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일시_2009_1005_월요일_06:00pm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일요일 휴관
갤러리인데코_GALLERY INDECO 서울 강남구 신사동 615-4번지 B1 Tel. +82.2.511.0032 www.galleryindeco.com
반(反)풍경적인, 또는 이름표가 반쯤 떼어진 풍경 ● 데이비드 베일즈와 테드 올랜드의 표현을 따르면, "예술은 재료와 아이디어가 그 어떤 사심도 없이 결합되는 순간, 외부 세계의 영향과는 무관하게 창조된다." 이 길지 않은 문장에는 여러 의미가 담겨있지만, 재료의 비중이 그 중 특히 중요하다는 데에는 이견이 없을 듯하다. 예컨대 예술을 세계의 가치있는 일부로 만드는 것은 세련된 비평이나 위원회가 아니라, 사유와 재료의 참된 연합이라는 것이다. 재료를 다루는 사람으로서의 작가는 윤종구를 이해하는데 있어 매우 중요한 지점이다. 작가 윤종구는 사유나 관념에 경도된, 동시대미술의 통상적인 작가론으론 잘 설명될 수 없는 지점에 위치해 있다. 2009년에 그려진 「푸른폭포, Bluefalls」 연작은 그가 단지 절경에 도취된 음유시인이 아님을 보여준다. 폭포가 다는 아니다. 「푸른 풍경,Bluescape」, 「푸른 꽃, Blueflower」연작도 있다.
여기서 푸름은 그의 유일한 재료인 푸른색 볼펜의 색의 의미한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것은 안료로부터가 아니라, 깊이로부터 도래하는 색이며, 따라서 색이기 이전에 톤이며 깊이인 어떤 것이다. 그것은 단지 볼펜의 무수히 중첩되고 으깨어진 선들의 존재와 부재, 현현과 소멸, 곧 정복하고 정복되며, 충돌하고 역전되는 생과 사의 기록인 것이다. 그러므로 작가는 풍경을 완성해 가는 것이 아니다. 바위의 수많은 결들을 스치며 낙하하는 폭포나 끊임없이 바람결에 넘실거리는 수풀의 세부를 섬세하게 묘사해가는 것도 아니다. 작가는 다만 볼펜의 실팍한 선들이 무수히 겹쳐지면서 깊고 푸른 톤을 생성해내는 예민한 과정을 연장해가고 있는 것이다. 섬세한 톤의 변주는 예리하게 그어진 선 위에 다른 예리함이 얹혀지는 무한한 자기부정의 귀결로서 획득되는 것인데, 예민한 작가라면 이 부정과 그를 통한 생성의 교환과정에 동반되는 긴장과 환희에 대해 잘 알고 있을 터이다.
사실상 거의 모든 성공적인 변주는 재현이라는 사물의 인도를 따르는 대가로 얻어지기 보다는, (끝없이 되풀이되는) 이 교환 과정의 결과로서 만들어진다. ● 윤종구의 볼펜 끝에서 지속적으로 생성되는 그것은 결코 재현된 자연이 아니다. 결정적인 요인은 묘사가 아니라 변주며, 설명이 아니라 함축이다. 그럼에도 그것은 자연에 대한 가장 구체적인 종류의 언급이자 매우 설득력있는 묘사로부터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정교한 톤의 실현으로 물결은 바위들을 거치면서 수직으로 갈라지고 다시 뭉치기를 반복하고, 꽃잎은 잔뜩 물기를 머금고 있다. ● 윤종구의 모노크롬과 단조로운 볼펜선이라는 함축적 문법에 의해 오히려 자연은 대상을 넘어서는 하나의 차원으로 다가온다. 그것은 오히려 구체적인 폭포나 수풀이 아님으로써, 존재하는 모든 폭포와 수풀, 더 나아가 자연의 대변인의 격을 얻게 된다.
존재하지 않음으로써 더 존재를 표상하고, 가능하지 않은 것에 의해 가능한 세계로 다가서는 역설의 리얼리즘의 한 성취라 할까. 아니면, 가장 비자연적인 요인들의 한 가운데서 자연의 인식이 도약하고, 온갖 비실재들에 의해 실재가 비상하게 드러난 것이랄까. 그런데 이 세계는 왜 그토록 자연스러워 보이는 것일까? 물리적이며 법칙적인 세계와 추상적이며 비법칙적인 세계가 실상은 서로 분리되어 있지 않으며, 실제로도 그 양자가 구분되는 삶을 산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기 대문일까? 하긴 우리의 의식 역시 정신을 관념하는 세계와 물질을 대상으로 하는 세계가 함께 동거하고 있는 곳이긴 하다.
윤종구의 볼펜화는 그 표면적 유사성 때문이 아니라 그 역설적인 함축과 패턴화(化)에 의해 대상을 부각시킨다. 무엇보다 그의 깊고 푸른 톤이 우리의 인식의 작동지점에 해당하는 어떤 질서의 미묘한 변증적 지점을 건드리는 탓에, 그의 것은 풍경이 시작되는 지점과 풍경이 부인되는 곳의 어떤 경계부위에 위치하게 된다. 다시 바라보면, 윤종구의 이미지는 초점이 맞지 않는 것처럼 다소 어른거린다. 이 어른거림 사이로, 두 개의 질서, 두 개의 차원이 교차한다. 재료와 대상이, 실재와 비실재가, 자연과 비자연이, 그리고 풍경의 긍정과 부정이... 그것은 우리로 선뜻 하나의 이름을 부여하지 못하도록 한다. 그런데 이 경우에는 우리의 머뭇거림이 바로 우리의 가능성이 된다. ■ 심상용
Vol.20091008g | 윤종구展 / YOONJONGGU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