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속의 지형도-나는 나의 두려움이 두렵다

김진展 / KIMJIN / 金眞 / painting   2011_0318 ▶ 2011_0331 / 월요일 휴관

김진_나는 나의 두려움이 두렵다 시리즈 중-최후의 심판이미지_ 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97×130cm / 150×150cm_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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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1_0318_금요일_05:30pm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월요일 휴관

갤러리 쿤스트독 KUNSTDOC 서울 종로구 창성동 122-9번지 Tel. +82.2.722.8897 www.kunstdoc.com

개별화와 전체화의 이중구속 ● '풍속의 지형도'라 붙여진 김진(金眞)의 개인전은 권력이 편재적으로 작동하는 현실의 지형을 그려낸다. 그것은 현실이나 지도처럼 투명성을 전제로 하는 것이 아니다. 현실의 한 단편이 굳어져 전승되는 풍속이란 때로는 부조리하기도 하며, 지금 여기를 다시금 출발점으로 삼아 더듬어 나갈 수 있을 뿐인 지형도란 전체를 아우르는 조망적 시점과는 거리가 있다. 풍속이든, 지형이든 모든 상황의 필요충분조건이 충족되었다고 가정되는 보편성과 그것에 근거하는 형식주의와 달리, 상황과 문맥이 문제시되는 것이다. 그것은 영원히 고정된 성좌 같은 것이 아니라, 새로 찍혀진 점에 의해 좌표계 자체가 재조정되거나 다시 출렁거리는 과정 중의 실체이다. 이 전시에는 1999년에서 시작하여 2011년까지 10년 이상 작업한 다양한 작품들이 재맥락화 된다. 그렇다고 그녀의 작품이 우연성을 절대화시킬 뿐인 상대주의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상황과 문맥을 강조하기 위해 보편이나 본질은 끊임없이 호출된다. 탈 중심화의 전략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중심이 포함되어져야 한다. 그것은 핵심을 외면한 채 주변만 맴돌면서, 중심이 아우르는 지배 권력에 성공적으로 안착하는 전형적인 보수주의를 벗어나는 방식이다.

김진_나는 나의 두려움이 두렵다 시리즈 중-범죄 현장 이미지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97×260cm_2002

김진은 지배 사회를 성공적으로 유지하는데 동원되는 가장 기본적인 정서로 두려움을 지적한다. 「나는 나의 두려움이 두렵다」라는 큰제목 아래의 두려움 시리즈는 범죄나 테러, 생지옥, 망가진 신체 같은 이미지들이 등장한다. 제목을 'oo 이미지'라고 붙인 이유는 지배 이데올로기가 두려움에 대해 강한 동일화와 감정이입적인 전략을 사용하는 것과 구별하여, 그것을 이질화하고 거리를 두기를 위함이다. 모두에게 혜택이 돌아갈 수 없는 편파적인 풍요와 성장이 가능하기 위한 짝패는 공포와 두려움이다. 지배적 이데올로기는 막연한 두려움을 이용하여 권력에 대한 자발적인 동의를 이끌어내고, 체제의 안정을 도모한다. 두려움은 살아있는 현재와 불확정적인 미래를 저당 잡는다. 두려움은, 불타 무너지는 쌍둥이 빌딩을 그린 작품 「테러 이미지」(2002)나 묵시록을 연상시키는 작품 「최후의 심판 이미지」(2002-2011)처럼 거시적 차원부터, 「범죄 현장 이미지」(2002)나 「밤길 이미지」(2011)처럼 일상적인 차원, 더 나아가 「피부가 손상된 얼굴 이미지」(2002)나 「처진 가슴 이미지」(2009)처럼 내밀한 차원에 이른다. ● 그러나 김진의 작품에서 크고 작은 차원의 재앙이 가져다주는 두려움의 실체는 밑도 끝도 없는 실존적 문제나 자연적 운명이 아니라, 사회적 기원을 가지고 있다. 두려움은 무엇보다도 권력의 문제인 것이다. 정방형의 같은 크기로 제작된 「거인의 시선은 어디에나 있다」 시리즈는 얼굴이 없는 거인들이 관객을 주시하는 듯이 설치된다. 중세의 이콘화를 떠오르게 하는 이 방식은 머리와 표정을 없애버림으로서 편재하는 익명적 권력을 표현한다. 이에 대해 작가는 '이미 하나의 신앙처럼 되어버린 현대 자본주의에 대한 의인화를 시도하며, 자본의 욕망(자본가의 욕망이 아닌)과 자본주의 시스템에 얼굴을 부여하고자 한다'고 말한다. 작품 「거인의 시선은 어디에나 있다」(2009)는 얼굴 없는 양복 입은 남자의 몸통에서 나온 네 개의 손이 와인 잔, 황금 알, 거위, 하프 등을 각각 들고 있다. 그것은 이윤이나 쾌락 등 거대 자본의 포용력이나 포식성 등을 상징한다. 이 시리즈 중의 하나는 거만하게 꼬고 있는 손의 자세를 통해, 대상의 가치를 판가름 하는 배후의 실세를 표현하며, 또 하나는 몸통에서 나온 네 개의 손이 덫과 연결된 쇠사슬을 쥐고 있는 무시무시한 심판자의 모습이다.

