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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0:00am~07:00pm
모리스 갤러리 MORRIS GALLERY 대전시 유성구 도룡동 397-1번지 Tel. +82.42.867.7009 www.morrisgallery.co.kr
이만우의 농지화(農地畵) : 그리는(painting) 즐거움과 관조의 유희(Spiel) ● 이만우는 논바닥을 그리는 작가다. 작가는 대지의 진리를 회화로 풀어내면서 한국 현대미술의 역사에서 농지화의 가치를 되묻는다. 미술의 역사에 자리한 풍경화를 관통하는 이만우의 작품은 논바닥을 사실적으로 연출한 농지화이다. 2008년 본격적으로 시작된 농지화(農地畵)는 회화의 본질인 색과 붓으로 연출됐다. 생명의 근원이자 자연의 진리인 농지의 논바닥은 농사철을 알리는 녹색의 봄으로, 벼들이 자라는 푸르른 여름철 논농사로 변신한다. 수확의 계절인 황금물결의 벼농사, 논바닥에 흩어져 있는 볏짚들 혹은 앙상하게 뿌리만 남아있는 벼, 논바닥을 휘저으며 지나간 트랙터 바퀴의 흔적들이 사실적으로 재현됐다. 이렇듯 이만우의 작품은 거대한 자연도 아니고 신비스러운 자연의 현상도 아니고 더더욱 문명화된 자연에서 떠났다. 일반적이자 보편적인 한국의 전형적인 논바닥으로 관객과 조우하기를 시도하는 농지화이다.
이만우의 풍경은 농촌의 농지에서 출발했고 논바닥으로 귀결된다. 보편적이자 일반적인 농지가 회화의 소재가 된다는 것은 그다지 생경하진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농촌의 풍경이 미술의 역사에 자리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동시대미술은 자아의식을 요구하여 모든 것이 작품이 된다는 미학적 논리가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두툼한 작가의 손과 믿음직한 이만우의 진정성으로 채워진 동시대 작품이다. 진솔한 농부의 땀이 사계절의 향기를 불러오듯이 그리고 농부의 흔적이 논바닥에서 읽혀지듯이, 이만우의 작품은 그가 자라온 환경과 붓질의 진솔한 시각적 논리에서 출발한다. 그는 농부를 대변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해서 우리에게 봄여름가을겨울로 이어달리는 자연의 진리를 인식하거나 더욱이 도시화로 치닫는 한국사회를 직시하라고 요구하지는 않는다. 그렇기 위해선 사회학적 논쟁이 화면에서 가시화 되어야 하고 이데올로기적 비판의식이 조형적으로 구성되어야 한다. 현대미술이 회화매체(캔버스, 붓, 물감)에 초점을 맞추어 사회비판과 이데올로기와 거리를 두었듯이 그의 농지화는 상징(symbol)과 서사(narrativ)와 은유(metapher)와 무관하다. 미술사에 수록된 풍경화가 상징과 서사와 은유로 의미의 층을 두텁게 쌓았다면, 이만우의 농지화는 오히려 질퍽한 논바닥, 벼들이 자라는 논, 볏짚이 흩어져 있는 논, 풀들을 키우는 논, 기계가 지나간 바퀴자국, 얼어있는 겨울의 논바닥 등 식상한 농지이다. 미술사의 풍경화가 선지식을 요구한다면, 여기서는 우리에게 이미지의 논리가 무엇인지 의문을 제기하면서 회화의 본질로 초대한다.
이만우의 농지화를 세심하게 풀어보자. 쉽고 흔하게 접하는 한국의 농촌이 매우 세밀하고 치밀하게 산출된 붓 자국으로 연출됐다. 세필로 그려진 사실적 논바닥은 분리와 종합의 현상학적 구성법으로 점철되어 있다. 이만우가 바라보고 선택한 농지는 이렇듯이 회화의 시각적 논리와 이미지의 세계로 변신한다. 시각적 논리와 회화적 이미지로 변신된 농지화는 현대미술의 노정을 걸쳤다. 그가 스스로 말하듯이 논바닥을 휘 접고 지나간 흔적과 인위적으로 여기저기 흩어진 볏짚들은 사진으로 담겨졌고 다시금 회화매체로 번역된다. 이러한 사진과 회화의 친족관계는 생경하진 않을 것이다. 왜냐면 이 관계는 인상주의의 드가(Degas)와 모네(Monet)에서 출발하여 미래파와 전후의 팝아트로 이어졌고, 현재는 접하기 쉬운 풍경사진을 단색으로 번역하는 게르하르트 리히터(Gerhardt Richter)와 대지의 기록된 역사를 회화로 번역한 안젤름 키퍼(Anselm Kiefer)등의 작품이 이미 미술사에 자리했기 때문이다. 그들의 작품은 회화세계에 무엇을 그려야 한다는 억압에서 해방하는 기회를 제공했지만, 이만우는 한 발짝 더 나아가 한국농촌을 선택했고 풍경화의 주인공인 원근법을 삭제하여 차이가 있다. 캔버스를 지배하는 세필의 존재가치가 색으로 그리고 희화(憙畵)된 논바닥의 형상으로 본연의 모습을 드러내어 거리두기는 시작했다.
