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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0:00am~07:00pm
인사아트센터 INSA ART CENTER 서울 종로구 관훈동 188번지 4층 제2특별관 Tel. +82.2.736.1020 www.insaartcenter.com
태즈메니아, 제주도 곶자왈의 '세계' ● 「태즈메니아」는 자연에 대한 어떠한 경험을 말해주는가? 모든 경험에는 경험적 대상과 주체가 있듯이, 우리는 「태즈메니아」 자연을 만난 탁현주의 경험이 어떤 내용의 것인지를 알고 싶다. 불교에서는 시•공을 통한 '단 한 번의 가능한 만남'을 이야기한다. 더구나 그녀가 찾아간 곳은 지구 반대편 끝에 (호주 남쪽 끝의 섬 「태즈메니아」를 지나면 남극에 도달하게 된다) 위치해 있으며, 그곳에서 장구한 시간을 거쳐 은밀히 보존되어온 천애의 자연이다. 그녀가 그 먼 곳으로 날아가 과연 무엇을 만났는지가 어찌 궁금하지 않겠는가?
동양(극동)의 산•수를 그린 그림을 두고 이론가들은, 특히 송대 이후의 그림으로부터, 자주 '가유, 가거'의 자연을 말해왔다. 그러나 탁현주의 「태즈메니아」는 가유, 가거의 시-공간을 드러낸다고 보이지 않는다. 천애의 원시림「태즈메니아」는 기이하게도 한대의 자연을 생각하게 한다. 원시적 에너지로 가득 찬 곳. 자연과 떨어진 도시의 사람들에게는 신화와 다이내믹한 상상력의 원천이 되었던 곳. 한대에 인간은 분명 자연을 알아가고 있었으나, 산•수는 순환과 변화 속에서 여전히 신비한 내적 힘을 발산하고 있었으며, 나아가 자연은 두려움의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것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태즈메니아」는 어떠한가? 태고의 비밀을 지닌 그 곳은 시간의 '폐허'를 경험하게 하는 곳이며, 고대의 침묵에서 오는 비범함과 그것의 즐거움이 발생되는 곳이다. 만고 변생變生의 키 높은 '고사리 나무들'을 비롯해 수많은 '밀교적 생명체들'이 하나 하나로써 지금 '이 순간' 그녀 앞에 있지 아니한가? 탁현주에게 그 곳은 「놀라움과 경이로움(「étonnement) 」의 공간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놀라움과 경이로움을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philosopher)의 심리적 상태로 이해했다. 그것은 또한 경이로운 현상에 대한 찬탄과 주체의 도취를 일으키는 것이기도 했다. 「태즈메니아」를 통해 느낀 경이로움은, 탁현주에게 이 신비한 자연에 대한 도취감과 심리적 안위 그리고 정신적 치유를 경험하게 하였다.
그 무엇이 그녀로 하여금 이러한 경험을 가능하게 하였을까? 일찍이 하이데거는 『숲길』이라는 논문집에 '예술의 근원'에 대한 탐구를 포함시켰다. 독자가 그의 철학에 동의하건 못하건 간에, 「태즈메니아」는 묘하게도 현대 독일철학자의 사유를 생각하게 한다. '예술의 근원'의 서두를 장식하는 파르테논 신전이 그 곳 암반 위에 고요히 서 있는 채 보여주고 있는 것은 바로 그것이 속한 「세계 」, 「대지 」 이다. 「태즈메니아」 또한 그것의 세계를 가리키고 있다. 나타나면서(드러나면서) 감싸 안는 것(숨는 것)으로써의 대지. 햇빛에 놀라 솟아오르는 시큼한 땅과 나무 냄새들, 온기를 가둔 체 온 몸으로 젖어 드는 축축한 공기, 청각을 깨우는 미세한 자연의 움직임들, 햇빛에 파르랗게 반짝이는 나뭇잎들. 이렇듯 자연은 자연自然(스스로 그러함)으로써, 해명됨 없이 고요히 '거기에 있다'. 자연을 마주해 있음으로써 나 또한 비로소 그를 닮은 '나'로 되돌아 올 수 있는 것. 