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또 다른 이 날

미술, 수원에서 길 찾기展 ②   2011_1206 ▶ 2011_1212 / 월요일 휴관

우무길_utopia 201011_포맥스, MDF_120×120×8cm_2010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111230c | 오늘, 또 다른 이 날展으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11_1125_금요일_07:00~09:00pm

참여작가 경수미_권성택_권용택_김리윤_김석환_김성배 김수철_김영섭_김찬일_김희곤_남기성_남부희 박성현_박용국_박용복_박종만_안재홍_우무길 유지숙_윤기섭_이석기_이선열_이오연_이윤기 이윤숙_이윤엽_이해균_전경선_조성근_최세경 최승일_홍성일_황은화_황제성

주최 / 수원예총 주관 / start운영위원회 후원 / 수원시_기업은행

관람시간 / 10:00am~07:00pm / 월요일 휴관

수원시미술전시관 SUWON ART CENTER 경기 수원시 장안구 송정로 19 전관 Tel. +82.31.243.3647 www.suwonartcenter.org

● 아래 글은 『오늘, 또 다른 이 날』展 부대행사로 진행된 세미나 중 전시기획자 이섭의 「수원미술의 탈중심화 전략을 위한 제안」과 수원미술전시관 큐레이터 조두호의 지정토론 글입니다.

1. 들어가는 말 ● 세계를 이분법으로 나누어 생각하는 습관은 항상 무엇과 무엇을 구분하여 제시함으로서 그 타당성을 부여받게 된다. 이같이 이분법에 의한 세계이해는 서양의 독특한 사고방식으로서 제안되고 확립되어 온 약 400여년의 서구 근대 역사와 그 서구근대의 수용사(受容史) 안에서 정립된 것이지 결코 그 정당성이 유일한 것으로 이해된 바 없다. 하지만 이분법이 제시하는 명료성이 합리성으로 수용되면서, 인간의 사고방식은 이분법에 의한 "무엇과 무엇"의 사이에 놓일 수밖에 없는 '차이'와 그 차이가 만들어낸 현상들을 확정적인 사실로 인정하는 역설에 조정되고 있는 독특한 사태에 빠져들었다. 이에 대한 전면적이고 대대적인 반발은 서구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의 이름으로 다양하게 분석과 탐구의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다. 아직도 그런 탐구의 결과가 결코 어떤 결과를 제시하진 못하지만, 최소한 이분법의 세계를 이젠 의심스러운 눈으로 바라보게끔 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 중심과 주변의 관계는 이분법적 세계이해가 만들어 낸 허상 중 하나이다. 그 허상이 지배했던, 그리고 아직 지배하고 있는 상당기간동안, 우리는 이 개념으로부터 만들어낸 허상(현상의 단면들)이 실재적인 삶과 생활을 지배하는 원리로서 작동하는 것 또한 지켜보았다. 오늘 주제로 잡은 "수원미술의 脫-중심화 전략" 또한 당연히 이같은 이분법으로 보는 세계이해방식에서 등장한 중심과 주변의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이 허상이 조장한 문제가 무엇인지 살펴봄으로써 우린 그 이점과 단점-약점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지를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이점이 하나 있다는 사실을 말해야겠다. 중심과 주변의 이분법 사고가 가지는 장점(이점)은 모든 문제를 단순화시켜 도식적으로 파악하게 함으로써 대응방법을 매우 현실적인 것으로 돌려 세워 수립할 수 있다는 점이다. 대개 이 같은 장점은 학문에서 문제를 명확하게 제시하고 문제점을 부각시키는데 있지만, 현실에서는 행정 편의적 발상으로 쉽게 연계되고 있는 실정이다. 하지만 현실에 적용되고 있는 이 중심주의 사고는 이미 주변으로부터 인정되고 있는 그 중심의 기득권에 맞추어 중심에로 진입을 위한 대가를 요구하게 된다. 중심주의에 맞추어 볼 때, 수원미술이 갖게 되는 문제는 무엇인가? 수원은 미술-예술 활동에 있어 어떤 중심으로부터 주변인가? 아니면 중심으로 이동하기 위해 수원은 무엇을 인정해야 기득권에로 편입될 수 있는가? ● 중심주의로부터 우리 문화예술계는 그 중심에 서울-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서울에서 일어나고 있는 각 종 문화예술현상을 중심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당연히 서울이 아닌 모든 곳은, 행정상 지칭되는 수도권 및 지방으로 지칭되는데 문화예술 측면에선 바로 "주변"이 된다. 수원은 주변이다. 이 주변에 대한 인식을 지방자치행정의 입장에서 보면, 모두가 저마다 중심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 '중심과 주변'에서 주변은 "지역"이라는 모호한 명칭으로 다시 분류되고 있다. 그리고 지역의 지역성은 그 지역의 정체성으로 이해되는 또 다른 인식오류로부터 구체적인 '무엇'으로 드러나야 한다는 강박증에 노출되어 있다. 이 글에서는 중심과 주변을 다루지 않을 것이다. 차라리 직접적으로 지역성문제를 문제삼아 수원에서 예술활동이 가질 수 있는 의미와 지역작가로서 활동한다는 것의 의미를 되물어보고자 한다. 따라서 이 글은 우선 (1)지역성 문제를 다루면서 예술 활동과 지역성이 어떻게 연계되어 이해되는지 살펴 볼 것이다. 그리고 (2)"지역성"이 주변을 대처하여 사용될 개념이 아니라면, 그런 결론으로부터 "수원-지역"이, 이 지역에서 활동하는 작가들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를 탐구해 볼 것이다. 분석이 아니라 탐구하는 방식을 선택한 이유는 현황을 이해하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의미를 창출하는 것에 이 글의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3)프로젝트-프로그램이라는 수원에서 예술 및 예술가로서 활동이 가질 수 있는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전략을 제안해볼 것이다. 결국 이 글은 수원(지역)에서 예술가로서 삶과 그 예술 활동이 가지는 타당성 그리고 예술 활동의 항구성을 위한 전략을 프로젝트-프로그램으로 제안하는 것이 목표라고 할 수 있다.