김진_나는 나의 두려움이 두렵다 시리즈 중-밤길 이미지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97×260cm_2011

김진의 작품에서 권력은 정장을 입은 모습에서 드러나듯이 합법적인 형태를 띄고 있으며, 그것이 그 법의 자의성과 폭력성을 감춘다. 법이 폭력과의 연결성을 보다 명확히 보여주는 실체는 국가이다. 그래서 국가는 '합법적 폭력 수단을 토대로 한 인간에 의한 인간의 지배 관계'(베버)로 정의되곤 한다. 카프카의 「심판」에 나타나듯이, 현대예술 작품에서 법의 등장은 부조리한 양상을 띈다. 조르조 아감벤은 「호모 사케르」에서, '단순한 관계들의 이념'(칸트)으로 변모한 법, 그리고 의미는 없지만 유효한 법에 복종하는 삶을 묘사한다. 그에 의하면 카프카가 그려낸 것은 바로 그러한 유형의 삶으로, 거기에서 법은 내용이 없을수록 더욱 집요하다. 법의 순수한 형식이란 단지 관계의 공허한 형식에 지나지 않는다. 법의 총아인 국가는 사회와 대립한다. 국가는 사회적 결합을 억제하며 개별화시킨다. 독점하고 가치를 매기고 심판하는 얼굴 없는 권력 앞에는 불가피하게 얼굴을 드러낸 희생자들이 있다. 촛불 시위의 현장에서 영감을 받은 최근작은 시위대들에게 쏘아지는 공격적인 강한 빛에 노출된 사람들이 등장한다. 거기에는 피사체를 향해 앞이 안보일 강한 빛을 쏘고, 그 뒤에 숨어서 잠재적이거나 명시적인 질서 교란자(범죄자)를 특정 하는 누군가가 숨어 있다. ● 해로운 화공 약품 같이 쏟아지는 강렬한 빛에 노출된 채, 얼굴을 가리거나 눈을 감거나 표정을 일그러뜨리는 사람들은 낱장의 그림으로 하나하나 개별화되어 있다. 폭력적인 강한 빛은 탈주자들을 감시하는 집단 수용소처럼 보이기도 하는 지옥도나 범죄현장 이미지 등에도 등장한다. 저항하는 작은 촛불들을 깔아뭉개는 이 센 빛을 쓰는 자는 누구인가. 거기에는 두 가지 빛으로 전환된 물리력이 대치하고 있다. 강한 빛이 발산되는 보이지 않는 중심에 해당되는 회화의 장치는 원근법상의 소실점이다. 「거인의 시선은 어디에나 있다」 시리즈 중의 한 작품은 모든 시선을 흡수하는 하나의 점과 같은 위치에 지구본이 있고, 이것을 손아귀에 넣은 거인이 형상화 되어 있다. 근대적 독점 자본주의를 넘어선 후기자본주의 사회에서 권력은 분명히 분산되어 있지만, 권력이 익명화되어 있을 뿐 그것의 독점과 집중이 사라진 것은 아니라는 것이 작가의 생각이다. 거인 시리즈에 전제된 원근법은 이러한 시점에 내재된 권력관계를 강조한다. 장면을 바라보는 모든 이의 시선을 흡수하여 강한 빛으로 되 반사하는 이 자리는 누구의 자리인가? 거인은 이콘화의 전지전능한 신처럼, 때로는 마술사처럼 등장하는데, 그들은 모두 관객을 향해 열린 무대 위에 앉아있다.

