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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1_1007_금요일_06:00pm
관람시간 / 10:00am~07:00pm / 토~일_10:00am~06:00pm / 월요일 휴관
갤러리 스케이프 GALLERY skape 서울 용산구 한남동 32-23번지 Tel. +82.2.747.4675 www.skape.co.kr
콩이 가득한 자루 속에 손을 넣는다. 손가락 사이로 콩들이 부드러운 여운을 남기고 빠져 나간다. 이내 다시 콩들이 손바닥을 가득 채운다. 정정엽의 작품은 이 느낌과 흡사하다. 날 것과도 같은 색채와 그 어떠한 꾸밈도 없는 작가의 그림은 '아무 느낌 없이' 눈에 그저 들어오는 듯 하지만 이내 머리 속을 꽉 채운다. 명확하고 일관된 태도로 작품에 임하는 작가는 여성 작가로서의 정체성이라는 크지만 또한 작은 고민에 자박(自縛) 하기를 뛰어 넘어 세상 만물에 더듬이를 기울인다. ● 우리는 포장된 이미지가 익숙한 세상에 살고 있다. 디지털 테크닉의 무한증식으로 인하여 모든 이미지를 자의적으로 다루어 '꾸밀 수' 있게 되었고, 끝없는 이미지의 자유를 누릴 수 있는 듯 느끼게 되었지만 애초에는 신선하게도 다가왔던 무작위로 교배된 이들 이미지로 인하여 우리의 눈과 뇌는 지쳐있다. 이러한 이미지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정정엽의 그림이 뿜어내는 이미지들은 우리에게 날것의 아름다움을 새삼 상기시킨다.
날것이라 함은 일차원적으로는 '말리거나 익히거나 가공하지 아니한 먹거리'를 의미하고 비유적으로는 그 어떤 변형도 가하지 않은 순수 그 자체의 원시성을 간직한 것 혹은 그 형태가 너무나 사실적이어서 보기에 부담스러울 정도의 형태적 '잔인성'을 내포한 것을 의미 한다. 정정엽은 그 어떤 공정도 거치지 않은 날 것을 표현한다. 초기 곡식 작업에서는 되에 담긴 곡식을 사실적으로 그리기도 하였고, 이후 발표한 곡식 작업과 팥 작업에서는 캔버스 밖으로 흘러나올 듯이 쏟아져 내리고 흩어지는 콩알들을 비유적 형태로 표현했지만 그들의 모양새는 여전히 날 것이었다. 작가는 콩은 콩처럼, 팥은 팥처럼, 나물은 나물처럼, 그리고 콩은 콩 색으로, 팥은 팥 색으로, 나물은 나물 색으로 그린다. 솔직한 형태가 사물의 본성과 그 상징마저도 가장 효과적으로 강렬하게 표현할 수 있지 않은가?
모든 곡식은 날것이며 스스로가 씨앗이자 열매이다. 이것은 '회귀'하고 스스로 다시 '회춘'하는 자연의 섭리이다. 작가는 이 날것을 통하여, 그것을 마주하는 정중한 자세를 통하여 모든 살아있는 것에 경의를 표한다. ● 예전의 곡식을 다룬 작품에서 곡식에 생명의 근원을 두고 그 활력을 강조하여 움직임이나 얼굴 형상 등을 통해 존재의 본질에 대한 생각을 풀어내었다면 아홉 번째 개인전 'Off bean'에 선보이는 곡식 작업은 여전히 끓어오르는 생명의 은근함을 기저에 두었지만, 한결 여유 있으며 보다 너그러운 감성을 품은 듯 보인다. ● 정정엽은 곡식의 범람하는 춤사위를 통해 혈관에 톡톡 튀는 '욕망'을 표현하고, 나물의 귀환을 통해서는 솟아나는 생명의 싱그러움과 너그러움을 노래한다. 한데 어우러진 서로 다른 콩의 무리를 통해서는 이타적 사랑을, 낱말 놀이를 통해서는 머리 속을 넘나드는 주변 모든 것에 대한 짧지만 깊은 일기를 고백한다. 작가는 산과 들을 노래한다. 놀이를 즐기는 음유시인을 자처하는 듯, 오방색의 곡물이 한데 어우러진 '만찬'이라 명해진 작품에서는 다르지만 섞여 어우러진 곡물들이 빛에 반사된 유리알들처럼 반짝인다. 우주에서 만난 별들처럼 저마다 빛을 발하게 했다. 다소곳이 정갈하게 포개져 있는 초록의 나물들은 신부의 부케인 듯 작가가 사랑하는 봄을 품었다. '창'은 태양이 조용히 끓어오르며 스스로의 열정을 못 이겨 그 가장자리로부터 우주를 향해 해 가루를 튕겨 내는 듯 느껴진다.
먹는 것을 소재로 한 정정엽의 작품은 가장 순수한 상태로 가장 본질적인 것을 마주하는 작가의 깊은 사색을 보여준다. 정정엽의 그림을 보고 혹자는 그 재료가 상징하는 여성성과 여과되지 않은 색상, 형태로 인하여 '고루함'을 느낄 지도 모른다. 날것을 수식 없이 그려내면서 약간의 '불편함'을 느낄 수 있을지언정 우리는 이내 작가가 들려주고자 하는 이 배반 없는 진리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작가는 마치 바람에 맨 몸을 내 맡기듯 할 수 있는 한 가장 솔직한 자세로 화폭을 마주하고 이 솔직함은 곧 너그러움으로 통한다. 이 진솔 된 너그러움은 여성이기에 가질 수 있는, 큰 배포로 상징되는 남성적 너그러움과는 대조된다. 이것은 세심하게 주변의 모든 것에 진심으로 관심을 가지는 것으로써 매서운 부엉이의 눈이 아닌 속 깊은 고래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것이다. ● 정정엽에게 작품 활동은 곧 숨을 쉰다는 것, 세상이 돌아간다는 것, 이 땅에 여자가 산다는 것, 타인이 산다는 것, 자연이 변하고 또 곁으로 되돌아온다는 것에 관한 것이다. 이 땅에서 호흡하는 한 자신과 조금이라도 관계 있는 모든 것에 대한 관심의 표출이자 사랑의 표현 방식이다. ■ 김윤경
Vol.20110927j | 정정엽展 / JUNGJUNGYEOB / 鄭貞葉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