유지숙_I will be a mother / I am a mother_2채널 영상_2011
윤기섭_풍경 속 풍경 2/1_디지털 프린트_각 40×90cm_2011
이석기_마주하기-1_캔버스에 유채_112×145.5cm_2011

2. 예술 활동에서 "지역성"을 어떻게 이해 할 것인가? ● '지역'은 일정하게 구획된 범위 안팎의 구분가능성과 그 범위들 간의 차별이 되는 경계로부터 나누어진 범위 상 '공간의 다름'을 일차적으로 표시한다. 따라서 '지역'은 다른 지역으로부터 구별되고 있으며, 끊임없이 다른 지역들로부터 경계로 나누어지면서 드러나는 차별로서 확정되고 획정하게 된다. 지역이라는 개념에선 차이가 드러나지 않으며 정확하게 차별만이 드러날 뿐이다. 수원지역과 용인지역은 그 경계로부터 획정되고 있는 지역의 구별만이 구별로 인한 차별의 드러남이지 두 지역의 차이가 그 경계에서 발견될 수 없다는 것이다. 경계를 맞닿고 있지 않는 공간의 범위들 사이에서 지역의 구분은 공간을 지칭하면서도 사실 공간을 의식하며 지칭되는 것이 아니다. 이 경우 '지역'은 특정한 범위가 하나의 특징을 공유하는 공간으로 이해된다. 따라서 "수원지역"을 행정구역상으로는 경계를 맞대고 있는 다른 지역과 차별을 통해 구분하지만, 문화, 예술적으로 "수원지역"을 지칭할 경우 수원으로 특정되는 공간이 하나의 특징으로 공유되는 의미와 내용을 먼저 떠올리게 된다는 것이다. 당연히 우리는 이 공유되고 있는 특징을 찾아 나서면서 '지역'과 '지역성'을 이야기해야 한다. ● '하나의 공유된 특징'이 지시하는 것은 바로 정체성이다. 이 때, 정체성은 "우리"에게 물어지고 있다. 왜냐하면, 정체성을 개인 또는 개별적인 단위로 소급해서 따져 묻는다면, 그것은 즉답되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차이와 차이의 반복을 지시하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 다루고자 하는 것은 정체성이 우리에게 물어지고 있다는 이해에 바탕해서 그것이 무엇인지를 밝혀보고자 하는 것이다. 우선 정체성은 '무엇'으로 대답될 수 없다. 대답되는 순간 그 지시되고 있는 것으로부터 '우리'는 단 하나의 그리고 단 한 번의 '무엇'이 되기 때문이다. 이런 관계로부터 무엇이 지시된다는 것은 그것의 변화를 단절시켜 이해하는 결과에 이른다. 따라서 정체성은 '무엇'으로 대답되지 않고 오히려 '무엇인가?'하고 물어지는 그 순간의 연속이 자리하는 그 자리에 대한 이해가 된다. 수원의 정체성은, 수원에 살고-사는 것이 하필이면 수원이라는 지정학적, 문화적 층위에서 의미를 따져 물어보고자 하는 부류의 사람들로부터-수원에서 자신의 삶에 대한 의미를 되묻고 있는 사람들로부터 그 물음이 성립되는 것이 바로 정체성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 정체성은 순간순간, 그리고 어떤 사태로부터 항상 다시 물음을 가져오면서 정체성의 문제가 결코 중단되지 않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정체성을 외부에서 그리고 경계 넘어서-즉 지역 밖에서부터 물어 들어오는 것은 그 가능성을 아주 무시할 수 없을지라도 자연스럽게 수용될 수는 없다. 정체성은 바로 '스스로 자신에게서 고유하게 문제'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 정체성은 단일한 층위에서 문제로 부각되지 않는다. 