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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0_1217_금요일_06:00pm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월요일 휴관
청주미술창작스튜디오 CHEOUNGJU ART STUDIO 충북 청주시 상당구 용암로 55 Tel. +82.(0)43.200.6135~7 cmoa.cheongju.go.kr/cjas
박영학의 풍경-순수 예술적 경험과 기억 ● 현대 한국화를 논할 때 전통 매체와 기법, 그리고 동양 미학이라는 전통적 조형방식 등의 범주에서 벗어나는 것이 쉽지 않다. 서양화나 다른 기타 매체를 사용하는 조형 언어들과 달리 유독 한국화는 재료와 '동양화 전공'에서 해방되지 못한 채, '한국화' 혹은 '동양화'라는 이름으로 거듭 분류되고, 논의된다. 흑과 백, 묵선(墨線)의 운용, 여백 등 한국화를 논의하는 데 사용되는 일련의 전문 용어들은 다양한 미술의 담론을 습득하고 실천하는 오늘날의 예술가들을 가두어 놓은 높은 담장이 될 뿐만 아니라 나아가 한국화의 확장된 조형성을 논하기에는 그 담장 안이 좁게 느껴질 때가 다반사이다. 따라서 21세기의 현대 한국화가들이 동일한 매체를 사용한다는 이유로 매체의 순수성과 사의(思議)의 전통 등의 전통적 공식을 그들에게 대입하는 것은 더 이상 적절치 않을 것이다.
그러나 박영학의 작품을 디지털 이미지로 처음 접했을 때 필자에게 떠오른 것은 역시 매체의 문제였다. 일견 흑백의 수묵화를 연상시키는 풍경들, 산과 하늘, 나무와 바위, 능선을 따라 흐르는 밭고랑 등이 한국화를 전공한 여느 작가들의 작품에 흔히 등장하는 대상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 물론 전통 수묵 산수가 보여주는 선(線)의 유희, 혹은 수묵의 농담(農談), 아른거리는 대기(大氣)의 여운은 사라지고 또렷하고 힘차게 그어진 검은 선, 치밀하게 묘사된 나무와 숲이 전통 한국화와는 조금 다른 형상을 이루고 있음을 볼 수 있었다. 나아가 밭고랑을 묘사한 검은 선들은 반복적 곡선을 구성함으로써 패턴화되었고, 세밀하게 묘사된 나무와 시각적 대조를 이루고 있는 등 다른 한국화가들이 모색하고 있는 다양한 실험의 유사 흔적 또한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영학의 작품을 한국화로 분류(혹은 속단)하였던 이유는 동양화 전공과 더불어 풍경 이미지, 장지의 사용 등의 차원에 근거한 성급한 판단이었을 것이다.
작업실에서 작가를 만나고 그의 작품을 손으로 만져보았다. 석채를 수 차례 발라 올린 표면은 눈이 부실 정도로 하얀 순백색이지만 그 감촉은 매우 거칠고 단단하다. 날카로울 만치 느껴지는 표면의 촉감위로 장지의 섬유조직 속으로 번져가는 수묵의 투명함이나 깊이감은 전혀 찾아 볼 수 없다. 거친 표면 위를 빠르게 혹은 느리게 지나간 목탄 가루들이 나무를 남기고, 숲을 이루고 있다. 한국화를 전공한 박영학이 찾은 이 전통적인 바닥 작업, 즉 석채를 여러 겹 바른 장지는 목탄화를 그리기에 어떤 종이보다 탄탄하고 견고한 캔버스이자 화면이 된다. 작가가 지난 몇 년간 실험하고 있는 숯이라는 재료도 목탄과 마찬가지로 전통 재료의 한계를 넘어서고자 하는 시도로서 다양한 표현 기법을 실험하는 재료의 하나인 것이다. 화면 위 목탄의 발림을 대신하여 검은 공간을 채우고 있는 숯 덩어리들은 검은 하늘 혹은 넒은 바다가 되어 빈 공간을 검고 빼곡히 채우고 있다.
