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111230b | 오늘, 또 다른 이 날展으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11_1206_화요일_05:00pm
참여작가 경수미_권성택_권용택_김리윤_김석환_김성배 김수철_김영섭_김찬일_김희곤_남기성_남부희 박성현_박용국_박용복_박종만_안재홍_우무길 유지숙_윤기섭_이석기_이선열_이오연_이윤기 이윤숙_이윤엽_이해균_전경선_조성근_최세경 최승일_홍성일_황은화_황제성
주최 / 수원예총 주관 / start운영위원회 후원 / 수원시_기업은행
관람시간 / 10:00am~07:00pm / 월요일 휴관
수원시미술전시관 SUWON ART CENTER 경기 수원시 장안구 송정로 19 전관 Tel. +82.31.243.3647 www.suwonartcenter.org
수원에서 미술, 길을 찾다 ● 모든 예술은 언제나 작가 자신으로부터 하나의 맥놀이 결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작가 는 자신에게 주어진 '지금-여기'를 그래서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하는 물음의 궁구로부터 '작품-자신'의 '삶-세계이해'를 도모하는 것입니다. 오늘, 수원에서 창작활동을 하고 있는 작가들에게 "오늘"과 "지금 그리고 여기"는 어떻게 이해되고 있습니까? 예술은 결코 하나의 이념이나 전문적 지식체계 안에서 드러나거나 이해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예술은 그 창작행위에 가장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그들(예술가)의 이해가 어떻게 자신과 자신의 주위를 바라보고 있는가 하는 "둘러 봄"에 의해 의미를 가질 뿐입니다.
"둘러 봄"은 작가에게 미세한 외부로부터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태도를 먼저 요구합니다. 이 말이 자칫, '세상 돌아가'는 세속의 소리에 관심을 두라는 권고처럼 받아들여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사람은 저마다 나 혼자 살지 않습니다. 그래서 '세상 돌아가'는 소리는 아주 중요합니다. 더구나 작가에게 세상과 소통을 전제하는 작업을 갈망한다면, 세상사에 대한 관심이 없다는 주장은 억지와 같습니다. 그러나 그 "세상"이 무엇이고 어떻게 자신과 관계하는지 작가는 자신의 관점으로 정리하고 받아들입니다. 다만, 독단에 의거한 채 그리고 개인의 취향과 취미에 초점을 맞추어서 그것을 "세상"이라고 말하는 것은 관계 맺기에 이미 실패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둘러 봄"은 작가가 자신의 몸과 정신이 있는 그 자리로부터 자신의 주위세계를 살피는 행동으로부터 가능해지는 고유한 작가의 태도가 될 것입니다. 작가마다 그 둘러보는 행위를 통해 다양한 주위세계를 자신에게 불러들일 것입니다. 예술가의 작품-예술행위는 그런 둘러봄의 결과로부터 우리가 이미 알고 있었던 세상이 전혀 다른 의미로 그리고 모습으로 작가에 의해 전해지기 시작할 것입니다. 예술가의 둘러봄은 그래서 저마다 자신의 "지금"과 "여기"로부터를 동시에 드러내는 행위이기도 합니다.
예술에 있어 '지금-여기'는 늘 '또 다른 지금과 여기'일 뿐입니다. 이같은 예술의 시작이 가능한 '때와 곳'을 현재라고 말해본다면, 예술의 현재는 항상적으로 무엇을 기록하고 동시에 기록을 통해 의미를 구축해나가는 일이 되기도 합니다. 기록과 의미구축은 결국 예술가의 행위를 지속화시키고 변모를 향하게 합니다. 아울러 기록과 의미구축은 작가에게 자신의 시각과 자신만의 시야에 잡혀 들어 올려지는 "세계"를 세상 사람들과 드디어 나누어 가질 수 있게 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앞으로 무엇이라고 불러야 할지 고민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런 '관계맺기'에 좀 더 능해진다면, 그 때에 우리는 소통의 문제를 전제로 하는 예술 자체를 작가들의 작품에서 직접적으로 다루면서 의제를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만, 우리는 작가들의 작품을 통해 그 다름의 연속에서 무엇이 어떻게 이해를 구하고 있는지 살펴 볼 뿐이기에, 순서상 언제나 작가의 작품을 기다리는 수동적인 입장만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작가는 그래서 자신의 작품으로, 이미 제작되어 일정한 평가 위에 놓인 작품들로부터 기다리는 사람들과 '오늘 그리고 또 다른 이날'을 통해 만나게 됩니다.
전시는 수원에서 지금,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작가들의 작품을 통해 바로 '수원에서'(지금-여기) 그리고 '각자의 그 곳'(여기-지금)에서 작가들은 무엇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오늘, 또 다른 이 날'에 대한 제언들이 수원에서 미술이 길을 찾는 첫 걸음이 아니라, 또 다른 하나의 걸음으로 이해되기를 바랍니다. 결국 길을 찾는 다는 것은 작가들의 다양한 시도가 전제되어야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작가들의 작품을 다양하게 해석하여 내보일 수 있는 방법에 대한 이해도 필요합니다.