중층적인 층위에서 그것은 늘 '우리'에게 문제가 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공동체에 대한 어느 정도의 규정을 제 각각 자신의 입장에서 그리고 이해관계를 앞세우면서 이 정체성의 문제를 먼저 파악하게 된다. 그러나 정체성은 우선 한 집단의 문화적 층위에서 물음이 물어진다. 문화적 층위란 집단의 역사적 이해관계에서 가장 내밀한 성격이 드러난다. 따라서 정체성은 문화적으로 공동된 집단의 역사이해로부터 자신의 '지금, 여기'의 의미를 스스로 이해하게 되는 물음이 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정체성의 문제가 바로 공동체의 규정으로부터 정식화되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또한 공동체는 그 수식에 따라 다양하게 구분되고 분류되면서 이해되는 인간의 활동 양태로부터 규정되고 있다. 우리는 지역에서 지역성을 물어보면서, 그것이 가지는 한 가지 문화적 성격으로서 '하나의 공통된 특징'에 주목하였고, 이로부터 정체성의 문제로 심화시켜 이해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제 정체성의 문제는 바로 공동체의 성격으로부터 그 규정 가능성을 찾을 수 있기에 공동체에 대한 문제제기를 시도해야만 한다. 성급하게 공동체는 무엇이라고 답하려 하지 말자. 하지만 내 삶이 그 안에서 '이미-있는' 그 공동체의 성격이 무엇인지를 밝히려는 노력을 예술은 게을리 하지는 말아야 한다. ● 공동체의 성격을 밝히는 일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이 과제로부터 예술가들의 작품은 사회성과 역사성을 부여 받는다. 그리고 이 과제로부터 예술가들은 내면의 세계를 들여다 볼 수 있는 내밀한 시선(esoteric perspective)을 취하게 된다. 때로 이 공동체에 대한 성격규정이 이데올로기에 의해 강제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이 방식은 쉬운 길에서 얻게 된 쉬운 결과물이다. 공동체를 민족 또는 국가로 대처하여 부르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이 방식은 사실 공동체를 제대로 이해한 것도 아니요 인식된 것도 아니다. 가끔씩 공동체에 대한 성격규정에 있어 시민사회의 대체용어로 이해하거나, 종교나 학문 또는 소집단의 공동취향을 그 성격으로 내세우는 경우가 있기도 하다. 그러나 이같은 공동체의 성격은 사실 잘못된 것도 아니면서 지금 우리가 요구하는 전체를 모두 드러낼 수 없다. 따라서 공동체에 대한 탐구와 깊은 사색은 예술가에게 예술작품으로 드러나면서 설명될 때까지 충분히 기다릴 수밖에 없는 중요한 과제로 이해되어야 한다. 현실 정치나 행정편의에 의해 주창될 수 있는 공동체의 성격은 인간의 삶을 온전하게 밝힐 수 없음으로 이미 그것은 "가짜"임을 확실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공동체의 성격 규정의 과제는 우선 나와 너 그리고 우리의 삶이 가지는 어떤 지평으로부터 물음을 전개시켜야만 한다는 절박함에서 가장 구체성을 지니고 있다. 그 발견의 자리에서, 그 찾아옴과 밝혀짐으로부터 내가 너와 더불어 우리로서 살고 있는 이 현장의 생생함은 과연 무엇으로, 아니 어떻게 이름부를 수 있는가?

