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열의 질주

여승열展 / YEOSEUNGYEOUL / 余承烈 / painting   2011_1102 ▶ 2011_1111

여승열_어느날 거리에서2_캔버스에 유채, 혼합재료_112.1×206cm_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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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1_1102_수요일_05:00pm

관람시간 / 11:00am~06:30pm

나무화랑 NAMU ARTIST'S SPACE 서울 종로구 관훈동 105번지 4층 Tel. +82.2.722.7760

현실, 분열, 파편그러나 어느날 우연히 1. 여승열이 전시를 한다. 14년 만이다. 홍대 앞에 있는 그의 작업실 찾아간다. 그림들, 캔버스들이 늘어서 있다. 그림 속의 이미지는 낯익고도 낯설다. 오래전에 그리던 그림의 연장선에 있다는 점은 낯익고, 이미지들 자체에 집중하면서 회화 혹은 그린다는 문제에 다가서려 한다는 점에서는 낯설다. 여승열의 그림들이 가지는 기본적인 구성은 변화하지 않았다. 화면의 일부분은 인쇄된 포장지들을 붙이고 나머지는 페인팅으로 채워져 있다. 화면은 분할되어 있으면서 동시에 분열되어 있다. 한 세계는 이미 만들어져 있는 빤한 패턴으로 이루어진 곳이고, 다른 세계는 작가의 관점에서 재현 되어 있다. 재현된 것들은 풍경과 이미지의 파편들이다. 풍경은 도시와 농촌 사이의 어디엔가 걸쳐 있는 장소처럼 보인다. 엄밀히 말하면 풍경이라는 것만 알 수 있을 뿐이다. 그 안에 사람들이 움직인다. 달리고 걷고 어디론가 사라진다. 그리고 아이콘과 비슷한 닭이나 새, 조류임에 분명한 생물들은 분열된 공간에 놓여있다.

여승열_골목길1_캔버스에 유채, 혼합재료_162.2×112.1cm_2011

2. 이것들을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초현실적 분위기이지만 정확히 그런 것은 아니다. 이미지들은 라깡이 말한 상상계의 일부처럼 해석 되어야 할 것 같기도 하다. 캔버스는 하나의 거울이고 거울에 비치는 이미지들은 사실 작가 자신이다. 단지 작가의 몸이 아니라 생각과 느낌이 이미지화 되어 비친다. 그 거울은 그러나 온전히 그의 것이 아니다. 절반 이상은 패턴화 된 무늬들로 채워진다. 그건 작가도 어쩔 수 없다. 그 무늬들은 시시하고 일상적이다. 루이 뷔똥도 애플도 삼성의 로고도 아닌 빤한 꽃과 나무의 이미지들이다. 너무 평범하므로 오히려 의미 있는, 이 제어할 수 없는 이미지들의 틈새에 페인팅이 있다. 그것이 작가가 자신 또는 세계를 보는 시선이다. 마치 라깡이 말한 상상계의 이미지들이 아기가 보는 전체가 아니라 일부에 지나지 않고, 자신의 모습 역시 파편을 재구성해서 보는 것과도 같이. 하나의 거울로서의 캔버스는 변주되지만 결국 자신을 비춘다. 그리고 그 얼굴은 작가를 넘어서 점점 사회로 확대된다. 확대는 작가의 의도 밖에 있다. 그가 그린 과거의 그림들과 그 점에서 다르다.

여승열_골목길2_캔버스에 유채, 혼합재료_116.8×91cm_2011

3. 요즘과 같은 시대에 우리가 겪는 분열증, 피해망상, 관계망상 따위는 일종의 필수 품목이다. 누구나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하루에도 정신과 감정이 몇 번씩 오락가락 한다. 개인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가 마찬가지이다. 아노미라든가 위험 사회라는 말 자체가 우리가 몸담고 있는 시스템이 얼마나 불안한가를 말해준다. 이는 근래에 우리나라에서 일어났던 대규모 정전 사태와 최근의 월가를 중심으로한 반자유주의 시위를 보아도 명백하다. 윤리적 가치, 도덕적 지향점이 없어서 일어나는 아노미는 무수한 착각과 겹친다. 일종의 도덕적 마비에 빠져 사람들은 착각한다. 자신의 삶이 과정이 어떻든 결과만 괜찮으면 그만이라고. 이는 범죄나 죄악의 문제를 넘어서 존재 자체를 규정짓는다. 그리고 그러한 착각은 공공적 영역에도 그대로 이어지고 확대된다. 근래의 모든 이상한 사태의 배후에는 바로 이런 점들이 있다.