"오늘"이라는 주제를 통해 수원지역 작가들의 작품들을 현재진행형으로 해석해보고자 합니다. 해석의 방향은 중심-주변의 관계가 아닌 '중심으로서 그 자체'인 수원의 미술경향을 점차 명료하게 드러낼 수 있는 가능성을 찾는데 모아집니다. 이를 위해 초대된 전시작품은 전부 구작(舊作)들이며, 이 작품들을 세 가지 카테고리로 나누어 제시하고자 합니다. ● 카테고리 1. 생활경험의 구상표현 / 카테고리 2. 전통적 표현의 해석 / 카테고리 3. 미디어의 감성표현 ● "생활 경험의 구상표현"은 그 말이 꾸며 내보이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작가 자신의 생활 경험을 관객과 공유하고자 하는 예술행위를 모아들입니다. 구상표현이라는 지적은 작품의 외형적 특성이 무엇을 그림으로 그리고 제시하는지를 그 구체적인 형태로부터 쉽게 이해하고 동의할 수 있다는 형식적 특성을 제한시켜 지시합니다. 수원의 작가들뿐 아니라 세상 어디에도 대개의 작가들은 자신의 생활 경험으로부터 작품의 소재를 찾아내거나 발견합니다. 그것을 작가 저 마다의 독특한 관점으로부터 해석해 냄으로 다른 의미로 내비치고 전달됩니다. 수원에서 삶이 가져다주는 같으면서 다른 '생활의 발견된 의미'를 이번 전시에서 찾아보고자 했습니다. 소시민의 시선으로 주위세계를 바라보는 작가의 작품은 우리에게 위안을 주면서 아울러 도시인의 삶이 가지는 팍팍한 현실을 들추어내기도 합니다. 엄마가 되어가는, "내 삶의 풍경"을 작품으로 정리함으로서 우리는 "엄마의 단편"을 이해하고 동의하면서 작가가 고정시켜 준 그 시야 안으로 들어가 세상을 만나게 됩니다. 또 다른 카테고리로서 "미디어의 감성표현"을 두었습니다. 일반적으로 미디어라고 하면 매체활용 또는 매체적 속성을 지닌 예술활동을 제한적으로 명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번 전시에서 미디어를 다르게 해석하고 그 해석의 폭을 작가의 작품제작의도에 맞추어 보려 했습니다. 달리 말하자면, 작가의 모든 작품은 관객과 소통을 전제로 만들어 진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소통의 단절이나 아예 소통의 불가해성은 작품이 아닌 것이 됩니다. 그러나 어떤 작가도 자신의 작품이 모든 이들에게 소통되지 않는 다는 이 사실로부터 작품을 또한 제작합니다. 그렇다면 소통의 불가해성은 사실 작품제작의 단초부터 예술행위의 근간이 되어 있다는 방증처럼 우리가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추상표현과 미니멀한 경향을 내 보이는 작품들을 미디어라는 매체적 속성으로 묶어 보자고 작정을 해 봅니다. 우리 화단의 미니멀계열의 작품들은 사실 미술사에 등장하고 있는 미니멀한 그 조류에서 빗겨서 있습니다. 이성적 합리성에 의존하여 궁극의 절대성으로 이해되는 미감(the beauty)을 구성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국적 미니멀이라고 총칭하기엔 좀 부족하지만, 우리 미술계에서 미니멀 작품들은 이성적 합리성에서 도출되는 절대미를 다루기보다 작가의 감성적 행위에서 비롯된 최소한의 표현방식으로 그 형식적 특질이 공통적으로 드러납니다. 그래서 미디어의 이해를 가지고 있으면서 동시에 소통의 불가해성을 작품제작의 근간으로 삼는 작품들이 결과적으로 감성적 행위에 연결되어 있다는 해석을 해보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전통적 표현의 해석"이라는 중의적 의미를 하나의 카테고리로 제안해 보았습니다. 대개의 작가들이 이 범주 안에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전통적 표현은 회화의 회화성으로 등장하고 있는 평면의 이해를 우선 지적합니다. 서양미술사에서 평면성은 수리적 이해로 인해 등장한 원근법의 전통으로부터 현대회화가 쟁투의 노획물처럼 가지게 된 미술적 언어입니다. 하지만 우리 미술 안에서 평면성은 그런 문화적 전통 안에서 성장하지 못한 채 미술행위의 물질적 토대로서만 작동합니다. 이 비슷한 경우가 한국화에서 진경산수에 대한 이해일 것입니다. 진경산수는 중국관념산수에 대응하는 조선 후기의 세계관을 보여줍니다. 겸제의 진경은 사실 사생된 풍경입니다. 산수는 자연이고 자연은 작가의 세계관입니다. 그러나 겸제는 산수를 풍경으로 해석한 근대인의 시선으로 전통을 역습하고 있습니다. 이 전통이 오늘 우리 한국화에 남겨져 있습니다. 그러나 이젠 산수가 자연이해와 세계관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마치 서양화의 풍경처럼 다루어집니다. 겸제의 풍경은 역습이었지만, 지금 산수화 형식의 풍경과 사생은 답보일 뿐입니다. 그래서 전통의 해석을 문제 삼는 것입니다. ● 수원에서 미술에 길을 물어 보려 합니다. 어디에서든 미술은 길을 잃었습니다. 만일 우리가 수원에서 길을 찾는다면, 수원에서만 길을 찾는 것이 아닙니다. 다행스럽게도 수원에서 열정 넘치는 작가들과 작품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하지만 갈 길은 멀고 해는 뉘-엇지고 있어 발걸음을 재촉해야 합니다. ■ 이섭
Vol.20111230a | 오늘, 또 다른 이 날-미술, 수원에서 길 찾기展 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