그때의 느낌을 깊은 안도감과 설명할 수 없는 종류의 치유의 감정이라 표현할 수는 없는 것일까? 과거 인도인들은 (문맥은 동일하지 않다 해도) 본연의 '나'로의 귀향을 둥우리로 돌아온 새의 안위와 지극히 즐거운 마음에 비유하지 않았던가? 그것은 또한 치유의 의미와 상통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리고 또한 「태즈메니아」는 소박하면서도 원시적인 생명력의 세계로 우리를 초대한다. 겹겹이 쌓인 나뭇잎들은 실낱같은 햇살에도 강요됨 없이 아침부터 지칠지 모르며 엄청난 양의 피톤치트를 내뿜어 댈 것이고 도시의 혼탁한 대기에 익숙해진 산책자들의 '폐에 달라붙어' 귀가 후 그들을 녹초로 만들 것이다. 그리고 밤에는 야생동물들 조차 답답하게 만드는 그 숨막히는 이산화탄소를 발산하여 인간들이 감히 접근하지 못하도록 할 것이다. 태고의 자연은 대도시 중심의 삶을 유지하는 현대인에게는 그야말로 불가해한 당혹스러움, 현기증, 도취감을 불러일으키는 존재이기도 하다. 오늘날 인간은 자연을 고대의 신비로움이나 두려움의 감정을 가지고 바라보기를 멈추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우리가 경험하는 자연은 여전히 그것이 위험한 것일 수 있으며, 탁현주의 「태즈메니아」가 동양적 감수성을 통해 고요히 우리 앞에 던져졌다 할지라도, 그것은 분명 내부로부터 감춰진 야성을 발산하는 '생명본生命体'의 자연이다. 자연이, 탁현주가 말했듯이, 우리에게 '위안이고 친화적일 수 있다면' 그것은 자연이 자신의 본연적이고 원시적인 세계를 충실히 보존하고 있을 때일 것이다.
「태즈메니아」를 거쳐 그녀는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얼마 후 제주도로의 여행을 새롭게 떠났고 그곳의 자연을 화폭에 담아왔다. 지구 반대편으로 날아갔다가 다시 그녀가 속한 땅으로 돌아와 자연을 바라보는 이 여정은 그 자체로써 의미를 발생한다. 이 여행의 의미를 설명할 수 있는 말은 아마도 프랑스어의 데페이즈멍 dépaysement (고국으로부터의 추방, 객고客苦)일 것이다. 자신이 알던 세계로부터 스스로를 추방시키는 경험. 탁현주는 제주도의 곶자왈을 찾아 그 땅에 기생하는 고사리를 새롭게 발견하였다. 나무로써 자라는 「태즈메니아」의 고사리와는 생존태가 너무도 다른 제주도의 이 여린 생명체는 친숙한 만큼이나, 또한 신기한 것이다. 물리적 진보의 세계관을 통해서도 변하지 않는 것은, 지금 여기 이들 고사리들이 '말없는 단단함'으로 우리를 부르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비밀스런 충만에 우리는 화답하며 다가갈 수 있다는 것이다. 화답이란 탁현주에게는 그 비밀을 풀어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조용히 응시하는 것이며,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군더더기 없이 순수하고 충실하게 그려내는 것이다. 한편, 지금 제주도에서는 개발사업이 한참 추진 중이다. 개발과 자연은 실제로 공존하기 매우 어려운 것이다. 숲이 숲으로써 자연이 자연으로써 '존재하게 하는 것'은, 하이데거는 말하기를, '보호하는 것'과 불가분의 관계를 지닌다. 탁현주가 그려낸 곶자왈 고사리는, 그것이 처한 잠재적 위험, 즉, 세계의 사라짐을 우리로 하여금 마주하게 한다. 그를 통해 그것들을 지켜내고 싶은 마음을 또한 그려내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 김예경
Vol.20120307a | 탁현주展 / TAKHYUNJOO / 卓賢珠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