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낯설은 세상

여승열展 / YEOSEUNGYEOUL / 余承烈 / painting   1997_0903 ▶ 1997_0909

여승열_여관방Ⅱ_캔버스에 유채, 혼합재료_53×45.5cm_1995

초대일시 / 1997_0903_금요일_05:00pm

이십일세기화랑 서울 종로구 관훈동 192-21번지 Tel. +82.(0)2.735.4805

여승열론-욕망의 피해자로서의 남성 ● 욕망과 권력 그리고 억압의 얼굴들 비가 오는 날이었다. 같이 가기로 한 큐레이터가 예비군 훈련을 받는다고 오지 않아 작가와 단촐하게 작업실로 향했다. 초면에 겸연쩍은 침묵을 쾌할한 듯한 수다로 떼우면서 지루한 교통체증을 헤쳐 도착한 곳은 김포 근처의 한적한 교외, 이층 작업실이었다. 작업실이라기에는 좀 썰렁한 곳에는 80년대 학번답게(?) 낯익은 책들이 책장에 꽂혀 있었고 작품들은 갓 이사온듯 포장지에 꼼꼼하게 싸여 있었다. ● 대개 어느 정도 개인전도 하고 경력이 있는 작가들은 참고할만한, 바르뜨식으로 말하면, "쓰여질 수 있는" 텍스트가 많다. 하지만 이번처럼 전혀 작가에 대해 누군가 글을 써놓거나 아니면 평소에 안면이 있는 것도 아닌 경우에는 약간 조심스럽기 마련이다. 작가와 평론가의 불안한 상호 의심의 벽을 사이에 두고 작가의 최근 괌심사에 대해 물어보았다. 작가의 의도가 곧바로 작품을 해석할 수 있는 모든 열쇠는 아니지만, 일종의 화두를 얻기 위함이었다. 그는 "일상생활 속에서 권력이 드러나는 방식 중 욕망, 성에 대한 억압"에 중심을 두고 "이러한 성적 억압과 권력의 다른 억압방식들을 연결" 해보고 싶다는 것이었다.

여승열_공간Ⅴ 캔버스에 유채, 혼합재료_53×59cm_1997

작가와 나눈 서너시간 동안의 이야기들 중에서 나에게는 한 가지 구절이 남아 계속 나를 미소짓게 하였는데, 그것은 "남자들, 특히 화가인 남자들은 여자못지 않게 일상생활 속에서 누구보다 억압을 많이 받는 존재" 라는 것이었다. 작가는 나의 집요한 질문에도 그 억압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시종일관 머뭇거렸다. 지독하게 내성적인 이 작가에게 그 억압이란 외부로부터 가해지는 것이라기 보다는 스스로를 자발적으로 제어하는 기제에 대한 저항감 같았다. 「1994년 12월 24일-자화상」이라는 작품에서 그러한 기제는 초현실적인 섹시한 여체에 손가락 끝만 갖다대고 있는 호기심과 자제, 욕망과 욕망에 대한 통제 사이의 갈등과 긴장감으로 나타난다. 대중매체가 쏟아내는 일상의 공간에서 포화상태로 우리의 욕망을 강요하는 성적 이미지들은 자유롭지도 완벽하게 윤리적이지도 못한 어정쩡한 80년대 학번의 감수성에는 일종의 죽음과도 같은 가해도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 그러한 그에게 신세대는 일종의 애증의 대상이다. 그들의 자유분방함은 그에게 몸과 머리의 분리를 강요한다. 이러한 분리는 그에게 강박관념처럼 화면을 분할하도록 밀어붙이며 욕망의 문제는 쾌락보다는 죽음이나 불안과 쌍을 이루면서 병치된다. (「도시의 죽음-1994.12」, 「도시에서의 죽음-1994.12」) 이러한 병치를 강요하는 것은 다름아닌 80년대 말의 학생운동 경험과 그 경험의 완강한 저항이다. 쾌락을 쾌락만으로 보기에는 그 근저의 불길한 메카니즘에 대한 의심이 더 강하게 그를 옭아매고 있는 것이다.