이선열_강원도기행_화선지에 수묵담채_70×120cm_2011
이오연_이의동 사람들 1, 2, 3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각 116×97cm_2008
이윤기_목리별곡_캔버스에 유채_130×260cm_2010
이윤숙_명상_혼합재료_27×37×25cm_2010

3. 예술가(수원지역의 작가)에게 "지역(수원)"이 가지는 의미 ● 수원은 어떤 의미에서 공동체로 제 분류될 수 있을까? 이것은 절대적으로 수원에서 터를 잡아, 이곳으로부터 뿌리를 두고 있다고 자부하는 예술가들의 작품에서 발견되어야 옳다. 하지만 사실 이런 요청은 수원에서 특정한 성과를 얻을 수 없고, 우리 사회 어디에서도 이같은 요구에 부응하는 결과를 기대하기란 쉽지 않다. 서울은 어떤 성격의 공동체이고, 어느 예술가가 그것과 씨름하고 있는가? 수원을 공동체로 표현해볼 때 그 적절한, 적확한 수식은 무엇이 될까? 수원은 사실 어떤 성격도 가지고 있지 않아서, 어떤 수식도 적절하지 않은, 그래서 공동체로 분류 파악하기 힘든 어떤 지경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마치 산업사회에서 대도시발달이 가져온 그 횅한 공동체의 공동현상을 목도하는 것처럼 말이다. 만약 그렇다면, 수원의 예술가들은 그 문제를 고발하거나 뿌리까지 쫓아 흔들고 있거나 아니면 그 문제에 골머리를 쥐고 있을 것이다. 만일, 아니라면, 대도시의 공동화 현상이 수원의 말 못하는 공동체적 성격이 아니라면, 예술 작품으로부터 수원의 공동체적 성격은 정체성의 문제로 그리고 하나의 공통된 특징으로 드러나기 시작할 것이다. 그 때, 그것을 두고 비로소 수원의 경계 밖에서부터 수원의 예술을, 수원에서의 삶을 그리고 수원에서 수원 지역의 예술가를 바라보며 애타게 부를 것이다. ● 우리는 문제점을 명확하게 부각시키기 위하여 원래의 자리, 처음 이 논의가 시작되었던 지점으로 돌아가야 한다. '지역'은 어떻게 그 지역의 사람들에게 "지역"으로서 각인되어 있는가? 수원사람들은 어떻게 자신이 수원지역의 사람으로 스스로를 설명하는가? 우선 지리적으로 한정된 수원-행정구역에서 자신이 거주하거나 활동한다는 인식이 그 설명을 타당성 있게 만든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렇다면 수원-행정구역은 삶에서 행정지표와 행정명령 이외 어떻게 삶 안에서 드러나는가? 사실 이 설명방식은 부분적으로 타당한 듯 보이지만, 실상 아무것도 설명할 수 없다. 지리적 구분 또한 같은 이유로 충분하게 "지역"을 드러내지 못한다. 우리는 그래서 '하나의 공동된 특징'을 찾고자 했다. 그것은 순전히 "지역"을 설명해보고자 함이었다. 그래서 착안하게 된 것이 바로 수원의 공동된 특징으로 부가된 '무엇'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부분에서 수원의 역사를 어떻게 전승할 것인가 하는 문제의식은 "지역"의 지역성을 협소하게 이해하는 태도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역사적 사실과 역사적 유산-유적-유구는 오늘을 통해 재생되고 있지만, 그것은 전승의 방식으로서가 아니다. 그것은 해석의 방식 안에서 '지금-여기'에 관여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지역성은 '지금-여기'의 삶이 내재되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런 전승방식의 문제의식은 모든 지역의 공통된 문제제기의 오류이기도 하다는 점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지금-여기'에 대한 이해로부터 우리는 과거, 즉 돌아오지 않을 그러나 그로부터 지금이 파악되고 있는 '오늘'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지역"은 예술가들에게 그들의 삶을 현실적으로 가능하게 하는 시공간이면서 동시에 예술가로서 활동의 의미가 만들어지고 있는 근간으로서 이해를 먼저 요구한다. 수원지역의 작가들에게 그들의 작품이 만들어지고 의미를 부여하는 터전으로서 수원-지역이 먼저 "있다는 그 사실"이 바로 수원인 셈이다. 팔달문과 화성을 소재로 다루는 것이 그것을 충분하게 설명하는가? 파리의 지역성은 에펠탑을 소재로 하여 드러나는가? 뉴욕의 예술가들에겐 어떤 무엇이 그들의 예술 활동에서 뉴욕의 지역을 지역성으로 드러내게 만들고 있는가? 수원은 우리 사회에서 가장 전위적인 예술을 수용하는 도시-지역인가? 가장 고색창연한 장르를 전승방식으로 수용하고 보존하는 지역인가? 이 도시의 삶은 어떤 모습으로 그리고 동시에 어떤 의미를 지닌 채 수원에서 삶으로 착색되고 있는가? 예술가들은 작은 '나'에서 그 껍질을 깨고 나와 큰 '나'의 시각으로 나의 삶을 너머 우리의 삶을 바라볼 때, 자신의 삶이 "있는 그 장소"로서 그 "지역"을 찾아낼 것이다.