여승열_코스모스_캔버스에 유채, 혼합재료_162.2×190.5cm_2011

4. 물론 여승열의 그림이 이러한 것을 직접 언급하고 있거나 지시하는 것은 아니다. 이는 그의 그림들이 불러오는 연상에 가깝다. 패턴화된 싸구려 포장지의 세계와 손으로 그려진 이미지의 세계는 서로 충돌한다. 그리고 인간은 그 충돌 속에서 망연자실하게 서 있다. 그 망연자실함이 그의 그림을 초현실적으로 보이게 만든다. 그러나 여승열은 이를 '초현실적이라고 느껴지는 실재의 현실'이라고 말한다. 다시 말하면 그가 느끼는 우리 사회의 모순, 분열과 그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이는 우리와 자신이 바로 초현실인 것이다. 그 초현실은 우리를 분열적인 상태로 몰아넣고 그렇지 않다고 설득한다. 때문에 우리의 일상적 삶은 모순도 분열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래야만 살아남는다. 이런 종류의 상태를 진단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예술이다. 물론 제정신을 가진 경우에 말이다. 김수영식 표현을 빌면 제정신을 가진 예술은 우리가 분열과 모순 속에 있다는 것을 일러준다. 그리고 그것은 고통스럽다. 요즘 같은 시대에 예술이 가치가 있다면 그러한 경우 뿐이다. 여승열의 그림은 바로 이 지점에 서 있다. 물론 그의 인식 자체가 새로운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것을 느끼고 있다는 것이다.

여승열_공간2011_캔버스에 유채, 혼합재료_53.3×53.3cm_2011

5. 여승열의 그림 속에는 풍경이 있다. 그 풍경은 완결된 풍경이라기보다는 풍경의 파편이고 무대 장치이다. 여승열의 그림은 일종의 액자 소설적 구조를 가지고 있다. 현실과 비현실 사이에 걸쳐 있는 공간 속에 벽지들로 이루어진 유사 원근법적 장소가 있다. 벽지들은 분홍색과 무채색 계열들로 밝지만 별 의미 없는 무늬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 안에 타오르는 불과 떠오르는 풍선, 달리거나 서 있는 사람, 어슬렁거리는 개, 날아가다 벽에 부딪힌 것 같은 닭을 닮은 조류들이 있다. 이것들 간에 특별한 연관 관계는 없다. 그렇다고 그 이미지들이 상징인 것도 아니다. 이것들은 일종의 알레고리일까? 그럴지도 모르지만 작가의 말에 따르자면 특별한 의미를 지닌 상징은 아니고 그림을 보았을 때 느끼는 어떤 분위기와 감정의 환기를 위한 장치라고 말한다. 그가 의도한 분위기란 무엇일까?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그가 의도한 것은 제정신을 가지고 살 수 없게 하는 세계의 폭력이다. 그 폭력은 일상적이고 부드러워 보여서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를 옥죈다. 즉 생활이라는 이름의 폭력이다. 때문에 그것은 폭력으로 보이지 않는다. 일상은 평온하고 대단한 일들이 일어나지 않는다. 벽지 무늬의 벽에 가로수의 그림자가 비치고, 길바닥에 별로 위험하지 않아 보이는 불길이 일고, 하늘은 푸르고 사람들은 저 멀리 걸어가거나 서있다.