김진_나는 나의 두려움이 두렵다 시리즈 중-테러 이미지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94×130cm_2002

안 쉬르제는 무대장치의 역사를 다룬 「서양 연극의 무대장식 기술」에서 모든 것을 한눈에 보게 해줄 수 있는 이상적인 위치, 즉 원근법의 중심을 차지하는 무한 소실점을 무한 초월과 연결시킨다. 허구적 무대에서 환영이 가장 잘 실현되는 소실점 맞은편 자리가 바로 무대를 만들어낸 왕의 자리이다. 즉 원근법적 무대는 왕의 시점이 구현되는 장소인 것이다. 안 쉬르제에 의하면 원근법으로 된 허구의 이상적 모델은 반영효과에 의해 왕에 의해 조직된 세상의 질서를 가리킨다. 그것은 왕의 세계를 조직하고 확대하는 것을 지향한다. 왕권 중앙 집중화의 표현인 동시에 그 도구 중의 하나인 이러한 무대는 왕의 눈이라는 기준점을 중심으로 하여 왕을 위해 창안되었는데, 여기에서 두 개의 질서(실제 세계와 재현된 세계)는 동형적으로 일치한다. 재현된 공간의 이상적 질서가 은연중에 현실에서의 질서를 가리키며, 재현된 무한대는 거울처럼 왕의 눈에 맞추어져 있다. 극장에서 인간의 환상을 만들어내는 원근법의 이상적인 자리는 지배자의 자리인 것이다. 물론 화가의 위치도 이 지배적인 자리를 전제한다. 그러나 김진의 작품은 환영에 복속시키는 원근법이 아닌, 원근법에 대한 메타적 차원의 반성에 해당된다. ● 소격효과를 이용하는 김진의 다른 많은 작품처럼, 거기에는 동일자의 적법성을 의심하는 타자의 시선이 개입되어 있다. '먼저 그리고 나서 나중에 생각한다'는 작가는 몸과 무의식적 과정에 자신의 작업을 열어놓는다. 이러한 자세에는 원초적 사실이나 본질에 대한 회의가 전제되어 있다. 폴 리쾨르 「타자로서의 자기 자신」에서 원초적 사실은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 반대로 우리는 사유나 작업이 끝날 때에만, 원초적 사실을 인정할 수 있게 된다. 마찬가지로 출발점에 있는 순수한 의식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폴 리쾨르는 출발점에 있는 홀로인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본다. '타자로서의 자기 자신'은 사유들은 나 아닌 어떤 타자에게 귀속시킴으로서 의미 있게 말할 수 있다. 이를 통해 예술은 유아론이나 사적 경험으로 와해될 위험을 방지한다. 한편 김진의 작품에서 지배적인 중심에 바깥에 위치하는 사람들은 수수께끼 같은 모습이다. 그것은 모든 것을 낱낱이 개별화하는 전체주의적 시점을 피해가는 방식일지도 모른다. 중심으로부터 쏘아지는 투명한 빛에 비추어진 초상들은 매우 흐릿하다. 「mille feuilles」 시리즈에 나오는 인물들은 '너는 누구냐'라고 추궁하는 물음에 딱히 할 말이 없어 보인다.