이윤엽_완전85크레인/결혼사랑_목판화_각 76×57cm_2011/2010
이해균_신수_캔버스에 유채_2005
전경선_기억_나무_40×40×15cm_2010
조성근_희망_디지털 프린트_20×30cm_2011

4. 프로젝트의 프로그램화 전략 ● 이 글은 분명한 하나의 목적을 위한 제안이다. 수원에서 예술 활동은 편의상 수원에서 살면서 예술 활동을 통해 주요 흐름에 뛰어들 준비를 하는 예비적 성격을 가지거나, 아니면 수원에서만 가능한 고유한 지역-공동체의 문제의식을 드러내는 그 자체로서 하나의 흐름을 주도하는 예술 행동에 참여하는 두 가지 방식에서 구분되어야 한다. 모든 지역미술은 이 같은 문제를 공식화 할 때, 그 이상의 자유로운 선택을 가질 순 없다. 모든 예술 활동은 그 자체로 완결되어 있다는 전제로부터 예술작품에 담긴 "뜻"을 어떻게 읽어내야 하는가 하는 사회성을 지니게 된다. 모든 예술 활동은 작품이라는 방식으로 드러난 결과에 의해 온전한 하나의 세계를 밝히는 일이다. 그러므로 예술작품은 비록 감상자들의 비평적 시각과 취향의 호불호의 문제와 작가와 작품 그 자체의 지명도를 떠나서 "텍스트로서 그리고 콘텍스트로서" 읽혀져야 하고 해석되어야 할 관계 안에서 이해된다. 이같은 예술작품의 성격은 우리에게 지역성을 기반으로 하는 하나의 문화행동의 기본 방향을 보여준다. 문화행동이란 예술가들의 활동 및 일반시민들의 삶이 가지는 보편성을 함께 아울러낼 수 있는 개념이다. 그것은 바로 예술작품-예술 활동을 어떻게 유의미한 것으로 먼저 제시하면서 일반인들의 감상적 비평을 작품과 예술 활동 쪽으로 끌어들일 수 있는지 문제설정을 개진할 수 있게 한다. 따라서 순서는 수원지역의 문화 활동의 타당성을 선점해보는 것이다. ●「「수원주거미술행동」」(약칭으로 '주거미술'이라 한다. 이렇게 굳이 이름을 붙여서 이 글에서 보다 논의를 집중하려 한다. 단, 이 명칭은 언제든지, 누구에 의해서든지 개명될 수 있다.)이라는 프로그램을 제안하고자 한다. '주거미술'은 프로그램이면서 프로젝트다. '주거미술'은 작가들을 초대하여 한 달 가량을 주어진 과제 및 과업의 완수를 목표로 작품을 제작하고 수원 지역 내에서 예술 활동을 실행하게 한다. 이 성과물들은 과업실행 시기 직후 한 달 가량동안 지정장소에서 전시되고 이후 운영자 측에서 판단하여 년간 단위 또는 결정할 수 있는 방식에 따라 전체-종합 전시로 재-기획될 수 있다. 초대작가를 엄선하기 위해 전담 운영팀을 구성하는 것이 좋고, 책임 큐레이터를 두어 기획의 성격이 드러날 수 있도록 최소한의 시기를 보장해주는 것이 좋다. 여기서 제안하는 적절한 시한이란 갑론을박의 대상이 될 수 있지만, 최소한 3년을 보장하는 편이 적당하지 않을까 싶다. 이 제안을 정리하여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 (1)수원에서 미술활동을 축으로 하는 작가거주프로그램을 계획하고 실행한다. (2)거주프로그램은 전체 기획방향과 매년 단기 기획방향의 연속성을 지니면서 함께 조율되고 기획 운영되어야 한다. (3)기획운영팀을 별도로 구성하여 전문성을 보장하고 최소 임기를 보장한다. (4)거주프로그램을 위한 최소한의 시설과 장비는 도심에 마련한다.(적절한 방안으로 제시될 수 있는 것은 기존 시설물을 최소화하는 리노베이션 방식으로 전시실, 창작실, 사무실로 주어진 크기에 맞추어 사용하는 방안이다.) (5)초대작가는 기획운영팀의 기획 방향과 주제에 맞추어 선정되며 기본적으로 수원내 작가 50%와 수원 외 지역으로서 해외, 한국내 지방 제 도시 등을 포함하여 50%정도 적용한다. 가능한 관심과 작품해석의 방향성이 유사한 궤를 가지는 작가들로 상호연관성을 고려하도록 한다. (6)초대작가는 년 10명, 총 11개월 운영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7)초대작가는 소정의 작업비, 생활거주비 및 왕복교통비를 지원받는다. (8)초대작가는 최소 30일, 거주자 프로그램 지정 장소에서 활동하면서 주어진 과업을 수행해야 한다. 수행과제로 상정해 볼 수 있는 것은, 유치부-초등학교 미술현장 수업진행이나 지정 시설(노인시설, 장애인 복지시설 등)에서 필요한 각 종 프로그램 및 프로젝트에 작가의 개인적인 재능과 열정을 기부하는 형식으로 참여하면서 작품을 남기도록 하는 방안을 제시할 수 있다. (9)초대작가는 거주기간 외 30일간 지정 장소에서 성과 및 과제에 따른 작업을 전시형식으로 발표해야 한다. (10)모든 제반 비용은 기본적으로 수원시에서 지원하는 방안을 근간으로 점차 기업후원의 형식으로 전환할 수 있는 방안을 함께 모색하도록 한다.(년간 운영비 포함 총 예산은 3억 내외가 순수하게 프로그램 운영비로 소용될 것이다. 따라서 시설 및 장비 부문의 투자예산을 별도로 책정되어야 현실성을 가진다.) ● 이같은 프로젝트-프로그램을 통하여 얻을 수 있는 수원지역의 예술활동과 작가들의 몫은 무형의 자산 및 유형의 자산 모두 가능하다. 우선 수원의 지역성이 이 프로젝트를 통해 프로그램화에 맞추어 초대된 작가들의 결과물로부터 점차 특수한 양상, 특징으로 모아질 것이다. 그리고 이 프로젝트의 운영방향이 곧 수원미술의 현재, 즉 지금-여기를 단적으로 드러낼 것이다. 또한 수원 지역의 작가들이 수원 밖의 작가들을 초대하는 일대 일의 관계로 이 프로젝트의 성격을 파악할 수 있다면, 드디어 수원의 지역성은 예술 활동을 통해 그 문제점을 명확하게 하는데 이바지 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단순히 예술 양식이 유사하다는 이유로 동반자 의식(partnership)을 가질 순 없기 때문이다. 초대작가들은 지속적으로 일대일의 관계 속에서 대화를 이어갈 것이고 그 대화를 통해 수원-여기에서 삶과 예술 활동이 본 프로젝트 안에서 수행되어야 할 과제에 맞추어져 심화될 것이기 때문이다.

