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071117f | 한수정展으로 갑니다.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월~수요일_10:00am~07:00pm / 화요일_01:00pm~09:00pm 목요일_10:00am~09:00pm / 금~토요일_10:00am~06:00pm / 일요일, 공휴일 휴관
비앤빛 갤러리 B&VIIT GALLERY 서울 서초구 서초 4동 1317-23번지 GT 타워 B2 Tel. +82.2.590.2353 www.bnviitgallery.com
꽃, 그림들 ● 숲에 올라갈 때의 기분은 날마다 다르다. 가까이서 보이는 산과 저만치 멀리 물러서서 보는 산은 '이게 정말 하나의 산일까' 싶을 정도로 다면체의 모습이다. 아무도 잡아낼 수 없는 삐죽삐죽한 얼굴의 숲 안에는 거대한 바위가 있고 그보다 큰 나무도 있고 도토리를 키우는 떡갈나무, 상수리나무, 갈참나무 등이 있다. 고개를 숙여 바라볼 때 그제야 눈에 들어오는 꽃들은 이 풍광 안에서는 너무도 작디작은 존재들이다. 발에 치이고 돌멩이에 잎이 흐드러지면서도 가장 강렬하게 계절과 기후에 반응하는 것. 그래서 날마다 자기의 기분을 오묘하게 바꿔내는 꽃들은 채 이름을 다 적어내지 못 할 만큼 숲 안에 가득하다. ● 꽃을 그리고 있는 작가 한수정은 꽃의 얼굴에서 '그림'의 얼굴을 본다. 꽃이 얼굴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아마 영화에 등장하기 전에는 자세히 들여다본 적 없는 어떤 여배우의 얼굴과 닮아있을 것이다. 감독 없이도 나름의 표정을 갖고 있지만 여배우는 감독과 카메라에 반응하며 표정을 키워간다. 각도에 따라 조금씩 빛과 색을 바꿔내는 꽃의 얼굴 또한 늘 변화무쌍한 카멜레온이라기보다 수줍음과 독재자 같은 마음을 동시에 가진 알 수 없는 내면의 보고(寶庫)다. 꽃들이 얼굴을 가진 것이 아니라 얼굴 그 자체로 우리에게 인식되는 것이라면, 꽃은 제 얼굴을 가렸다 드러냈다 공기의 상태에 따라 다른 호흡을 갖는 최고로 까다로운 존재일 테다. ● 한수정의 그림에서 꽃의 동태를 파악하고 꽃의 차이들을 견주어보는 과정은 그림 뒤로 숨는 듯 보인다. 화면에는 한가득 꽃이 '있다'. 들이민 것인지 어떤 홀(hole)에서 빠져나온 것인지는 중요하지 않아 보이는, 또 알 수도 없을 것 같은 이미 거기 있는 꽃들을 그의 그림에서 본다. 꽃은 매우 크고 또 중심을 차지한다. 이 순간에는 1인칭으로서의 꽃이 그리기의 행위를 대변하는 것처럼 보인다. 다른 대상에는 관심을 가질 여타의 필요성을 제쳐버린 그림 속 꽃들은 자신에게 가장 집중한 그래서 세상의 가치 판단을 결정하는 모든 질서와 반박의 기제들을 잊어버리게 만든다. 그만큼 꽃이 유별나게 중요한 것일까. 왜 하필 꽃이어야만 할까. 이유를 묻는 질문은 꽃이라는 구체적인 모티브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상태에서 답을 찾을 기미를 보인다. 단서가 아닌 여지를 남기는 그림들. 꽃 그림은 계속 지속되면서, 제 얼굴 위로 세밀한 표정과 차이들을 다른 방식으로 만들어낸다.
