화함으로써 억압받고 있는 여성의 심리적인 상황을 표현하고자 하는 것도 아니다. 그의 인체 조각은 남성과 여성이라는 차별성을 벗어나 타고날 때부터 주어진 몸과 누군가에게 의지하지 않고 홀로서기를 하고자 하는 여성의 심리적인 상황을 다루고 있는 것이다. ● 그러한 그의 인체 조각은 「가슴이 터지도록, 2010」의 작품에서 보듯이 「카니발의 저녁, 1886」에서 몽환적인 풍경과 서정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앙리 루소(Henri Rousseau, 1844-1910)의 작품과 같이 앙상한 나뭇가지 아래에서 달리고 있는 여성과 개의 모습에서 인간의 원초적인 심성을 느끼게 한다. 그의 그러한 모습은 앙리 루소와 같이 일상의 삶에서 벗어나 이국적인 풍경과 합일된 남녀의 모습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동양 사상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무소유와 무위(無爲)의 정신을 통해 일상의 삶 속에서 '나'와 자연의 모든 것들이 일체화된 세계를 통해 찾고자 하는 것이다.
무위와 쓸모없음 ● 자연법칙에 따라 행위하고 인위적인 작위를 가하지 않는 동양의 무위 사상은 「힘겨움이 내 등을 밟고 지나가기를 기다린다, 2010」의 작품이나, 또는 「기다렸어, 2011」 등에서 보듯이 그의 인체 조각 작품들 전반에 깔려 있는 생각이다. 「힘겨움이 내 등을 밟고 지나가기를 기다린다, 2010」에서 보듯이 나체 여성의 등의 한 가운데에 패인 골들이나, 또는 「기다렸어, 2011」에서 보듯이 나무의 결이 그대로 드러난 여성의 얼굴과 검게 몽우리가 진 여성의 젖가슴은 나무가 본래 지닌 특성과 지나온 삶의 시간들을 그대로 살려냄으로써 자신의 삶의 모습을 여성의 신체적인 형상을 통해 있는 그대로 조각해낸 것이다. 그의 인체 조각은 오귀스트 로댕의 「신들의 사자, 1890-91」의 조각에서 보듯이 건강한 여성의 음부를 그대로 드러내는 청동의 인체 조각을 통해 근원적인 실재로 나아가는 것과는 달리(톰 플린, 조각에 나타난 몸, 김애현 옮김, 예경, 2000. 참고) 김일용의 「체적(體積)-신체의 기억, 2002」의 라이프 캐스팅과 같이 일상을 살아가는 여성들의 삶의 시간을 통해 인체에 기록된 상처와 흔적들을 통해 근원적인 실재로 나아가는 것과 닮아있다. 하지만 송진화의 인체 조각은 김일용의 조각과는 달리 홀로서기를 하고자 하는 작가 자신의 축적된 삶의 시간들과 심리상태를 나무의 성질과 그 나무가 살아온 삶의 이력을 빌어 형태를 제작하는 것이다. ● 즉 그의 인체 조각은 홀로서기를 하고자 하는 여성의 심리상태와 축적된 삶의 무게가 지닌 작가 자신의 내밀한 속내를 「똥밭에 굴러도, 2011」, 「또 다시 봄, 2011」, 「살아내기, 2010」에서 보듯이 있는 그대로 들추어내고 있는 것이다. 「똥밭에 굴러도, 2011」는 세상살이가 아무리 힘들어도 죽는 것보다는 삶의 집착이 여전히 남아있음을 진솔하게 드러내고 있으며, 「또 다시 봄, 2011」은 나이가 들어도 봄이 오면 사춘기의 소녀와 같이 곱게 차려입고 누군가를 기다리며, 시선은 어딘가로 향하는 자신의 심리적인 상황을 꾸밈없이 보여주고 있다.
그의 작품에 스며있는 사상은 또한 작품에 사용된 재료들의 지나온 이력을 볼 때 장자의 내편에 나오는 『무하유지향(無下有之鄕)』(나무 줄기가 옹이투성이고 구불구불해서 목수들이 사용할 수 없는 나무일지라도 넓은 벌판에 심어두면 사람들에게 쉴 수 있는 그늘을 제공한다.)의 구절을 상기시킨다. 그가 사용한 나무들과 돌과 뿔은 누군가에 의해 사용되고 나서 폐기처분 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들이나, 또는 작가가 여행하면서 길에서 주운 것들을 사용하고 있다. 「L1020583」은 꽃다운 25살에 주운 꽃다운 돌이며, 「또 다시 봄, 2011」은 조계사 벤치에 사용되었던 팽나무이다. 그러한 사연들은 그의 인체 조각 작품들의 곳곳에 스며있다. 누군가의 집 자개 장농 문짝으로 사용되었던 나무는 「봄, 2009」의 작품으로, 상계동 어린이 놀이터 늑목으로 사용되었던 나무는 「똥밭에 굴러도, 2011」의 작품으로, 가운데 손가락만한 굼벵이가 살았던 호두나무로 사용되었던 것은 「살아내기, 2010」의 작품으로, 그리고 당진의 서민 집의 기둥으로 사용된 나무는 「힘겨움이 내 등을 밟고 지나가기를 기다린다, 2011」의 작품으로 탈바꿈되어 있는 것이다. ● 살아온 삶의 시간들과 흔적들을 지닌 폐기처분 될 나무는 그의 인체 조각이라는 창을 통해 살아있는 생명체와 같이 다시 숨을 쉬는 것이다. 「힘겨움이 내 등을 밟고 지나가기를 기다린다, 2011」의 작품에서 보듯이 당진의 서민 집의 기둥으로 사용된 나무는 홀로서기를 하고자 하는 작가 자신의 삶의 고단함과 힘겨움을 형상화한 모습으로 다시 생명을 얻고 있으며, 「살아내기, 2011」의 작품에서 보듯이 가운데에 손가락만한 굼벵이가 살았던 호두나무는 눈먼 강아지를 등에 업고라도 그 무언가를 부여잡고자 작가 자신에게 남아있는 그 애착의 미련을 생생하게 그려냄으로써 그 자신이 지니고 있는 삶의 의지를 투영시키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목수에게 쓸모 없는 나무는 장자의 시선에서는 사람들이 쉴 수 있는 그늘을 제공하는 존재로 비추어지듯이 그 쓰임새를 다하고 폐기처분 될 나무들은 작가에게 홀로 서고자 부단히 노력하는 작가 자신의 또 다른 모습과 다를 바 없는 것이다. 