최세경_Life-deepen black_합성수지에 마커_370×90cm×8_2010~2011
최승일_Give light on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47×27cm_2010

5. 정리하면서 나가는 말 ● 지역미술은 지리적으로 다른 지역과 구분되어진 상태에서 한 지역에 모여있는 작가집단을 가리키면서 동시에 그들 각자의 미술활동을 아우르는 말이다. 이 지역미술이라는 모호한 지시를 통해 우리는 그래서 아무것도 알 수 없다. 더구나 각 지역의 지역 작가들은 "지역"에 대한 이해를 가지지 못한 채, 지역의 특정한 소재를 반복적으로 소비시키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이런 예술 활동의 답습이 항상 진취적이면 가장 앞선 정신적인 전선에 스스로 배치되어야 할 작가로서 입장을 둔화시키고, 마비시키는 부정적인 결과로 드러나게 된다. ● 지역에서 활동하는 모든 예술가들은 자신의 삶의 기반인 그 장소의 성격으로부터 거기에 있는 것이다. 당연히 모든 예술가들은 지역의 예술가이며, 동시에 공동체의 성격을 규정하고 드러내는 첨예에 매달려 무진(無盡)의 방식으로 맞서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의 재능은 거기에서 빛이 나며, 그들의 작품이 보편성을 얻게 되는 계기 또한 거기에서 자리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지역미술의 한계에 대해 상대적인 관계를 따져 물어 이해할 것이 아니다. 지역미술의 한계는 지역미술의 특성 또한 아니다. 지역은 지역으로서 삶의 현장을 보전한다. 이제 지역(수원)에서 예술 활동은 스스로가 어떤 의미를 가지고, 방향을 잡아가면서 보존될 수 있는지 물어야 한다. 제 작품이나 각 각의 예술가가 하나로 모아들여질 수 있는 지역의 프로그램이 이젠 프로젝트로서 실험되고 있어야 한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다양한 양식실험을 게을리 해선 안 된다. 수원미술은 어떤 예술 활동을 위해, 어떤 프로젝트로부터 어떤 프로그램을 수행하고 있는가? ■ 이섭

홍성일_어떤 기억들 3_디지털 프린트_50×75cm_2011
황은화_책상_철, 합판에 아크릴채색_100×148.5×16.5cm_2011
황제성_순환의 바람으로부터_캔버스에 유채_90×45cm_2011

● 아래 글은 위의 글 이섭의 「수원미술의 탈중심화 전략을 위한 제안」에 대한 수원미술전시관 큐레이터 조두호의 지정토론 글입니다.

