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is

김언주展 / KIMEONJU / 金彦絑 / painting   2011_0525 ▶ 2011_0530

김언주_범죄의 기원: 너무 빠른 반응, 너무 느린 반응 The Origin of Crime: too quick response, too slow response_캔버스에 유채_110×130cm_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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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월~토_10:30am~06:30pm / 일_12:00pm~06:30pm

갤러리그림손 GALLERY GRIMSON 서울 종로구 경운동 64-17번지 Tel. +82.2.733.1045~6 www.grimson.co.kr

김언주, 일화로 엮어가는 회화 ● 통상 화가들이 대상을 관찰하고 그것을 화면에 옮기는 데 반해 김언주는 먼저 스토리를 생각하고 그 플롯에 의해 그림을 그려간다. 따라서 그의 그림에서는 사물의 군집 대신 일화가 숨 쉰다. 그의 일화는 잔잔한 일상에서 경험한 것과 깨달은 것, 그리고 그가 소망하는 것을 밑바탕으로 삼는다. 그래서 삶의 언저리에서 얻은 스토리텔링이 그의 회화에서 큰 비중을 차지한다. 눈덮인 마을, 밭가는 농부, 결혼식, 마차 등 미국의 전원생활을 그린 A. 모지스(Anna Moses)의 소탈한 엽서그림, 가난한 농부와 어부의 모습을 따듯한 시선으로 포착한 이스라엘스(Josef Israels)의 그림이 오버랩되는 것은 이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 작가는 무심하게 넘어갈 수 있는 장면들에 시선을 고정하고 깊은 사색에 잠긴다. 일상생활에서 벌어지는 소소한 일들에 대한 소감을 묘사한 한권의 수필을 읽은 듯한 기분이다. 수필같은 그림을 보고 있자면 모호함은 구체성으로, 막연함은 명료함으로, 무미함은 생동감으로 다가온다. 조개가 진주를 품고 있듯이 평상속의 진실을 찾아가는 것이 그의 회화의 특색이다.

김언주_함께 짐 진 자들, Bear the burden together_종이에 혼합재료_112 ×76.5cm_2011

「지루한 분쟁」은 두 사람이 팻말을 들고 지쳐서 땅에 털썩 주저앉아있다. 그들이 들고 있는 팻말속의 상대방의 얼굴은 모두 빗금을 근 표시가 되어 있는 것으로 미루어 서로를 미워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은 마주보려고 하지도 않고 화해할 기색도 없다. 적과 동지로 갈린 우리 사회를 풍자한 작품이다. 두 사람은 분쟁이라는 지루하고 힘든 평행선을 달릴 뿐이다. ● 그럼에 반해 「함께 짓다」는 매우 건설적인 장면을 표현하고 있다. 앞의 작품이 분열상을 보여준다면 이 작품은 힘을 합쳐서 집을 짓는 장면을 나타낸다. 벽돌을 쌓고 줄을 당기는 사람, 흙을 나르며 기초를 다지는 사람, 목재를 나르는 사람 등 묵묵히 자기에게 맡겨진 일을 하며 본분을 다하는 일꾼들을 볼 수 있다. ● 「7번 열차」는 하루의 무게를 감당한 사람들을 위한 찬가의 의미를 띤다. 작가가 뉴욕에서 학창생활을 할 때 맨해튼에서 퀸즈까지 자주 이용하던 '세븐 트레인'(7호선)을 제목으로 한 것이다. 한번은 하교 무렵에 차창으로 들어오는 찬란한 빛의 향연으로 마치 각 사람이 춤추는 것처럼 그의 눈에 들어왔다. 그의 작품에는 흑인,백인, 히스패닉계, 아시아계 가릴 것 없이 봉 주위에 모여 흥겹게 춤을 추거나 어깨동무를 하고 있다. 작가는 인체를 실루엣으로 처리하여 그들의 흥겨움을 리드미컬하게 묘사하고 있다. 이 작품은 단순히 지하철 승객들의 모습이 아니라 인종과 문화를 넘어 지구촌 사람들의 공존과 평화를 생각하지 않았을까 싶다. 과장된 표현인지 모르지만 필자에게는 사랑의 띠로 묶인 인류를 표상한 것으로 보인다.

김언주_쉬지 못하는 그대, Restless_종이에 혼합재료_76.5×112cm_2010
김언주_지루한 분쟁, Tedious strife_캔버스에 유채_129×162cm_2010