작가가 다루는 꽃은 다양하지 않다. 대신 작가는 꽃이라는 세계를 미분한다. 같은 종의 다른 색, 같은 색 꽃의 다른 부분, 같은 부분의 다른 빛 구도를 계속 구분해내면서 거대한 꽃을 세밀하고도 잘게 나눠버린다. 작가가 보는 모란(peony)은 짙은 자주 빛이기도 하고 옅은 보랏빛이기도 하며 다채로운 주홍빛으로 각기 다른 그림 속 화면에 거주한다. 그림을 직접 눈으로 봐야지만 체감할 수 있는 이 각각의 모란 그림들에 붙은 제목은 모두 같은 'peony'다. 차이는 그림 밖의 조건들이 아니라 그림 안에 있다. 거인의 왕국에 존재하는 꽃처럼 크게 확대되어 나타난 꽃들은 사실 꽃의 너무도 작은 일부분이다. 이 상태는 결국 꽃에게 있어 그림 안에서만 존재할 수 있는 가장 풍성하고 자기 완결적인 환영의 순간이다. 확대된 것은 꽃의 중심이 아니라 구석구석의 부분들이며 구석을 중심으로 배치하는 것은 오직 '그리기'를 통해서 가능하다. ● 꽃의 전면적인 등장은 자기중심적인 초상(肖像)의 상태를 보여준다. 그렇다고 꽃이 세계의 전부인 것은 아니다. 울퉁불퉁한 바위 사이사이에 비치는 배경처럼 얇은 꽃잎의 틈새와 겹침 사이로 비치는 배경을 작가는 화면 안에서 오려낸다. 작가는 이 배경을 극단적인 하얀 여백으로 남겨둠으로써 그림에, 그리고 꽃에 배경이 존재하게끔 만든다. 2005년 이후 본격적으로 꽃을 그리는 데 집중해온 작가 한수정은 2010년 이후 최근 작업에서 자신이 그린 일련의 꽃 그림들을 제 질문의 대상으로 삼아 그리기의 태도 자체를 다시 그린다. ● 2006년에 그린 붉은 색의 'peony'가 한 줌의 여백도 없이 꿈틀거리는 내장처럼 움직이는 운동성을 보였고, 또 다른 'peony'와 'iris'가 꽃잎 일부가 살짝 뒤집혀진 꽃의 '정면'을 그렸다면 최근의 꽃들은 살짝 옆으로 곁으로 흩어지면서 어딘가 견고해진 꽃의 구도와 꽃끼리의 관계망을 보여준다. 꽃의 배경 막으로서 화면에 등장한 잎들은 꽃 뒤로, 또는 앞으로 서서 때론 오히려 화면 중심 자리를 차지하기도 한다. '왜 꽃을 그리는가' 스스로 질문하고 답하듯이 아니 그 질문 자체를 지우고 다시 써내듯이, 그림 안에서 잎은 꽃의 자리로 왔다가 물러나기도 하며 화면에 움직임을 더한다. 꽃잎을 변주하고 쌓고 흐트러지게 하면서 꽃 그리기는 지속된다. 회화사의 오랜 주제이자 소재였던 '꽃' 그림. 그림의 외부가 어쩌면 이미 충분히 만들어냈고 또 반박해낸 꽃그림에 관한 질문-답의 형태를, 한수정은 그림 '안에서' 새롭고 낯설게 만들어간다.
"꽃과 꽃이 아닌 것 사이"라는 표현이나 "꽃을 볼 때마다 태도가 달라지는 걸 보며 스스로의 눈이 조금씩 더 예민해지는 걸 느낀다"는 작가의 말은 꽃을 그리는 일련의 시간적 행위들이 '발견'과 맞닿아 있음을 예견케 한다. 꽃을 통해 물감의 변화와 농담, 색과 빛의 통제를 한 화면 안에서 실행하는 것은 그림을 통해 대상이 갖고 있는 다양한 '차이'를 더욱 더 몸소 체감하는 행위일 것이다. 화면에서 꽃은 꽃이 아닌 이상한 질감의 천처럼 다가왔다가 구겨진 종이처럼 팔락거리기도 한다. 빛을 받은 자줏빛 꽃잎과 빛에 가려진 검보라 빛 잎이 존재하는 양상을 작가는 화면에 각각 다른 얼굴로 배치시킨다. ● 이 배치가 가장 적극적으로 흥미롭게 펼쳐진 그림은 녹색 잎과 줄기가 화면을 차지하는 세 개의 그림들이다.('peony') 꽃이 갖고 있는 선홍빛 계열과는 거리가 먼 이 녹색은 잠잠하면서도 깊이감이 있다. 녹색 잎은 시간의 때가 묵직하게 쌓인 정적인 이미지인 동시에 벌레들이 꿈틀거리는 듯 한 동적인 이미지를 동시에 보여준다. 세 그림은 동일한 녹색 톤을 유지하면서도 각자의 화면 위로 텅 빈 흰 여백을 가차 없이 드러낸다. 그 안에서 벌레가 파먹은 듯 한 잎의 구멍과 꼿꼿하게 위로 솟은 잎의 물결들이 함께 거리를 두고 한 공간에 존재한다. 다른 기분으로 같은 꽃을 구성해내는 작은 존재들이 싸움을 나갈 전사들처럼 뻣뻣하게 긴장한 상태는 그 어느 때보다 리얼리티가 살아있는 사실적인 꽃의 상태를 느끼게 한다.
작가 한수정은 2006년도 '갤러리 스케이프'에서 꽃 페인팅을 보인 후 줄곧 『Flower』라는 전시 제목을 지속해왔다. 작가는 꽃을 통해 무엇을 알리거나 새로운 장을 열어젖히기 위해 꽃을 그리기의 대상으로 삼은 것은 아닐 것이다. 매순간 다른 얼굴을 하고 있는 꽃의 예민한 감각들, 아마도 똑같은 기분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 같은 꽃의 상태는 붓을 화면에 닿게 하는 그 순간들만큼 변화무쌍하고 예민할 것이다. 절정에 있다가도 파괴의 순간이 가장 빨리 찾아오는 꽃의 순간을 한수정의 그림으로 마주하고 있는 순간은 '숨 막힐 듯 아름다운'이라는 표현처럼, 아이러니하게 살아있다. 그리기를 통해 되살아난 꽃들은 살아있는 상태의 다른 색, 다른 빛, 다른 감각을 온몸으로 보여준다. ■ 현시원
Vol.20111102j | 한수정展 / HANSOOJUNG / 韓洙晶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