탈-중심화 전략을 통해 수원미술의 차별화 필요 ● 「1.들어가는말」에서 발제자는 수원미술의 탈- 중심화 전략을 제안하는데 앞서 이분법이라는 서구중심의 사고를 통해 바라본 중앙과 주변이라는 개념에 대해 언급했다. 이분법에 의하면 중앙은 서울이고 주변은 수도권을 포함한 지자체로 나뉜다. 이는 정치, 경제, 행정뿐만 아니라 문화예술 활동에도 적용된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물론 지자체들은 각자가 서로의 주체적인 입장을 표명하겠지만 결국 한국의 중심은 서울이며 수원은 주변임을 인정해야만 한다는 관점이다. 이는 서구중심의 가치관이 지배하는 동시대에서 아시아가 세계의 맹주자리를 차지하지 못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며 아시아의 중심이 한국이라 자신 있게 주장할 수 없는 것과도 같다. 더 나아가 모두가 인정하지 않는 가운데 한국의 중심이 수원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하루빨리 탈-중심화의 문제에서 중앙과 주변의 경계 허물기는 극복 불가능함을 인식하고 수원이라는 지역이 갖는 지역성의 활로 개척과 그 안에서 활동하는 작가의 역량을 기르는 편이 낳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중앙과 주변의 차이성 인식이 시급하다. 틀림이 아닌 다름을 인정하고 차별화 전략을 펼쳐야 할 때이다.

문화·예술 공동체로서의 수원, 지역성 획득 문제 ● 「2.예술활동에서 "지역성"을 어떻게 이해 할 것인가?」에서 발제자는 지역과 지역을 나누는 방식으로 행정구역 구분을 언급했다. 예를 들어 수원과 용인의 차이가 서로 다른 장소의 문제로만 구분될 뿐 의식의 차이는 포착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다시 말해 행정상의 구분 외에 의식의 차이인 문화적 차이가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특히, 예술-미술에서 나타나는 지역과 지역 간의 차이는 찾아보기 힘들다. 다음으로 문화·예술을 구분하는 방법으로 정체성이 거론됐다. 눈으로 확인할 수 없는 정체성은 시간의 경과에 따른 공동체가 갖는 역사의 흐름, 그 장소를 지니고 삶을 영유해온 사람들의 삶 속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손으로 만질 수 없고 눈으로 확인 할 수 없는 개념으로 늘 유동적이며 수시가변에 대한 가능성이 열려있다. 그리고 정체성은 비슷한 기억을 공유하는 집단의 문화적 층위에서 파악된다. 즉, 공동체에 대한 이해를 수반하게 된다는 말이다. 공동체란 개인기억을 넘어 집단의 기억인 역사를 공유하게 된다. 나아가 같은 문화를 공유하는 것이 공동체이며, 이들은 장소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유기적인 소통과 지속적 관계를 통해 발전해 간다. 문화·예술 활동은 정체성확립의 돌파구이며 수원이 지니는 역사적, 장소적 특성을 반영한 지역적 특성을 획득해야한다.

예술가는 삶의 현장으로 뛰어들어야 한다. ● 「3.예술가(수원지역의 작가)에게 "지역(수원)"이 가지는 의미」는 수원 지역의 예술가에게 있어 수원은 어떠한 모습이고 어떤 방식으로 발현되는지를 언급한 내용이다. 지역성이랍시고 찾는 것이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수원의 역사나 문화적 소재(화성-팔달문, 장안문, 방화수류정 등)따위에 치우지는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이것은 수원이 갖는 장점이자 단점으로 작용한다. 선조로부터 물려받은 위대한 유산들은 소중하지만 동시대를 살아가는 예술가에게 지울 수 없는 문신 같은 것이다. 자칫 상징적 기호에만 국한 된 획일화된 수원을 만들어내는 지름길이 될 수 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예술가는 삶의 현장으로 뛰어들어야 한다. 지속되어온 공동체를 규명하고 연구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또한 문화·예술활동이 수원의 지역성과 다양한 방식으로 연계될 수 있게 노력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 무엇보다 지역미술을 이끌어나간다고 자부하는 토착된 예술가들의 열린 자세가 필요하다고 본다.

