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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1_0402_토요일_06:00pm
후원 / 서울문화재단_한국문화예술위원회
관람시간 / 11:00am~06:00pm / 월요일 휴관
갤러리 쿤스트독 KUNSTDOC 서울 종로구 창성동 122-9번지 Tel. +82.2.722.8897 www.kunstdoc.com
보이지 않는 직선 : 최종희의 세 번째 개인전에 부쳐 ● 오늘날의 한국인은 어떠한 인식 틀을 가지고 세계를 바라보는 것일까? 쉽게 자각되는 것은 아닐 테지만, 프랑스의 철학자 미셀 푸코가 에피스테메(episteme)라는 낱말로서 적절히 개념화 시켰던 세계에 대한 인식 틀이 오늘날의 한국 사회에도 특정한 방식으로 형성되어 있을 것이다.
최종희는 한국사회의 에피스테메에 대해 문제의식이 깊은 작가이다. 그는 작년에 있었던 두 번의 개인전을 한국사회의 에피스테메에 대한 비판적 사유의 장(場)으로 마련해 놓았다. 그는 오늘날의 한국사회에서 통용되고 있는 가치체계의 밑바탕에 제1세계의 근대성이 자리 잡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지난 20세기를 유럽-미국-일본으로 구성되어 있는 '선진 제1세계'에 진입하는 것을 지상목표로 삼고 몸부림쳐왔던 한국 사회가 자연스럽게 그 세계를 형성시켰던 근대적 에피스테메의 기재를 모방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한국 사회가 열렬히 본을 떴던 것은 현재가 아니라 과거의 제1세계 에피스테메였다. 즉,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으로 대변할 수 있는 20세기의 불확실성의 에피스테메가 아니라, 뉴톤 역학으로 대변되는 18,19세기의 확실성의 에피스테메를 추구했다는 것이다. ● 이 때문에 오늘날의 한국인이 지니게 된 에피스테메는 정작 자신이 닮고자 몸부림치는 세계가 현재 지향하는 바와는 정반대의 방향으로 내달리게 되는 아이러니에 놓이게 된다. 그래서 한국 사회에서는 제1세계의 사람들이 더 이상 확신을 갖지 않는 가치에 대해 신앙과 같은 확신을 가지고 있거나, 그들이 이미 넌센스라고 치부하고 있는 일을 당연한 상식으로 받아들여지는 경우가 허다한 것 같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유럽-미국-일본과 같은 '선진국'이 되는 것을 여전히 지상 목표로 삼고 있는 이 사회는 겉과 속이 모순되어 있는 에피스테메를 가지게 된다. 결국, 탈근대화된 현재의 겉모습을 취하면서도, 속으로는 과거에 추구되었던 근대성의 가치들이 그대로 통용되는 것이다.
시대착오적이라는 인상을 감수하고서라도 최종희가 지난 두 번의 전시에서 거울이라는 기재를 사용하여 재현의 담론을 끌어들였던 까닭도 그러한 맥락에서였다. 그는 한국사회의 에피스테메가 지니고 있는 모순을 내부에서부터 차근차근 짚어나가고자 했던 것이다. 세계를 정확히 표상할 수 있는 불변의 진리가 있다고 확신하는 재현의 담론이야말로 과거에 제 1세계가 성립하는 데에 근간이 되었던 세계인식 틀이다. 실재로 오늘날의 한국사회에서는 19세기의 제국주의자들이 가졌을 법한 오만한 합리주의를 가지고 세계를 바라보는 사람들로 넘쳐나고 있고, 이는 학문과 예술에서도 별반 다를 바가 없다. 19세기적인 재현의 담론은 특히 시각 예술 분야에서 두드러지는데, 탈근대적인 시각 문화에 대한 경험이 그렇게 왕성하게 이루어짐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시각 문화는 재현의 이데올로기를 좀처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바로 이러한 모순적인 상황을 포착하고 공격하는 것이 최종희의 해체적인 거울 작업이 궁극적으로 겨냥했던 바였다.
