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후원/협찬/주최/기획 / 갤러리 소
관람시간 / 11:00am~06:30pm / 월요일 휴관
갤러리 소_Gallery SO 서울 강남구 청담동 118-17번지 네이처포엠빌딩 201호 Tel. +82.2.548.9648
막막한, 가없는, 아득한, 그리운 강물 ● 김대관은 독일 할레에서 유학할 때 곧잘 인근에 있는 강을 따라 산책하곤 했다. 그러면서 고향에 대한 그리운 마음을 삭이고 키웠다. 고향에도 강이 흐르고 있었다. 이렇게 고향의 강이 범람하고, 이국의 강이 범람해 그의 마음속에 또 다른 강이 흐르게 했다. 그러므로 작가에게 강은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 곧 향수를 의미했고, 그 시절로 회귀하는 시간(시간여행)을 의미했다. 그리고 작가는 흐르는 강물에 착안해 그 향수며 시간을 조형하고 싶다는 욕망을 품기에 이르고 그 욕망을 작업으로 풀어낸다. 여기서 작가의 마음속에 흐르는 강은 다만 그 종류와 성분, 깊이와 폭이 다를 뿐 우리의 마음속에도 흐른다. 사람들은 저마다 마음속에 흐르는 강물 한 줄기 쯤은 간직하고 있는 법이다. 향수의 강, 시간의 강, 회한의 강, 그리고 망각의 강 등등. 그러므로 강을 소재로 한 작가의 주제와 작업은 작가의 경계를 넘어 우리의 마음속에 범람하면서 공감을 얻고 보편성을 얻는다. (중략)
그의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선 작업이 제작되는 과정을 좀 더 면밀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그 대략적인 과정을 보면, 우선 유리판에다가 유리착색안료를 칠한다. 이때 가녀린 라인 테이프로 화면의 일정부분을 가려 안료가 묻지 않게 한다(테이프는 이후 떼 내거나, 아마도 소성과정에서 불에 타 없어지는 특수 테이프를 사용할 듯). 이 상태로 620도까지 서서히 온도를 높여가며 가마에 구워낸다. 그리고 재차 색을 덧칠하고 구워내기를 수차례(대개는 여섯 차례 이상) 반복하는 과정을 통해서 그 표면에 은근하면서도 투명한 질감의 색채가 착색된 유리판이 만들어진다. 그리고 이렇게 착색된 두 장의 유리판을 일정한 간격을 두고 하나의 화면으로 중첩시키는데, 같은 계열의 색채가 착색된 유리판을 중첩시킨다. 이를테면 좀 더 짙은 청색과 좀 더 엷은 청색이 착색된 유리판을 중첩시켜 같은 색조를 유지하면서도 라인 테이프로 처리한 빈 부분이 두드러져 보이게 한다. 그리고 그 빈 라인 위에 대개는 대비되는 보색의 점들을 찍는 것으로 마무리한다. 여기서 안료가 착색된 유리판은 수면을 암시하며, 라인으로 처리된 부분은 화면을 가로지르는 시각적 현상으로 인해 수면의 방향(혹은 평형)과 유속(물이 흐르는 느낌)을 암시한다. 더불어 수면에 던져진 빛의 편린들을 암시하며, 이는 점점이 찍힌 점(광점)들에 의해 강조된다. 이렇게 해서 물이 흐르는 느낌과 함께 수면에서 난반사되는 빛의 산란효과를 강조한 것이다. 이처럼 작업이 제작되는 과정을 무슨 도해라도 하듯 역추적하고 재구성해봤지만, 작가의 작업은 기계적인 과정이나 느낌과는 분명 거리가 멀다. 이를테면 같은 계열의 색조가 중첩된 화면이 특정의 색채로 환원할 수는 없는, 상대적으로 투명하고 깊이감이 느껴지는 색감을 가능하게 한다. 그리고 역시 중첩된 화면으로 인해 라인으로 처리된 부분이 서로 겹치기도 하고 어긋나기도 하면서 다양한 선의 변주를 만들어낸다. 이런 일련의 현상들이 유기적으로 어우러져서 투명하면서도 깊은 물의 질감을 만들어내고, 물의 표면에서 물과 희롱하는 빛의 기미를 자아낸다. 그 질감과 기미에 힘입어 정적이고 서정적인 느낌과 함께 관조적이고 명상적인 계기에로 이끈다. (중략)
그리고 작가는 이 일련의 유리회화와 함께 캔버스 그림을 시도한다. 다만 매체가 달라졌을 뿐, 이를 통해 표현하고자 하는 주제는 마찬가지로 자연 속에 흐르는 강물이며, 내 마음 속에 흐르는 강물이다. 그 제작과정을 보면, 짙은 색을 먼저 칠하고 점차 밝은 색을 덧칠하는 수순을 밟는데, 안료를 덧칠할 때는 지극히 묽은 안료를 수십 차례 중첩시켜 그 이면의 짙은 색이 은근히 배어나오도록 조절한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렇게 묽은 안료를 덧칠할 때 일부 안료의 알갱이가 화면에 남겨진 채 굳어지면서 그 위로 붓질이 지나갈 때 생긴 자국이 여실해진다는 점이다. 화면을 가로지르며 옆으로 연장된 이 자국은 유리회화에서 라인테이프로 처리한 선에 해당하며, 그 선의 느낌(곧 빛 혹은 빛줄기의 느낌)을 캔버스 그림의 생리에 맞게 구현한 경우로 볼 수 있겠다. 수십 차례에 걸쳐 엷은 안료를 덧바른 화면에서 이면의 색채와 표면의 색채가 하나의 결(혹은 층위)로 중첩되고, 특정의 색채로 한정되지가 않는 풍부한 색채의 스펙트럼을 아우르게 되고, 이로써 마치 색채가 화면의 이면으로부터 배어나온 듯 은근한 느낌과 함께 어떤 내적 울림을 자아낸다. 내적 울림? 그것은 자연 속에 흐르는 강물보다는 마음속에 흐르는 강물, 가시적인 강물보다는 비가시적인 강물, 질료적인 강물보다는 관념적인 강물의 생리를 더 닮았다. 그래서 캔버스 그림은 유리회화에 비해 더 관념적이고 더 추상적으로 보인다. 사실상 모노톤의 화면이 미니멀리즘의 한 변주처럼 보이고, 그러면서도 그 이면에 내적 울림을 자아내는 서정적인 느낌이 후기미니멀리즘의 가능성을 예시하고 있다. (전시평론에서 발췌) ■ 고충환
Vol.20110510e | 김대관展 / KIMDAEKWAN / 金大官 / craf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