이만우는 회화의 본질인 그리는 즐거움을 논바닥으로 번역했다. 회화의 본질과 논농사의 비유는 동전의 양면같이 흥미롭다. 농부가 한 점 한 점 촘촘히 농작을 하듯이 그는 평면위에 붓으로 한 올 한 올 정성스럽게 이미지를 그려낸다. 그려진 이미지는 색의 형태이고 색의 형태는 붓의 존재가 된다. 그리고 한줌의 구석도 남김없이 구슬땀으로 경작된 농지가 전체를 아우르듯이 작가는 색으로 캔버스를 부분적으로 구성하고 조형적으로 전체를 아우른다. 이러한 부분과 전체의 유기적인 밀도는 치밀하게 계산된 노력의 결과이자 이미지의 논리다. 이렇게 산출된 화면의 조형원리는 땀으로 배인 농지와 유사하다. 더욱이 비움이 충만한 대지가 풍성한 결실을 약속하듯이 색으로 본연의 자태를 드러내는 붓질은 관찰자의 시선을 풍요롭게 한다. 논바닥이 노동의 노동을 요구하듯이 작품은 이어달리는 붓질로 생명력을 획득한다. 논바닥이 땀으로 얼룩진 논농사의 흔적을 품고 있듯이 캔버스의 이미지들은 색들의 존재방식을 펼쳐낸다. 이러한 과정을 관통한 논바닥은 농업의 진원지에서 회화의 본질로 환원하기 마련이다. 이만우의 농지화는 이렇듯 논리적이자 예견된 결과이다. 한국의 현대미술에서 비교예문조차도 찾을 수 없고 실험조차도 시도되지 않은 농지화가 탄생했다. 탄생의 기쁨과 축복으로 충만한 작가의 노정은 결코 외롭진 않을 것이다.
이만우는 그리는 즐거움으로 미술사와 거리두기를 실현했고 농작의 근원으로 회화의 본질을 독해했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볏짚, 잘려진 볏짚, 자라난 벼가 화면의 생동감을 색으로 전달한 반면에, 회화의 평면성은 다양한 논바닥 표면의 상태로 다변화 된다. 회화의 본질이 붓으로 색으로 그리고 농지의 이미지로 가시화 되어 단순하고 꾸밈없는 농지화이다. 식상하고 보편적인 한국의 전형적인 논바닥을 선택한 이만우의 시각적 논리가 비로소 투명해진다. 회화의 본질이 붓과 색으로 평면성의 한계를 넘어서는데 있듯이 그리는(painting) 즐거움은 단순하고 단순한 진리는 군더더기가 없기 마련이다. 단순한 진리가 진솔한 과제를 담고 있듯이 이만우의 농지화는 그러나 우리에게 쉽지 않은 과제를 선사한다. 국제화로 이어달리는 한국의 미술계에 있어서 한국형 농지화의 가치가 어디에 위치하는지 묻는다. 직립 보행하는 우리에게 원근법을 삭제한 농지화는 작품을 관찰하는 방법이 달라야 하고 그리고 역점을 달리하면서 변하는 풍경화의 역사에서 수용의 범위가 어디까지인지 묻는다. 그리고 이러한 과제는 위에서 아래로 관찰된 논바닥이 관객과 마주하는 방법과 작가의 논리로 소급된다. 쉽게 말하면, 이만우는 원근법을 제외하여 그려진 논바닥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회화의 과제가 무엇인지 되묻는 방식을 선택했다. 더 쉽게 말하면, 이만우는 위에서 아래로 직시한 논바닥을 사실적으로 화폭에 담아내어 회화의 실제가 무엇인지 추적했다. 이만우의 농지화는 색과 붓의 유기적인 관계 -색이 홀로 존재 할 수 없듯이 붓은 색의 형태를 가시화하고 다시금 색은 세필의 존재를 드러내는 색과 붓의 불가분의 관계-를 논바닥으로 제시했다. 그리하여 우리가 보는 것은 논바닥이 아니라 당신이 보는 것은 회화라고 일깨운다. 이만우의 농지화는 회화란 그리는 즐거움을 가시화하고 관조의 유희를 동반해야 한다는 강령이 담겨있다. 어디에 무게를 두어야 할지 선택은 각자의 몫으로 남지만 이만우의 농지화가 던진 회화의 시각적 논리(Logik)와 대상(논바닥)의 실제성(realty)의 상호관계는 한국의 현대미술을 넘어서 다원주의시대의 비평이자 미술비평의 과제임에는 틀림없을 것이다. ■ 김승호
Vol.20110818a | 이만우展 / LEEMANWOO / 李萬雨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