여승열_공간Ⅶ 캔버스에 유채, 혼합재료_53×62cm_1997

그는 87학번이다. 잠시 기억을 돌이켜보면 87년은 79년'현발'로부터 시작된 민중운동이 87년을 정점으로 치달아 오른 학생운동, 노동운동의 열기 속에서 전성기를 향해, 더 정확하게는 곧 다가올 공황기를 향해 질주하던 시기였다. 하지만 그가 미술운동에 구체적으로 관심을 갖고 활동하기 시작한 것은 군대를 다녀온 후인 1992년도 부터이다. 이 시기의 자화상「화가-죽창붓」은 작가의 사회적 비판의식이 결연함으로 무장되어 있음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그러나 결단의 시간은 그리 길지 못하였다. 작가의 결단보다 그 무거운 절대 권력의 추가 결박당한 수인의 시선을 화면 아래로 끌어 내리고(「수인」) 끝모를 나락으로 곤두박질시킨다.(「추락」) 회전의자로 상징되는 권력 아래에 웅크리고 있는 나신의 처절함(「고문」)은 90년대의 무기력과 좌절을, 황폐함을 나타내고 있다. ● 이 공백에 오기가 뛰쳐나온다. "에잇 쌍"하고 욕을 내뱉듯 똥덩어리가 또아리를 틀고 있는 「변기-1992」하나가 등장하는 것이다. 그것은 우연이지만, 그 우연은 그에게 일종의 계시같은 것이였다. 변비. 막혀서 풀리지 않는 배설에의 욕망을 변기가 대신한다. 배설에의 욕구는 '꽃변기'라는 역설로 기호화되면서 채울 수 없는 성적 욕망의 대명사로 그의 화면 곳곳에 등장하게 된다.(「욕망-1993.6」, 「신보수주의-1994.9」, 「도시에서의 죽음-1994.12」) ● 배설에 대한, 욕구의 충족에 대한 욕망이 커질 수록 사방이 막혀있는 자아의 답답함이 더 극명하게 의식된다. 출구가 없는 곳에서 탈출하고자 하는 절박함은 「공포-1993.3」로 표상되고 끊임없이 벗어나고자 달음박질치는 숨가쁜 질주는 계속 리와인드 된다. (「골목길-1993.11」) 골목길 한켠에는 달음박질치는 자신을 주시하는 또하나의 자신이 있다. 그는 애초부터 이 게임이 절망적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는 듯하다. 「충분히 고무된 욕망-1994.1.1」은 그것이 남성의 것이든 여성의 것이든 충족의 대상이 결여된 광기만을 남긴다. 이러한 충족불능의 광기는 이제 소외된 민족에서 출구 아닌 출구를 찾는다. 「자위-1995.1」를 하거나, 육체없는 빈 껍데기가 닫힌 공간 안에서 더 이상 벗어날 꿈도 상실한 채 맹목적으로 입을 벌린 자신의 욕망을 버거워하며 익명의 육체를 기다리고 있다. (「여관방-1993.8」, 「여관방-1995.1」) 이러한 육체는 돈으로 살 수있다.(「1만원권-1992」) ● 이러한 소외된 욕구충족의 메카니줌, 욕망을 초현실적으로 부풀리는 반면, 그것의 완전한 배설, 완전한 민족의 실현을 애초부터 불구로 만드는 욕망의 통제 메카니즘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억압의 주체는 명백하게 드러나있지 않다. 그가 억압의 주체라기 보다는 억압의 대리자들을 드러내 보인 작품으로 「무제」가 있다. 가장 남근적인 미사일과 완벽하게 섹시한 여체가 대비되어 있는 소재들을 우리의 일상사에서 볼 때는 초현실적인 대상들이다. 하지만 두가지 모두 파괴적인 힘이다. 하나는 물리적인 파괴의 힘이요, 다른 하나는 우리의 욕망을 조직함으로써 우리를 파괴하는 이미지로서의 힘이다. 양자는 현대문명이 낳은 이란성 쌍둥이다. 그러나 아직 미진하다 추상적이고 낱낱의 구체적인 면모가 드러나지 않는다. ● 그러나 작가의 상품미학에 대한 언급들은 그의 유보된 결론을 추정하게 해준다. 성적 이미지들을 채용함으로서 상품의 아우라를 만드는 상품미학적 광고, 시각이미지들은 우리의 욕망을 주체할 수 없을 만큼 증폭시키고 있으며, 다른 한편 관료사회의 꽉짜여진 일상사와 소시민적 생활규범은 우리의 과잉된 욕망을 발산할 틈을 주지 않는다고. 우리는 후자에 대한 시작적 증거를 「신한국인(가족사진)-1997.8」과 특히 「가족-1995.2」에서 찾을 수 있다. 이 행복한 소시민적 가족의 화목한 웃음은 좌우의 성으로 구획되고 있기는 하지만 언제든지 침해당할 수 있는 불안한 웃음이다. 이 불안한 끊임없이 화면을 분할함으로서 양자의 구체적인 고리를 이미지들의 충격으로 대치하고 있는 작가의 불안이기도 하다. 하지만 화면구성에서 그가 추구하는 병치에 의한 대비효과는 어떻게 보면 식상한 것일 수 있다. ● 구체성을 향하여 성적인 억압에 대한 접근방식은 탈구조주의적인 욕망이론에 의해 접근하는 방식과 패미니즘적 시각에서 접근하는 방식이 있다. 작가는 전사의 입장에 서서 상품미학적 분석들을 연걸시키려고 한다. 작가의 주된 주제는 과잉된 욕망을 조장하는 현대문명의 자극들과 그것을 관리할 수 없는 주체의 무능력 또는 사회의 구조적 통제 사이의 억압과 소외문제를 다루고 있다. 그러나 그가 궁극적으로 연걸짓고 싶어하는 성과 권력과 돈의 복잡한 메카니즘을 드러내는 고리들은 잘 드러나지 않고 있다. 이를 연걸하려고 시도한 작품들은 대부분 병치를 벗어나지 못하고 논리의 과정이 생략된 채 추상화되어 버린다. 이것은 이 작가의 딜레마이다. 그것은 80년대식 대안으로 나아갈 수도 없는 상태에서, 탈구조주의적 분석력이 구체적인 현실을 꿰뚫기에는 아직 미약한 상황임을 반증하는 것이라 해석할 수 있다.