문화·예술의 항구성 확보를 위한 제안 ● 「4.프로젝트의 프로그램화 전략」에서 발제자는 이번 제안의 구체적 방안 제시로서 수원에서 실현되어야 하는 예술 활동의 방식을 '수원주거미술행동(이하 주거미술)'라는 가제를 통해 언급했다. 주거미술은 쉽게 말해 예술가가 특정한 공동작업실에 입주하여 일정기간 동안 예술 활동을 펼치는 '레지던시 프로그램(이하 레지던시)'으로 정의 된다. 앞서 제기된 수원지역의 탈-중심화와 수원이 갖는 고유의 정체성 그리고 공동체의 문제를 극복하는데 있어 현실적 대안을 레지던시로 제시한 것이다. 이것을 위한 단계적 전략으로 프로그램개발과 전문 기획인력 확보, 도심과 인접한 장소에 작업 공간 마련, 적합한 예산지원의 순서로 열거했다. ● 레지던시는 작가에게 작업실과 작업지원비 등을 지원하여 지역 안에서 안정적인 문화·예술 활동을 펼칠 수 있게 돕는 장치이다. 지자체에서 안정적으로 지원하는 레지던시는 예술 활동의 항구성을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 이는 우수한 예술자원이 외부로 이탈하는 현상을 막음과 동시에 타 지역의 우수한 예술자원을 끌어들이는 문화 인프라 확장을 도모케 한다. 뿐만 아니라 정해진 기간 동안 다양한 프로그램(전시, 교육, 오픈스튜디오, 공공미술 등)을 통해 기존의 전시·교육시설이 지니는 한계를 극복할 수 있다. 수원은 동시대 예술가의 작업을 수집하여 전시와 교육을 수행하는 미술관이 부재하다. 근래에 들어 언론을 통해 미술관 건립에 대한 발표가 있었지만 연구용역 정도가 진행 됐을 뿐 결과는 요원하기만 하다. 수원은 막대한 예산이 투입되는 거대한 미술관 건립만을 고집할 것이 아닌 레지던시를 우선 설치함으로써 문화·예술에 대한 공공의 향수를 자극하는 기회를 마련해야 한다. ● 하지만 레지던시에 대한 앞선 언급에서 설립에 대한 프로세스만을 강조한 것은 상당한 우려를 낳을 수 있다. 이미 국내·외의 공·사립 기관에서 다양한 장소를 활용해서 그 만의 독특한 맥락을 형성해왔는지에 대한 선행된 연구와 조사가 절실히 필요하다. 단순히 시설과 인력으로 채워진 레지던시가 아닌 어떤 주제와 목표를 담는 레지던시인지가 중요하다. 또한 이미 수원에서 자리를 잡고 활발하게 활동 중인 '행궁동 레지던시'와 같은 민간 주도형(일부 지자체 보조금 지원)의 프로젝트에 대한 검토가 있어야 한다. 행궁동 레지던시는 지자체 주도형의 미술시설이 부족한 지역적 특성에 반동으로 생성된 자발적 공간으로 예술가가 스스로의 실천의지를 통해 설립했다. 이러한 경우 민간 주도형의 특성상 대표 중심으로 운영된다는 단점을 지닌다. 기획의 전문성이나 심사의 공정성이 확보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지자체는 민간이 주도하는 문화시설에 대한 적법한 지원 시스템을 만들어야하며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그래야만 수원 문화·예술의 독창적 정체성과 지역성이 개발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지역을 위한 막연한 한마디, 노력과 고민 ● 공동체란 같은 문화를 공유한다. 공공의 기억을 공유하는 것이며 결국, 역사를 공유하는 것이다. 수원에서 삶을 영유해온 이들에게 과연, 수원은 어떻게 기억되고 있는가를 먼저 생각해 봐야한다. 땅덩어리로서의 수원, 서울에 인접한 수도권 위성도시로서의 수원, 정조 대왕과 유네스코 유산으로 기억되는 화성의 도시인 수원 등등. 수원이 갖는 성격과 정체성을 온전히 파악하기 위한 다양한 각도의 노력이 필요하다. 특히, 문화·예술의 도시 수원, 예술가와 그들이 행하는 예술이 꽃피는 수원을 만들기 위해서 많은 고민이 필요한 때이다. ■ 조두호

Vol.20111230b | 오늘, 또 다른 이 날-미술, 수원에서 길 찾기展 ②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