김진_나는 나의 두려움이 두렵다 시리즈 중-처진 가슴 이미지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30×97cm_2009

자연적인 피부색과 거리가 있는 물감들이 줄줄 흘러내리는 초상은 개체로서의 주체를 녹이는 듯 하면서 한 겹 피부 아래 감추어진 중층적 표면들을 드러낸다. 「기억에 대하여」 시리즈는 기념비적인 인간의 실루엣이 동시에 그림자처럼 역전되고, 그리다 만 듯한 얼굴은 어디에도 속할 수 없는 또는 복구할 수 없는 잃어버린 단편처럼 보인다. 익명적 권력에 대응하는 이 무명인들은 자기 동일성을 확정할 수 없는 만큼이나 명확한 서사를 거부한다. 김진의 작품은 시원스러운 붓질이나 오묘한 색 얼룩 등, 회화적인 측면이 중요하지만 이야기를 촉발하는 구체적인 도상의 역할 또한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이 기승전결 식의 명확한 서사를 가지는 것은 아니다. 그녀가 서사를 거부하는 방식 중의 하나는 동일한 서사를 반복하는 것이다. 「무제」(2006-2010) 시리즈는 몇 년 차이를 두고서 동일한 이미지를 스케일만 다르게 개작했다. 실내에서 요리하는 여자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바깥풍경의 조합은 신문에서 빌려 온 이미지들이다. 지시대상 또는 실재라 간주된 것은 존재하지만, 작가의 편집은 그것들을 기묘한 시뮬레이션의 세계로 변모시킨다. 신문기사처럼 사실이라고 말해지는 것들이 만나서 최초의 맥락은 사라지고 비현실과 초현실로 바뀌게 된다. 어디선가 떨어져 나왔을 애초의 사실 역시 그 의미의 근거가 확실한 것은 아니다. ● 서사의 불확실성을 강조함으로서 서사를 무화시킨다고 해서 추상화로 귀결되는 것은 아니다. 김진이 중요시하는 것은 관계 항이지 어떤 본질이 아니다. 형식 언어의 순화를 위해 주제를 배제하면서 회화의 본질을 추구해왔던 근대적 방식이나, 반대로 그림을 명확한 메시지의 전달을 위한 수단으로 삼는 전통적 방식을 거부한다. 그녀의 작품들은 작가가 마련한 이야기를 관객에게 투명하게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수수께끼 풀이로 제안한다. 하나의 점을 새로 찍어 만드는 새로운 지형도처럼, 관객이 추가할 점은 작가가 시작만 한 이야기를 새로운 이야기로 풀어낼 것이다. 작가는 서사를 교란하고 관객은 그것을 짜 맞춘다. 작가는 말을 걸지만 나중에는 듣게 된다. 그것은 일방적인 의미의 전달이 아니라, 의미의 공동 생산이다. 의미란 화자나 청자 그리고 대상에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의미의 방향타가 되어주는 실마리나 단초는 작가가 제시한다. 하지만 그림이 읽히는 것은 작가 밖에 있다. '시작은 차가우나 작업은 뜨겁게 한다'는 김진의 작업 방식은 무책임하게 해석을 방치함으로서 작가의 무입장과 작품의 무의미를 감추지 않는다. 맹목적 방치와 작품을 세계에 개방하는 것은 다르다.

김진_무제2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97×130cm_2009

김진의 작품은 지시(참조) 대상이 등장하지만, 작품을 투명한 창이나 거울로 간주하지는 않는다. 단편화와 무관계성, 오묘한 얼룩들이 그 투명성을 방해한다. 투명한 창을 자임하는 사실주의는 작가를 투명 인간화 하지만, 여기에는 명백히 작가의 손이 드러나 있다. 가령 과감하게 쓱쓱 그려진 젖가슴과 손의 형태는 주저 없이 휘두른 붓질의 순서를 알아볼 수 있을 만큼 회화적 언어의 물질성이 두드러진다. 견고한 구조나 닫힌 서사는 열림과 과정으로 대치된다. 그림에서 작가의 열렬한 현존이 느껴지지만, 작가가 해석의 과정에 깊이 개입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명확한 판단이 선 사안에 대해서는 진실을 드러내는 것에 적극적이다. 다만 그것은 감정이입이 아니라 낯설게 하기를 통한 현실 노출의 과정을 거친다. 소격효과는 관객으로 하여금 완성된 생산품의 소비자에 머무르게 하지 않는다. 이를 통해 정의롭지 못한 현실이 지배하는 이 세계의 성격을 분명하게 드러낸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부정의란 대개 분배를 둘러싼 투명성의 문제이므로, 모든 것을 불투명하게 간주하는 것은 도피와 타협에 불과하다. 작가는 현실의 부조리와 불확실함에 압도되어 개인의 성을 쌓는 식의 퇴거에 머무르지 않는다.

