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옷 sweetly dressed

배정진展 / BAEJEONGJIN / 裵貞珍 / painting   2011_1216 ▶ 2011_1228 / 월요일 휴관

배정진_무대인사_part_캔버스에 유채_324×130.3cm_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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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1_1216_금요일_06:00pm

2011-2012 청주미술창작스튜디오 아티스트 릴레이 프로젝트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월요일 휴관

청주미술창작스튜디오 CHEOUNGJU ART STUDIO 충북 청주시 상당구 용암로 55 Tel. +82.43.200.6135~7 www.cjartstudio.com

2011-2012 청주미술창작스튜디오에서는 제5기 입주작가 아티스트 릴레이 전시를 개최한다. 이번전시는 그간 작가들의 입주기간동안 제작된 작품들을 중심으로 스튜디오와 외부에서 진행된 전시 및 개별프로젝트 등을 정리하여 전후 작가의 향방을 보여주는 전시로 보여준다. 배정진의 작업들은 일련의 만화적인 캐릭터 혹은 아바타의 옷입기로 술회된다. 그녀는 익숙하고 부유하는 이미지를 뒤섞으며 숭고하거나 권위적인 지점에 유머를 주사하며 그녀만의 독특한 캐릭터로 부활시킨다. 화면은 희화된 반고호의 초상 혹은 물신화된 팝 이미지 등 권력화된 이미지에 비아냥과 냉소를 접목시킨다고 할 수 있다. 반항적, 반귀족적인, 속물적인 난장, 사회적인 결여, 아웃사이더 등이 그녀의 무대에서 그녀가 만든 이미지의 옷으로 갈아입혀 신분 없는 이미지로 등장시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 청주미술창작스튜디오

배정진_이상한 나라의 고흐Ⅱ_캔버스에 유채_112.1×145.5cm_2011

배정진 : 팝필리아 Pop-philia ● 미술을 전공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읽어봤을 책 중에 빠질 수 없는 게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가 쓴 「예술에 있어서 정신적인 것에 대하여」일 것이다. 이 회화론에서 그가 색을 탐구한 부분이 있다. 칸딘스키는 흰 색과 검은 색을 각각 새로움과 익숙함이라는 극단에 두고, 그 사이에 있는 무수한 색의 상태나 조합을 미술의 한 가지 요소로 생각했다. 그가 썼던 이 비유는 예술 창작에서 완전히 낯선 새로움 혹은 모두 확인된 익숙함은 존재하기 어렵다는 진리를 우리에게 전한다. 우리가 감상하는 모든 예술 작품들은 우리가 알고 있는 정보가 0%에서부터 100% 사이의 어느 위치에 자리 잡고 있다. 현대 미술은 관객들에게 50이라는 양분되는 선의 양쪽 가운데 100%의 앎보다 0%의 모름에 더 치우쳐져 있었다. 하지만 그 참신한 낯섦은 끊임없이 새로움을 추구하는 현대예술의 작동원리에 의해 익숙한 것이 되어버렸다. 이와 같은 역설(paradox) 앞에서 현대 미술은 좀 더 '낯선 익숙함'을 이끌어내며 역설을 부정하지도 긍정하지도 않은 채 그대로 드러내며 숭고함을 일부분 되찾는다. 패러디(parody)도 그중 하나다. 서양화가 배정진의 작업은 낯섦보다 익숙함이 눈에 더 띈다. 그녀의 작품들은 칸딘스키 화론의 50%에서 100% 사이를 점유하고 알록달록한 경쾌함을 뿜어내고 있다. 나는 위의 두 문단에서 이야기한 내용은 미술전공자나 지적인 삶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내 어수룩함을 짚어 내라고 하고, 나머지 다른 사람들에게는 이 젊은 미술가의 작품을 다른 식으로 즐겨보라고 제안하고 싶다. 그것은 간단하다. 전시 공간에 들어선 관람자들은 그녀의 작품들에서 등장하는 얼굴을 몇 명이나 알아맞히는지 겨뤄보자는 게임이다. 이 게임의 승자도, 모두가 즐길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미술인이나 문화지수가 높은 사람이 될 가능성이 크다. 우리가 그녀를 팝아티스트라고 부르길 본인이 원하는지 아니면 꺼리는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작가의 의사와 관계없이, 그와 같은 등장인물 알아맞히기 게임이 성립된다면 그녀는 이미 팝아티스트다. 대중문화의 수혜자인 화가가 자신의 취향을 대중과 교감하는 일은 팝아트의 핵심이다. 그녀의 작품 그 자체가 준비해 놓은 텍스트를 가려내는 것은 흥미로운 게임이며, 아울러 2차적 질서의 관찰자 역할을 수행하는 나는 작가와 관객이 재미를 동감하면서 그들이 하나의 인지적 커뮤니케이션 공동체(kommunikat)로 결속된다는 사회현상에도 무척 관심이 간다.

