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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1_1102_수요일_06:00pm
지원 / 동덕여자대학교 학술연구비
관람시간 / 10:00am~06:00pm / 명절 휴관
공평아트센터 공평갤러리 GONGPYEONG ARTCENTER GONGPYEONG GALLERY 서울 종로구 공평동 5-1번지 공평빌딩 2층 Tel. +82.2.3210.0071 www.seoulartcenter.or.kr
파란 선긋기 혹은 파란선 긋기: 의미와 이미지의 다의적 현존 Blue Drawing or to draw blue line: A polysemous presence of Meanings and Images ● 윤종구의 선긋기는 이제 수년의 시간을 축적한 그만의 회화적 행위로 정착하였다. 단순히 사물을 지시하는 대리적 현상인 회화가 행위의 흔적으로써 남는다는 인식은 현대미술에서는 이제 지극히 보편적인 것이 되었다. 이 보편성 위에서 여전히 많은 화가들이 스스로 다양성과 독창성을 실험하고 있는 현재에, 윤종구의 회화가 지닌 고유성을 간추려내는 일은 그다지 쉬운 일이 아니다. 이제부터 전개될 논거는 그리기와 사유 그리고 그것이 결합하여 생산해내는 산물에 대한 비교적 개요적인 모습이 될 것이다.
윤종구의 선은 1mm의 파란색 볼펜만으로 그어진다. 색이나 선의 굵기는 이미 정해졌으므로 변화나 전개양상은 오직 시간상의 문제가 된다. 선들은 여러 파형을 지닌 포물선으로서 같은 혹은 유사한 행위를 반복하여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선들이 형성한 가스층과 같은 형태는 질료적 구체성이나 물리적 존재성을 확연히 드러내지 않는다. 이런 선들이 형성한 이미지들은 과거 그가 그린 다른 형식의 그림처럼 관객의 초점을 가시적 형태와 비가시적 형태의 중간 정도쯤에서 머물게 만든다. 그러므로 형태는 집약된 물질의 몸이 아니라 마치 스푸마토의 광학적 현상처럼 안개처럼 화면 이곳저곳을 채운다. 오히려 이미지의 외곽에 거칠게 풀려나온 선들이 더욱 강하게 명시적인 모습을 취한다. 과거 영국의 화가 윌리엄 터너가 그랬던 것처럼 그리고 그를 추종했던 초기 인상주의자들처럼, 형태란 사물의 재현이 아니라 인상이나 특정한 시각의 재현이 되고 있는 것과 유사해 보인다.
과거 모더니즘의 창시자들처럼 윤종구의 형태는 플라톤 식 관념의 세계에서 화면 위의 현상학적 실체로 이동하였고, 재현의 검증이 불필요한 상태에서 요동치는 색이나 붓질(행위)만을 바라보게 만든다. 이제 남은 것은 선들이 요동치는 모습, 즉 바이브레이션(Vibration)이다. 물론 이 바이브레이션이 유사형태나 혹은 연상이 가능한 형태를 구축하는 상황을 제공하지만, 그러면서도 이 요동침은 끝까지 스스로 '요동(搖動)'으로 보이기를 원한다. 필자는 이것을 일종의 기(氣)라고 해석한다. 이 기운은 행위를 이끌어낸 원동력이기도 하지만, 화가가 사물이나 대상 앞에서 느끼고 수습한 것일 수도 있다. 자연은 있는 존재가 아니라 움직임으로서 존재성을 확인한다. 그런 의미에서 윤종구의 화법은 형이상학적 차원으로서의 자연주의라고 정의내릴 수 있다. 왜냐하면 그의 회화가 자연의 외연이 아니라 그 대상이 존재하는 이유를 파악하고 그것을 재현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의 그리기는 방법적으로 살펴보면, 수많은 반복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작가는 이것을 '동일성'을 지향하는 것이라고 말하지만, 필자가 보기엔 같은 것은 하나도 없다. 매번 선은 새로운 물리학적 등식으로 이루어진 '다름(difference)'이고, 이 수없는 다름이 반복되는 것이라고 고쳐 말하고 싶다. 그래서 선들은, 같은 굵기와 색의 균질성에도 불구하고, 불확정적이며 계측 불가능한 것이 된다. 이것 또한 자연의 원리를 닮았다. 어찌되었건 이런 불확정적인 것들이 모여 확정적인 것을 유비하는 형태를 만든다. 그러나 형태가 어떤 특정한 것을 지시하거나 연상을 유도하는 것으로 그 기능을 삼았다면, 윤종구의 회화는 단순히 흐리게 그리기일 뿐이다. 대상의 모호함은 관객의 입장에서 보면 일종의 불안감과 등치된다. 그리고 이 불안감을 증폭시키는 것이 푸른색의 힘이다. 모호함이 동반하는 심리적 불안정은 어쩌면 안정적 미감의 확보를 전제로 했던 과거의 회화와는 다른 양태를 보여준다.
윤종구의 회화는 푸른 풍경화(blue landscape)이거나 정물화(blue still-life)이다. 과거 풍경의 이미지에 천착했던 작가는 이제 식물의 모습까지 다룬다. 하지만 기본적인 회화원리는 그대로 답습이 되고 있다. 무작위와 의식 사이에서 춤추는 행위는 어느새 연상할 만한 이미지나 꼴을 만들어 놓는다. 이즈음에서 윤종구의 선이 지닌 의미를 파악해 보면서 정리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우선 그의 선은 유동적이며 가변적이다. 물론 어떤 형태에 다다르는 과정에서 작가의 목적지향적인 의식이 개입되었던 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 하지만 선은 그 목적에 부합되는 윤곽을 그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반복하여 축적되는 양적인 것을 이루는 요소로서만 기능한다. 그러나 결국 그 양적인 것이 형태로 전이되는 것은 분명하다. 정리하면, 선은 그것이 구체적이든 추상적이든 어떤 형태를 이루게 된다는 것이며, 그 결론에 이르는 방법만이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선의 집적이나 해체는, 앞에서 암시적으로 언급하였듯이, 자연의 미시적 원리를 보다 확실하고 구체적으로 재현하려는 작가의 의도를 보여준다. 단순한 시선으로 보는 자연은 대상의 종합이지만, 이 대상 속으로 파고드는 미시적 시각은 부단하게 대립·갈등하면서 운동하는 에너지의 결합으로서 정의를 내릴 수 있다. 윤종구의 화법은 이러한 두 차원의 시각을 한 그림 속에 동시에 존재하게 만든다. 즉 멀리서 보면 축적된 선들이 이루는 거시적인 형태의 자연경관을 보여주지만, 가까이 가면 갈수록 우리는 끊임없이 요동치는 선들을 볼 수 있다. 이 선들은 바로 자연에 내재된 에너지로서 의미를 설정해 볼 수 있다.
윤종구의 회화는 이렇듯 다중의 관점과 시각 그리고 의미체계를 요구한다. 물론 이 모든 것이 안성맞춤처럼 결합되기는 쉽지 않을 것이며, 이 문제의 해결은 아직도 요원해 보이기까지 한다. 그러나 중간 점검으로서 보아도 윤종구의 회화는 현대미술에서 줄기차게 제기되고 논의되었던 시각문제와 이와 관련된 회화의 본질을 적절하게 적시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물론 이런 골치 아픈 생각에 이르지 않아도 좋다. 그저 백색의 화면 위에 펼쳐지는 푸른 사물의 율동을 그저 느끼는 것만으로도 감상의 기대는 충족되기 때문이다. ■ 김정락
Vol.20111104d | 윤종구展 / YOONJONGGU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