여승열_여관방Ⅲ_캔버스에, 혼합재료 유채_53×45.5cm_1995

나는 그의 한계지점이 대조어법이라 여긴다. 그에게서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화면의 분할과 대조적 이미지의 병치는 변증법적이라기 보다는 도식적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화면에 등장하는 주검이나 일하는 자의 이미지와 자극적인 여성 이미지의 충돌 효과는 추상적이고 공허해질 우려가 있다. ● 여승열은 머리가 앞서는 작가다. 그는 몸으로 느낀 문제로부터 그 해결을 위해 올라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머리로 설정한 문제로부터 아래로 내려가고 있는 중이다. 그가 바라보는 여성은 아직 광고이미지에 나타나는 여성이다. 그 여성들은 그와 동시대에서 일상적으로 부딪치는 여성이 아니라 대상화된 여성 이미지다. 나는 그가 욕망과 억압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있어서 이러한 이미지들에만 의존하는 것이 과연 타당한가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그에게 여성 이미지는 타자이자 억압의 매개일 뿐이다. 이러한 여성 이미지가 남성들 또한 피해자로 만들고 있다는 그의 판단은 옳다. 그리고 참신한 문제영역이다. 그러나 이렇게 여성이 상품화될 수 밖에 없고, 그 안에서 여성들의 욕망이 곡해되는 현실의 흐름을 건드리지 않고 남성을 피해자로 표현하는 것은 비록 그 진정성과 솔직함의 의의를 인정하면서도 매우 편향된 결론을 초래할 수 있다는 점을 염려한다. 그가 만약 욕망의 관리체제의 피해자로서의 남성을 구제하기 위해 여성 이미지의 해체를 시도하고자 한다면, 그는 여성의 상품화라는 메카니즘의 해체를 경과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그 속에서 권력과 돈이 여성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구체적인 연관도 얻을 수 있다. 그가 아직 페미니즘에 관심이 없다는 것은 아직 그의 문제의식이 여기까지 도달하지 않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 그에게 필요한 것은 이러한 문제의식의 영역을 포괄하면서 육체의 끈끈한 무정형적 촉수로 땅바닥에 점착하여 일상의 갈피들로부터 즙을 빨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즙을 제공해주는 하나의 촉수가 페미니즘적인 분석일 수 있다. ■ 양현미