달리 말해 쓸모 있음과 쓸모없음의 잣대는 작가에게 인간을 포함한 모든 것들을 경제적인 잣대로 환원시키는 것을 의미하며, 정신과 물질이 이원화된 인식으로 모든 것들을 바라보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홀로서기와 무소유 ● 송진화의 인체 조각은 또한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같이, 2012」의 조각 작업에서 보듯이 불교 최초 경전인 '숫타니파타'에 나오는 구절과 같이 그 누구에게도 애착을 갖지 않고, 무소유를 통해 몸과 마음이 하나의 일체를 이루는 세계로 나아가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한 세계는 작가에게 있어서 「빨간신, 2011」의 작품에서 보듯이 누군가에게 의지하고자 하는 집착이나 욕망을 끊임없이 정화시키고 홀로 서고자 하는 몸부림과 같은 것이다. ● 홀로 선다는 것은 누군가에게 의존하고자 하는 경제적인 독립과 타자의 시선으로부터의 자유로움을 의미한다. 송진화의 홀로서기는 여성의 신체를 통해 표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중년 여성의 신체를 통해 홀로서는 여성의 심리상태를 표현하고자 한 홍현숙의 홀로서기의 모습과는 유사하나 처해있는 상황과 심리적인 지향점은 다르다. 홍현숙의 홀로서기는 「체조, 2005」의 단채널 비디오에서 보듯이 TV의 에어로빅 장면을 속옷만 입고 따라하는 중년 여성의 영상과 여성성을 상징하는 머리를 깍고 물을 주는 영상들을 통해 집안에 갇힌 중년 여성들의 홀로서기의 방식을 보여주고 있는 데에 반해, 송진화의 홀로서기는 「가슴이 터지도록, 2010」에서 보듯이 집안에 갇혀 있는 여성이라기보다는 철부지 어린아이들의 노는 행위와도 같다. 그 모습은 남성의 시선을 끌어들이는 여성의 모습으로 비춰지기 보다는 마치 어린아이가 혼자 짖고 까불며 노는 행위처럼 보이는 것이다.
그것은 송진화의 홀로서기가 남편이나 자식이나 그 밖의 누군가에게 의존하는 행위에서 자아를 찾아가는 데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의존하거나 집착하는 행위로 부터 독립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의 홀로서기는 타자의 시선과 마주하여 자신의 자아를 찾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시선과 마주하여 자아를 찾는 행위이다. 타인의 시선과 마주하여 자아를 찾는 행위는 정적이고 내향적인 모습으로 비춰지는 데 반하여 자신의 시선과 마주하는 행위는 역동적이고 외향적으로 비춰질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실제로 그러한 시선들과 마주하게 될 때 그 심리적인 상태는 정반대로 다가서게 되는 것이다. 전자가 역동적이고 외향적인 데 반하여, 후자는 정적이고 내향적인 것이다. ● 그러한 심리적인 상태는 송진화의 인체 조각에서 사용되는 색채를 통해서도 느낄 수 있다. 그의 색채의 특징은 본래의 바탕을 덮지 않고 그 위에 색을 덧칠해가는 동양의 채색화의 느낌을 주고 있다. 그러한 색채의 질감은 「히~,2011」의 작품에서 보듯이 나무 바탕의 질감이 잘 드러나도록 사용하고 있으며, 「또 다시 봄, 2011」의 작품에서 보듯이 화려한 듯이 보이나 수수하고 담백한 인물의 심리 상태를 잘 드러내고 있다. 그의 작품은 겉으로 보기에는 화려한 듯이 보이나 튀지 않으며, 그 바탕이 감추려 하지 않고 은은하게 드러나도록 하는 것이다. ● 신체는 사회적인 시선으로 보면 하나의 문화적인 기호이지만, 몸은 자신의 시선으로 향하는 순간 문화적인 기호나 소유의 대상이 아님을 알게 되는 것이다. 몸은 타인과의 교감을 통해 '나'를 만나는 장(field)이며, 자연의 모든 사물들과의 교감을 통해 '나'를 만나는 장이다. 누군가나 무언가에, 설령 그것이 자신의 신체라 할지라도 집착한다는 행위는 '나'와 마주하는 시간들을 과거의 행위들로 돌리는 것을 의미하며, 그것은 끝없이 마주하는 지금 이 순간의 모든 것들과 함께 있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미래는 아직 오지 않은 것이며, 그것 또한 현재의 연속에 불과한 것이다. 송진화의 인체 조각은 무위와 무용론과 무소유라고 하는 동양 사상을 근간으로 하여 지금 이 순간에 자신의 삶에서 느껴지는 심리적인 상황을 때로는 기괴하기도 하고, 때로는 우스꽝스러운 장면을 연출하는 여성의 신체를 통해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 조관용
Vol.20120308e | 송진화展 / SONGJINHWA / 宋珍嬅 / sculptu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