여승열_유기견_캔버스에 유채, 혼합재료_53.3×53.3cm_2011

6. 이 범상한 풍경들이 환기하는 감정은 기이한 막막함이다. 뭔가 잘못되었는데 아무것도 이상한 것이 없는 세계. 즉 오래전에 이성복이 쓴 시의 표현을 빌면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의 세계이다. 잠시 그의 시 '어느 날 갑자기'와 '그러나 어느 날 우연히'의 일부를 연결 시켜 읽어 보자. ● 어느날 갑자기 망치는 못을 박지 못하고 어느날 갑자기 벼는 잠들지 못 한다 어느날 갑자기 재벌의 아들과 高官의 딸이 결혼하고 내 아버지는 예고 없이 해고된다 어느날 갑자기... 어느날 갑자기 미루나무는 뿌리째 뽑히고 선생은 생선이 되고 아이들은 발랑까지고 어떤 노래는 금지되고 어떤 사람은 수상해지고 고양이 새끼는 이빨을 드러낸다 어느날 갑자기 꽃잎은 발톱으로 변하고 처녀는 養老院으로 가고 엽기 살인범은 불심 검문에서 체포되고 어느날 갑자기 괘종시계는 멎고 내 아버지는 오른팔을 못 쓰고 수도꼭지는 헛돈다... ● 숟가락은 밥상 위에 잘 놓여 있고 발가락은 발 끝에 얌전히 달려 있고 담뱃재는 재떨이 속에서 미소 짓고 기차는 기차답게 기적을 울리고 개는 이따금 개처럼 짖어 개임을 알리고 나는 요를 깔고 드러 눕는다 완벽한 허위 완전 범죄 축축한 공포,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 두 편을 연결 시켜 읽어봐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이성복이 삼십년 전쯤에 쓴 이 시들의 세계는 여승열의 그림과 묘하게 맞닿아 있다. 그 세계는 얼른 보기에 초현실의 세계로 보이지만 사실은 평범한 현실이다. 그러나 그 현실들을 나열하면 초현실적 이미지들이 된다. 어느 날 갑자기 분홍 벽지는 벽이 되고, 어느 날 갑자기 아들은 불쑥 자라고, 어느 날 갑자기 원근법은 뒤집히고, 어느 날 갑자기 길바닥에 불이 타오르는...이 아이러니. 이성복이 80년대에 쓴 시와 여승열의 그림이 만나는 지점은 우리가 사는 세계이지만 우리 것이 아니었으면 싶은 세계이다. 끔찍하게도 세계가 근본적으로 변하지 않은 것이다. ● 7. 여승열은 최근 자신의 작업이 메시지보다는 회화 자체에 경도 되고 있다고 말한다. 확실히 그의 이전 작업들이 보여주던 다소 직설적이던 언어의 구사는 중화 되었다. 그리고 페인팅 혹은 그리기의 즐거움에 대한 추구는 더 강해졌다. 그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림을 그리거나 그런 일을 경험한 자에게 회화는 기괴할 정도의 마력을 발휘한다. 그 마력은 수렁과도 같아서 한번 빠지면 평생 헤어 나오지 못한다. 실제로 그림을 그리지 않을지라도 마음 속에는 늘 캔버스가 펼쳐져 있는 것이다. 아직 여승열이 추구하는 그림 혹은 회화에 관해 방법적으로 이렇다거나 혹은 지향하는 바에 대해 말하는 것은 아직 이를 수도 있다. 그는 13년 만에 다시 시작하는 중이고 앞으로 어떻게 변모할지 전혀 짐작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상하게도 그림을 그리는 것은 물길과도 같아서 중단 된 곳에서 반드시 다시 시작하게 된다. 물론 그 이후의 물살은 빨라 대개 한꺼번에 그리지 않은 시간들을 보상이라도 하듯이 극복하지만 시작은 같은 지점이다. 어쨌든 누군가 말했듯이'오늘날의 그림은 더 이상 현실을 재현하지 않는다. 오히려 재현이 현실을 구성한다.'더 심하게 말하면 이제 재현을 벗어난 현실은 없다. 여승열이 그림을 그리건, 다른 종류의 이미지를 만들건 아마도 이점은 변화 없을 것이고, 늘 염두에 두어야 할 것도 이 점이 아닐까. 물론 이 글을 쓴 나도 마찬가지이고. ■ 강홍구

Vol.20111104b | 여승열展 / YEOSEUNGYEOUL / 余承烈 / painting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