여승열_여관방Ⅳ_캔버스에 유채, 혼합재료_61×73cm_1997

아직도 낯설은 세상 ●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살만하다. 괜실이 기운이 빠지고 마른기침이 나온다 하더라도 말이다. 어느 하루라도 휑한 느낌을 지워버리기 힘든 1990년대 남한의 삶은 그래도 살만하다. 더구나 30대 남자로 남한의 수도 서울 한복판에 살고 있다는 것은 어찌 보면 축복이다. 길지 않았던 땀내음 나는 지난날들과 주변을 돌이켜 보건대 분명 지금은 행복하다. ● 힘들지도 않으면서 괜히 힘든 척하며 살던 때가 있었다. 피할 수 없었던 피해의식. 모든 행동을 조심해야 했던 시절. 삶을 사라보니 이제는 왜 그랬어야만 했는지 조금은 알 것도 같다. 물론 아직도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지 모르겠는 것이 더 많다. 그리고 다들 그렇게 산다는 것에 너무나 익숙해져 있다는 것이 무척 놀랍다. 어리지도 늙지도 않은 어정쩡한 나이로 겪고 있는 세상은 때로 화가 나고 슬프다. 하지만 솔직히 지금은 아무 생각이 없다. 그저 살아있음을 느끼고 있을 뿐. ● 도시의 시간 새벽. 검은 하늘이 퍼렇게 바뀌어가고 굉음을 내며 달려온 버스는 정류장에 급정차 했다. 아직 가시지 않은 어둠을 머금은 사람들이 하나 둘씩 차에 오른다. 새벽 4시 30분. 밤새 마신 술기운 때문인지 버스안은 더럽혀진 거리보다 더 초라하고 썰렁하다. 무거워 보이는 가방을 든 학생들 몇몇. 아직 잠이 들깬 것 같은 퉁퉁 부은 어린 얼굴에서는 이제 막 세수를 했는지 비누냄새가 가시지 않았다. 첫 차인데도 빈 좌석이 얼마 없다. 흰머리에 주름이 패인 허름한 복장의 노인들이 좌석을 메우고 있다. 커다란 빌딩의 경비원, 청소부, 가판대 판매원, 배달부, 파출부, 일일잡부 등. 이들이 새보다 먼저 일어나 도시의 꼭두새벽을 달린다. 힘없이 졸고 있거나 창밖을 무심히 바라보는 이들의 뿌우연 눈에는 아쉬움이 가득하다. ● 갑자기 답답함을 느낀다. 쓴 소주. 끝이 보이지 않는 감정 섞인 대화. 초점이 맞지 않는 눈. 따가운 담배연기. 지저분하게 흘린 찌개 국물. 가끔씩 울리는 호출기. 이리저리 모아 놓은 휴지. 으슥한 거리에 오줌을 누려다 몰래한 오바이트. 비틀거리는 방황. 새벽바람에 심호흡을 하고 나니 어느새 버스 정류장 앞에 앉아 있었다. 목에는 가래 섞인 신물이 가득하고 눈물과 땀으로 뒤범벅된 시컴헌 얼굴은 끕끕하기 그지없다. 굳어지는 몸을 이겨내며 겨우 올라탄 버스 안. 그 곳에는 얼마 되지 않는 것 같은 과거와 그리 멀다고 할 수 없는 미래가 함께 타고 있었다. 싫다. 창문을 열고 어두운 바람을 맞는다. 점점 커져만 가는 시커먼 빌딩들과 아직 빛을 잃지 않은 가로등 사이로 빠르게 도시의 청춘이 지나간다.

