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110510e | 김대관展으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11_0902_수요일_06:00pm
관람시간 / 11:00am~07:00pm / 월요일 휴관
아트갤러리 청담 Art Gallery CHUNGDAM 경북 청도군 화양읍 토평리 31번지(유등연지 내) Tel. +82.54.371.2111
김대관의 회화-막막한, 가없는, 아득한, 그리운 강물 ● 강물이 의식 쪽으로 범람할 수는 있어도 의식이 강물을 범람시키지는 못한다. 의식이 할 수 있는 일이란 기껏해야 강물을 무미건조한 개념으로나 환원할 수 있을 뿐. 여하튼 이렇듯 의식이 강물로 범람할 때 강물은 흐르는 것도 같고 흐르지 않는 것도 같다. 그러나 분명 강물은 흐른다. 마찬가지로 시간이 멈춰선 것도 같고 흐르는 것도 같다. 그러나 의식이 감지할 수 없을 만큼 느리기는 하지만 분명 시간은 흘러가고 있다. 강물도 흐르고 시간도 흐른다. 헤라클레이토스는 똑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는 없다고 했다. 만물유전이다. 모든 존재는 항상적으로 변화한다. 변화한다는 것은 흐른다는 것. 이렇게 강물도 흐르고 시간도 흐르고 존재도 흐른다. 흐르는 존재를 붙잡을 수는 없는 일. 그래서 흘러가는 강물을 보고 있으면 가없고 덧없고 막막해진다.
김대관은 독일 할레에서 유학할 때 곧잘 인근에 있는 강을 따라 산책하곤 했다. 그러면서 고향에 대한 그리운 마음을 삭이고 키웠다. 고향에도 강이 흐르고 있었다. 이렇게 고향의 강이 범람하고, 이국의 강이 범람해 그의 마음속에 또 다른 강이 흐르게 했다. 그러므로 작가에게 강은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 곧 향수를 의미했고, 그 시절로 회귀하는 시간(시간여행)을 의미했다. 강을 소재로 한 작가의 주제와 작업은 작가의 경계를 넘어 우리의 마음속에 범람하면서 공감을 얻고 보편성을 얻는다.
여기서 작가는 유리회화를 생각해낸다. 물이 그렇듯, 빛을 투과하는, 그래서 투명한 성질을 갖는 유리판 위에 채색이 얹힌다면 마음속에 흐르는 강물을 표현할 수가 있을 것이다. 물을 투명하게 하는 것도 물의 질료 속으로 투과하게 하는 것도 빛이다. 비록 질료는 다르지만 유리 역시 마찬가지다. 빛이 매개가 되어져서 물과 유리를 상동하게 한다. 빛이 없으면 그 상동한 성질은 불가능해진다. 결국 물을 암시하기 위해서 빛도 같이 암시되어져야 한다. 유리회화를 통해서 물(물의 질료)을 감각하게 하고, 동시에 빛(빛의 질감)을 암시하는 것. ● 이를 이해하기 위해선 작업이 제작되는 과정을 좀 더 면밀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그 대략적인 과정을 보면, 우선 유리판에다가 유리착색안료를 칠한다. 이때 가녀린 라인 테이프로 화면의 일정부분을 가려 안료가 묻지 않게 한다(테이프는 이후 떼 내거나, 아마도 소성과정에서 불에 타 없어지는 특수 테이프를 사용할 듯). 이 상태로 620도까지 서서히 온도를 높여가며 가마에 구워낸다. 그리고 재차 색을 덧칠하고 구워내기를 수차례(대개는 여섯 차례 이상) 반복하는 과정을 통해서 그 표면에 은근하면서도 투명한 질감의 색채가 착색된 유리판이 만들어진다. 그리고 이렇게 착색된 두 장의 유리판을 일정한 간격을 두고 하나의 화면으로 중첩시키는데, 같은 계열의 색채가 착색된 유리판을 중첩시킨다. 이를테면 좀 더 짙은 청색과 좀 더 엷은 청색이 착색된 유리판을 중첩시켜 같은 색조를 유지하면서도 라인 테이프로 처리한 빈 부분이 두드러져 보이게 한다. 그리고 그 빈 라인 위에 대개는 대비되는 보색의 점들을 찍는 것으로 마무리한다.
여기서 안료가 착색된 유리판은 수면을 암시하며, 라인으로 처리된 부분은 화면을 가로지르는 시각적 현상으로 인해 수면의 방향(혹은 평형)과 유속(물이 흐르는 느낌)을 암시한다. 더불어 수면에 던져진 빛의 편린들을 암시하며, 이는 점점이 찍힌 점(광점)들에 의해 강조된다. 이렇게 해서 물이 흐르는 느낌과 함께 수면에서 난반사되는 빛의 산란효과를 강조한 것이다. ● 이런 일련의 현상들이 유기적으로 어우러져서 투명하면서도 깊은 물의 질감을 만들어내고, 물의 표면에서 물과 희롱하는 빛의 기미를 자아낸다. 그 질감과 기미에 힘입어 정적이고 서정적인 느낌과 함께 관조적이고 명상적인 계기에로 이끈다.
그리고 작가는 이 일련의 유리회화와 함께 캔버스 그림을 시도한다. 다만 매체가 달라졌을 뿐, 이를 통해 표현하고자 하는 주제는 마찬가지로 자연 속에 흐르는 강물이며, 내 마음 속에 흐르는 강물이다. ● 수십 차례에 걸쳐 엷은 안료를 덧바른 화면에서 이면의 색채와 표면의 색채가 하나의 결(혹은 층위)로 중첩되고, 특정의 색채로 한정되지가 않는 풍부한 색채의 스펙트럼을 아우르게 되고, 이로써 마치 색채가 화면의 이면으로부터 배어나온 듯 은근한 느낌과 함께 어떤 내적 울림을 자아낸다. 내적 울림? 그것은 자연 속에 흐르는 강물보다는 마음속에 흐르는 강물, 가시적인 강물보다는 비가시적인 강물, 질료적인 강물보다는 관념적인 강물의 생리를 더 닮았다. 그래서 캔버스 그림은 유리회화에 비해 더 관념적이고 더 추상적으로 보인다. 사실상 모노톤의 화면이 미니멀리즘의 한 변주처럼 보이고, 그러면서도 그 이면에 내적 울림을 자아내는 서정적인 느낌이 후기미니멀리즘의 가능성을 예시하고 있다.
김대관의 작업은 흐르는 강물에 착상된 것이다. 강물은 우선 작가의 고향에 흘렀었다. 실제와는 상관없이 모든 고향에는 왠지 강이 흘렀던 것 같고, 강이 흐를 때 고향은 더 고향다운 것 같고, 고향에 흐르는 강은 왠지 과거형으로 기술될 때에 더 적격인 것 같다. 그리고 강물은 작가가 서있는 지금여기에도 흐르고, 작가의 마음속에도 흐른다. 모든 강물은 한줄기로 연결돼 있다. 원래 고향에 흐르던 강이 지금여기 위로 차고 넘치고, 마침내 내 마음속에마저 범람한 것. 이렇게 범람된 강물은 그 원천이 고향이란 점에서 모든 강물은 결국 그리움인 것. 그래서 강물을 그린다는 것은 곧 그리움을 그린다는 것. 작가의 그림은 그 그리운 강물 앞에 서게 만든다. ■ 고충환
Vol.20110904g | 김대관展 / KIMDAEKWAN / 金大官 / glass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