「초대」는 여러 사람들이 식사를 하는 장면을 연출한 것이다. 빵을 굽는 사람이 보이고 오른 편의 식탁에는 빵을 나르는 사람, 그리고 전면에는 뜨거운 빵을 먹으려다 떨어트릴 뻔한 사람이 보인다. 여기서 화면 뒤쪽에 보이는 삐끔 열린 문은 생명의 문을, 빵은 일용한 양식, 그리고 기독교적 의미로는 그리스도의 몸에 동참한다는 상징성을 띤다. 이 작품은 표면상 식사 초대의 의미를 지니지만 영원한 생명의 부름에 초대받은 사람들을 표상하고 있다. ● 이것만이 아니라 내면적 성숙을 상징적인 이미지의 기용으로 표현한 작품도 볼 수 있다. 「성찰」에서는 앙상한 나무가 등장하는데 이것은 겨울추위를 맞아 여름에 입었던 무성한 나뭇잎을 다 벗고 나신을 드러낸 모습을 그린 것이다. 온갖 난관앞에서 자신을 성찰함으로써 내적으로 더 성숙해지며 존재의 참의미를 발견해간다는 메시지를 내포하고 있다. 「위안」은 우리가 정말로 누리는 위안이 실은 거짓된 것임을 지적한다. 두 사람이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지만 그들은 공사중임을 알리는 붉은 '차량경고용 박스'에 둘러싸여 있다. '차량경고용 박스'는 그들의 쉼터가 불안전할 뿐만 아니라 언제 무너질지 모른다는 위험성을 암시하고 있다. ● 소묘작품 「쉬지 못하는 그대」는 각종 스트레스와 바쁜 일과 때문에 두통을 앓는 현대인을 풍자한 것이다. 주인공의 머리는 실타래처럼 복잡하게 얽혀 있을 뿐만 아니라 의자에 앉았어도 편히 쉬지 못한다. 이와 비슷한 작품으로는 「드디어 잠들다」란 작품이 있다. 보는 것만으로도 어지러운 얼룩말 무늬의 이불을 덮고 있는 주인공이 오랜 뒤척임 끝에 잠이 들게 되었다는 줄거리인데 여러 가지 중압감으로 인해 고통받는 현대인을 재치있게 표현하고 있다.

김언주_위안, Comfort_캔버스에 유채_185×169.5cm_2010
김언주_핑크 코끼리? Pink elephant?_캔버스에 유채_150×130cm_2010

서두에서 김언주의 그림이 유머가 넘친다고 했지만 그 유머 안에는 우리가 음미해볼만한 것들이 들어차 있다. 그는 궤도에서 일탈한 것들을 꼬집는다. 풍자화는 애정없는 비판을 퍼붓기 일쑤이지만 그의 회화는 애정 위에서 이뤄진다는 점에서 이와는 다르다. 그 자신 또한 부족하고 연약한 자라는 입장에서 동료인간과 우리 사회를 돌아보는 것이다. ● 물론 그의 회화가 사회풍자로 제한되는 것은 아니다. 「성찰」과 같은 작품은 자아의 내면을 성찰하는 다분히 철학적인 작품이며, 「쉬지 못하는 그대」와 「드디어 잠들다」 역시 안식하지 못하는 복잡한 내면을 그려내고 있다. 그런가 하면 「함께 짓다」와 「세븐 트레인」은 개인 위주의 사회에서 공존과 번영의 공동체의식을 강조한 작품이다. 기존의 풍자화가 사회의 아픈 부위에 메스를 대는 등 사회고발적인 양상을 띤다면 김언주의 풍자화는 긍정적 마인드가 곁들어져 보는 이로 하여금 아름다운 사회를 꿈꾸게 한다. ● 한때 북유럽의 화가들은 그림을 그릴 때 라틴어 모멘토 모리(Momento Mori), "죽음을 기억하라"는 메시지를 중요한 경구로 받아들였다. 가령 한스 홀바인의 「대사들」에는 화면 하단에 비스듬히 매달려 있는 해골을 왜곡된 형체로 넣어 욕망의 헛됨을 강조하였고 네덜란드 화가들은 아예 일생의 유한함을 환기시키는 이미지를 내세워 바니타스 정물화를 개척하기도 했다. 우리 시대에는 '모멘토 모리'나 '바니타스'가 끼어들 틈새조차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우리 삶속에는 엄연히 삶과 죽음이 도사리고 있으며 그것을 부정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때문에 여전히 '모멘토 모리'가 유효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김언주_함께 짓다, Build together_캔버스에 유채_162×189.5cm_2010

김언주의 회화는 새로운 방식으로 우리에게 깨우침을 준다. 몰현실적 도취에 빠져 실재를 바라보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작가는 그들이 경천동지할 현실의 직시와 본질을 제시한다. 그림은 현실의 축도(縮圖)에 불과하지만 동시에 미궁에서 빠져나오는 실마리를 제공하기도 한다. 좁은 틈바구니에서 벗어나 넓은 세계로 들어가려면 그림의 암호를 차근차근 풀어가야 한다. 플라톤은 일찍이 외형의 감각이 아니라 실재의 지식을 갖춘 화가를 그의 '이상국가'에 부합하는 존재로 강조한 바 있다. 고전 시대와 마찬가지로 현재에도 본질을 통찰할 줄 아는 '앎'이 필요하다. 이것이 '실재의 앎'을 중요시하며 그것을 예술적 근간으로 삼는 김언주의 '일화 모음'의 회화에서 제일 돋보이는 부분이다. ■ 서성록

Vol.20110527j | 김언주展 / KIMEONJU / 金彦絑 / painting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