박영학의 이전 작품이 전통적 조형 형식을 따르는 흑과 백, 선과 면, 채우기와 비우기 등의 시각적 양태들을 통해 형상을 쌓아갔다면 근간에 이르러 그의 작업에서 그러한 비움, 관조의 공간이었던 여백은 점차 사라져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마치 전통 한국화와의 결별을 선고하듯 빈 공간은 숯 덩어리들과 검은 재현의 대상들로 가득 채워지고, 「Beyond the scene 09-17」에서 볼 수 있듯이 방향도 깊이도 알 수 없는 화면은 추상적 평면으로 향하는 단계에까지 이르고 있음도 확인할 수 있다. 방해석이 조명을 받아 반짝이는 가운데 드러나는 숲의 모습은 눈빛과 같은 차가움과 동시에 벨벳과 같은 부드러움의 이중적 시각효과를 만들어낸다.
박영학이 사용하는 매체는 전통에서 시작되어 조형적인 필요에 의하여 찾아진 결과물이다. 목탄으로 그려진 산과 들, 나무와 숲은 작가에게 있어서 쉽게 포기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동양의 사의적 풍경은 실제의 재현이 아니라 상상화이며 상징화된 코드이기도 하다. 재현된 산과 물, 나무, 바위, 대기는 그 자체를 지시하기 보다 그 이면에 숨은 추상적 의미와 가치를 담는 그릇이 된다. 따라서 자연은 작가와 묘사 대상을 연결하는 관계가 아니라 선험적이고 형이상학적인 모델이었다. 산도 물도 모두 정형화된 공식에 따라 재현되고, 변형되었으며, 그것은 훈련과 숙련에 따라 완성되었다. 서양의 풍경화 전통도 그러한 측면에서 볼 때 크게 다르지 않다. 중세 이전의 서양의 풍경화에서 자연은 신을 연상시키는 경외의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 그러나 박영학에게 있어서 자연은 그것이 실제라는 점이 중요하다. 작가는 매우 솔직하게 아름답게 느꼈던 경험과 풍경을 그린다고 이야기한다. 대상을 묘사하고 조형적 작업을 하는 일련의 현대적 예술적 행위 가운데 '아름답다' 혹은 '예쁘다'라는 형용사는 이미 구시대의 산물로 치부된 지 오래다. 그러나 산길을 걸으며, 들길을 걸으며 자신이 걸어온 시간과 공간의 괘적을 화면에 담는 방식을 통해서 박영학은 예술가로서의 감성을 진지하게 표현하고자 한다. 기억에 남지 않은 부수적인 것을 생략하고, 아름답다고 기억된 산과 들을 그리는 과정은 느끼고 본다는 예술 행위에 대한 우리의 잊혀진 기억을 되살린다. '보아가는 풍경'이라는 제목의 박영학의 작품들은 관조와 경외의 대상으로서의 자연이 아니라 삶 속에서 경험하고 기억으로 되살리는 시간의 풍경인 것이다.
작가에게 자연은 치유가 된다. 그것은 예술가의 삶을 지속시켜주는 원동력으로서의 치유일 것이다. 바쁜 일상을 떠나 예술가로서의 삶을 가능하게 하는 대상, 그곳이 바로 자연이기에 박영학의 작품에서 자연은 매우 현실적이고 가까운 곳에 위치한다. 화면을 뒤덮은 나무, 나무로 빼곡한 숲은 전통 한국화의 관습적 묘사나 구성의 틀을 극복하고, 독자적인 조형 언어를 향해 가는 지속적 실험의 대상이 된다. 사실적 묘사의 나무가, 양식화 과정을 거쳐, 추상화에 이르는 일련의 과정을 지켜보면서 하나의 대상을 지속적으로 실험해가는 박영학의 풍경은 전통적 소재주의를 넘어 아직도 한국화를 옭아매고 있는 '전통'이라는 짐으로부터 자유로워 질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 김정연
Vol.20101217f | 박영학展 / PARKYOUNGHAK / 朴榮鶴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