배정진_깊은 밤의 서정곡_캔버스에 유채_116.7×240.9cm_2011

배정진의 작업은 기본적으로 작가 본인이 애착을 가지는(가끔은 혐오하는) 대상을 그림 속에 끌어들인다. 일단, 내가 그녀의 작업에 끌릴 수밖에 없는 이유(따라서 객관적인 비평을 성취할 수 없는 이유)가 나 또한 그녀의 작품 속 대상을 같이 좋아한다는 점이다. 먼저 사람은 아니지만 초콜릿이 든 동그란 과자가 좋고, 「백 투 더 퓨처(1985)」 영화 자체보다 주인공 마이클 J. 폭스가 입은 패딩조끼와 목 긴 운동화 차림이 좋고, 무엇보다 비틀즈를 나도 작가처럼 좋아한다. 이들 대상들은 대부분 우스꽝스러운 자태로 등장한다. 만화 주인공들처럼 땅딸한 신체 비율에, 남성이 여장 차림으로, 서양인이 한복 차림으로 등장한다. 이 점에 대하여, 이성 중심-남성 중심-서구 중심으로 구성된 현대 사회의 위계구조를 작가가 의식적으로 비판하는 건지, 아니면 의식하지 못한 채 그 이데올로기에 빠진 탓에 오히려 우리가 작가를 비판해야 되는지 나는 정확히 모르겠다. 분명한 것은 작가 배정진이 우리 대부분의 대중적 성향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는 점이며, 그것이 사실적이지 않은 묘사를 통해 사실을 드러낸다는 탁월한 점은 우리가 충분히 옹호해야 된다.

배정진_프리다칼로의 행복을 빌며_캔버스에 유채_80.3×116.7cm_2011
배정진_미안해_앤_캔버스에 유채_116.7×80.3cm_2011

더 나아가서 작가가 완성한 작업은 우리에게 좀 더 진지한 몇 가지 토론 주제를 던지고 있다. 대략 정리해보니까 세 가지다. 첫째, 미술이 대중문화의 진영에 속할 수 있는지에 관한 물음이 생긴다. 작가의 작업에는 고흐 이외에도 유명한 동시대 미술가들이 등장한다. 내가 '유명하다'는 표현을 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미술계에 한정된 이야기이며, 과연 그들의 얼굴을 식별할 대중들은 얼마나 되는지, 또한 그러므로 미술가들의 캐릭터를 다른 스타들의 캐릭터와 같이 배치시키는 게 타당할지 객관적인 의구심이 든다. 이는 전적으로 작가가 미술에 준거한 존재구속성의 인식으로 해석할 수 있다. 둘째, 문화이론의 맥락 안에서 배정진이 재현한 기술은 많은 사람들에게 당연히 그려지는 이미지의 이차적 차용이라는 점이다. 이미 스테레오타입으로 굳어진 얼굴, 가장 유명한 사진, 결정적인 영화 장면, 자화상 등은 현상학적으로 생각할 때 무수한 현존의 이미지들 가운데 극히 제한된 하나만을 포착할 뿐이다. 이 점에서 배정진은 예컨대 사진작가 유섭 카쉬(Yousuf Karsh)처럼 유명한 인물들의 얼굴을 재현할 조건을 갖추었다. 물론 작가는 카쉬의 야심과 달리, 자신은 제한된 취향의 기록이라며 겸손함을 표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사진술에 의지하는 예술 표현과 달리 그녀의 취향이 확장되면 그만큼 작품 세계의 지평도 넓어질 수밖에 없다. 사실 우리가 알고 있는 유명인들의 얼굴들은 사진술이 발명된 이후에 기록되어 인식하는 얼굴이다. 좀 더 과거 인물들의 얼굴에 관한 기억은 그림을 통해 획득되는 수밖에 없었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시공간의 제약을 초월할 수 있는 회화 매체의 장점을 화가 배정진은 이용할 잠재력으로 체화할 필요가 있다.

배정진_설치작업_2011
배정진_주머니 사정과 설치_2011

셋째, 예술사회학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대중의 사랑을 받는 스타를 월드 비트(world beat)라고 개념 짓는다. 가령 찰리 채플린이 그렇고, 마릴린 몬로, 엘비스 프레슬리, 디즈니 만화의 캐릭터들, 비틀즈, 체 게바라, 제임스 딘, 마이클 잭슨, 영화 스타워즈의 주인공들, 해리 포터, 스티브 잡스 등이 그들이다. 이 가운데 상당수는 배정진의 작품 속에 들어와 있다. 이때 문제는 이 글 속에 반복적으로 드러나는 것과 같다. '과연 작가가 좋아한다는 의미는 무엇인가? 그것이 예술 속에서 유쾌함 이상의 무엇을 실현시킬 수 있는가?'라는 말이다. 비틀즈를 좋아한다는 폭과 범위도 예컨대 'Let It Be' 'Yesterday' 'In My Life'에 그치는지, 아니면 'Happiness is a Warm Gun' 'Here, There and Everywhere' 아니면 'Golden Slumber'에까지 뻗어나가 있느냐에 따라 깊이가 천차만별일 것이다. 작가는 이러한 논쟁의 한 가운데에 서서 그 모두를 작업 그자체로 설명해야 한다. 잘 했었고, 잘 하고 있고, 잘 할 것이다. 우선 자기 취향의 표출이 관객과의 보편적 공감을 이끌기 위함이라는 덜 야심적인 작업 동기는 다른 어떤 개념의 포장 없이 앞으로 꿋꿋이 지켜질 가능성이 크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작가 개인의 문화 취향이 점점 깊어져가는 모습을 그녀의 그림과 입체, 사진 설치 작업으로 지켜볼지도 모른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그것은 즐거운 일이다. ■ 윤규홍

Vol.20111217e | 배정진展 / BAEJEONGJIN / 裵貞珍 / painting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