김진_무제4_종이에 아크릴채색_2011

모더니즘은 불확실한 현실을 언어라는 새로운 질서와 확실성으로 대치하기 위한 나름대로 의미심장한 움직임이었지만, 언어 자체가 온통 현실과 권력 관계에 뗄 수 없이 연결되어 있음이 드러나고 있기에, 이제 그것은 역사적 의미만을 부여받을 수 있을 뿐이다. 모든 것을 창조할 수 있는 듯한 전능한 손들을 가진 얼굴 없는 권력이 등장하는 김진의 작품은 원근법적인 하나의 시점을 드러냄과 동시에, 그것을 여러 시점으로 분산시킨다. 이러한 권력의 편재성은, 미셀 푸코가 주장하듯이 권력이 도처에 있는 이유가, 권력이 모든 것을 포괄하기 때문이 아니라 도처에서 발생하기 때문이다. 산만하고 소리 없이 관철되는 권력은 지배/복종이라는 이항대립을 벗어난다. 푸코는 「성의 역사」에서 다양한 세력관계가 사회체 전체를 가로지르는 매우 폭넓은 분열효과에 의해 국지적 대결상황을 보여준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감시와 처벌」에서는, 이제 권력은 '배제한다, 억압한다, 억제한다, 검열한다, 떼어놓는다, 은폐한다, 숨긴다' 등, 권력의 효과들을 부정적인 용어들을 통해 기술하는 것을 끝내야 한다고 본다. 그에 의하면 권력은 생산한다. 그것은 현실적인 것을 생산하고, 대상들의 영역과 진리의 의식들을 생산하는 것이다. 오늘날 권력의 그물망이 가장 촘촘하게 늘어선 영역은 몸이다. ● 가령 김진의 작품에서, 진정한 여성이 되기 위해서는 불편해도 브래지어를 착용해야만 한다는 압박이 느껴지는 늘어진 젖가슴이 표현하는 바는 미시적으로 작동하는 성 정치이다. 거기에는 유방확대 수술을 부추키는 성형외과의 광고 문구대로 '여성의 자존심'을 무너뜨리고 있는 상황에 대한 자책이나 한 뼘도 안 되는 피부조직 상태가 자신의 전체가 되어 버리는 여성의 근심이 표현되어 있다. 성과 성욕은 권력에 의해 억압되는 것이 아니라, 온통 드러내라고 부추켜진다. 벌거벗은 군상들이 등장하는 작품에서 성은 생명으로 확장된다. 김진의 작품 속 고립된 개인이나 파국적 상황 속에 놓인 집단이 권력에 의해 포획되고 권력에 의해 생산되는 생명정치의 현장이 드러나 있다. 생명정치의 문제를 전면화 시킨 조르조 아감벤 「호모 사케르」는 민주주의가 만발한 것 같은 현대가 실제로는 전체주의와 내적으로 결탁되어 있다고 본다. 그 이유는 우리 시대의 정치가 생명정치로 완전히 변형되었기 때문이다. 아감벤은 비슷한 주제를 다루었던 푸코를 인용하면서, 푸코는 근대국가가 전례 없을 정도로 주체에 대한 개인화 기술들을 대상에 대한 전체화 과정들과 통합시켰다고 주장하며, 이는 사실상 개인화, 그리고 이와 동시에 진행된 근대 권력 구조들의 전체화로 이루어진 정치적인 이중 구속이라고 말한다. 김진의 작품에 등장하는 고립된 개인들과 익명의 군중들, 그리고 그들의 모든 것을 관장하는 보이지 않는 권력은 주체화와 전체화 사이의 관계를 드러낸다. ■ 이선영

Vol.20110318f | 김진展 / KIMJIN / 金眞 / painting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