최종희는 자신의 세 번째 개인전에서 『확실성에 대하여(On Certainty)』라는 전시 제목과 함께 무릎 높이로 나지막하게 쌓여 있는 기묘한 미로(迷路)를 조성해 놓았다. 그것은 미로로서의 기능을 포기한 미로로서, 앞으로 걷게 될 모든 길을 노출하고 있는 미로이고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뛰어넘을 수 있는 미로이다. 그 미로에 들어선 관객들은 대부분 미로가 제공하는 길을 얼마간 따라가다가 곧 무릎 높이도 되지 않는 담벽을 훌쩍훌쩍 건너 뛰어 최종 목적지로 직행해 버린다. 미로가 제공하는 룰은 이처럼 쉽게 위반된다. 아니, 그보다는 고의적으로 위반을 유도하는 것 같다. 작가는 목적지에 이르는 지름길을 관객에게 손쉽게 제공함으로써, 미로를 미로로서 체험하는 것을 비효율적으로 느끼게 만든다. 아마 효율/비효율의 구도가 전개되었을 때, 비효율을 선택하는 한국인은 거의 드물 것이다. 효율에 대한 확신과 추구야 말로 한국인이 지니고 있는 에피스테메의 가장 핵심적인 부분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최종희는 효율을 지연 및 해체시키는 것을 본성으로 하는 미로의 복잡한 도면 위에, 그것을 허무하게 가로질러 버리는 이데올로기의 직선을 하나 그려 넣는다. 여기에서 관객들에게 현실성을 가지는 것은 단연 '효율적' 이데올로기의 직선이다. 관객은 미로라는 상황에 처해 있지만, 그러한 상황에 아랑곳하지 않고 미로를 손쉽게 위반하여 자신들이 경도되어 있는 이데올로기를 실현시킨다. '확실성에 관하여(On Certainty)'라는 전시 제목이 독특한 뉘앙스를 획득하는 것도 아마도 이러한 여건과 관련해서 일 것이다. 전시장에는 눈에 보이는 미로의 길과 눈에 보이지 않는 이데올로기의 길이 있다. 즉, 두 가지 차원의 확실성이 경합을 벌이는 것이다. 여기에서 한국인의 에피스테메는 망설임 없이 눈에 보이지 않는 확실성을 선택한다. 결국 눈에 보이는 '현실적인' 확실성은 별다른 고려의 대상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 최종희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이와 같이 눈에 보이지 않는 확실성의 추구가 한국인의 의식 속에 어떻게 기만적으로 은폐되고 있는지도 나타내고자 했다. 그는 이를 전시장 벽면에 미로의 모습을 실시간으로 되비치고 있는 영상을 통해 드러내고자 했는데, 그 속에서 관객은 아무리 미로를 건너뛰며 곧바로 목적지를 향하고 있어도, 미로 속을 끝없이 해매고 있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결국 관객은 실재로는 미로를 '효율적'으로 위반하고 있으면서도, 커다란 영상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마치 스스로가 효율성에 상관없이 미로 속에서 방황하는 듯한 기만적인 의식을 갖게 된다.
이와 같이 최종희는 이번 전시에도 변함없이 한국사회의 에피스테메가 은폐하고 있는 모순적인 구조를 드러내는 데에 심열을 기울이고 있다. 그에게 한국인이란 스스로 21세기를 살아가는 탈근대인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19세기의 근대인이나 다름없다. 최종희의 미로에서 그러하였듯이 시대착오적인 근대인들의 삶을 기만적으로 가로지르고 있는 '이데올로기의 직선'은, 이제는 제 1세계와 구별이 가지 않을 정도로 세련된 외양을 지닌 한국사회의 내면을 암묵적인 근대적 폭력의 장으로 만들고 있다. 한국 사회의 감추어진 근대성을 항상 건조하게 드러내는 데 주력하고 있는 최종희의 작업에서 비판적인 윤리의식이 느껴지는 까닭도 이러한 맥락에서이다. ■ 강정호
Vol.20110418c | 최종희展 / CHOIJONGHEE / 崔鐘熙 / mixed media.installa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