여승열_모래시계_캔버스에 유채, 혼합재료_116.8×91cm×2_1995

아무들의 죽음 아무들의 무덤 앞에서 눈물 흘리며 깡소주를 마신다. 단순히 죽었다는 것 때문에 눈물 흘리는 것은 아니다. 죽음. 누구나 죽는다. 그리고 그때는 아무나 죽을 수 있었다. 아무일 수 있었기에 아무도 냉대하지 않았다. 눈물이 흐르는 것은 혹시 그나마 살아있는 아무의 꿈마저 함께 앗아가 버린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 때문이다. 시대의 권력과 젊은 야망은 그렇게 서로 엃히며 지나갔다. ● 시끄러운 호프집 테이블에 앉아 죽음을 이야기한다. 이제는 아무도 예전처럼 거친 야망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저 사람이 죽었다는 정보가 전해지고 살아있음을 즐기려 한다. 아픔도 슬픔도 이제는 귀찮다. 더 이상 누군가에게 기대를 건다던가 받을 이유도 여유도 없다. 옳다 그르다를 따질 필요는 더구나 없다. 이미 사람들은 너무 약삭빠르고 영리한 세상을 살고 있다. 야망과 권력의 죽음은 화려한 브라운관을 알록달록하게 밝히며 시청률을 올리고 있을 뿐이다. 이제 텔레비전 밖에 있는 세상은 진짜 세상이 아니다. ● 작은 방에서 과연 남자일까. 항상 의심이 간다. 사랑하는 소녀 앞에서 그냥 외면해 버렸던 날들. 그리고 세상은 생각처럼 아름답지 못했다. 결국 예기치 못한 일들은 연달아 일어나고 점점 의연해지는 감성은 오히려 나약한 몸을 더 고단하게 만든다. 아름답게 살겠다던 순진한 생각은 솔직하지 못한 세상에서 아픔만을 만들어낼 뿐. 커져야 될 것은 반대로 자꾸만 작아지고 있다. 그리고 말해지는 것과 겪는 것은 커다란 차이를 결과했다. 너무나 흔한 일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가고 있다. ● 낯설은 공간. 낡은 가구와 빛바랜 텔레비전. 가지런히 놓여진 세면도구. 커다란 거울과 좁은 창. 두 개의 컵. 침묵이 흐르고 불이 꺼진다. 부딪힘을 느낀다. 그나마 느낄 수 있다는 것은 나쁘지 않다. 가픈 숨을 지나 긴 한숨을 몰아 쉰다. 결국 다시 씁쓸하게 혼자 버려졌다. 어지럽다. 갑자기 초라한 작은 방이 커다랗게 다가온다. 공허함을 지울 수 없는 커다란 작은 방에서는 아직 죽지 않은 난폭한 야망과 역겨운 권력의 냄새가 난다. 따스한 체취가 느껴지지 않는 메마른 정사의 공간. 텔레비전을 켠다. 어쩌면 우리가 기계일지 몰라. 아직도 낯설은 그들의 세상에서. ■ 최금수

Vol.19970903a | 여승열展 / YEOSEUNGYEOUL / 余承烈 / painting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