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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10_1118_목요일_06:00pm
2010 서울시립미술관 SeMA신진작가지원프로그램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일,공휴일 휴관
살롱 드 에이치_Salon de H 서울 강남구 청담동 31-2번지 Tel. +82.2.546.0853 www.artcompanyh.com
시차적 표시영역 ● 현상을 바라보는 관점에는 언제나 원근이 적용된다. 역사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발생한 무수한 가치들은 결코 필연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만들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앞과 뒤의 구분이 명확하며 그것은 마치 당위를 바탕으로 이루어진 것처럼 위장되어 있다. 나는 이러한 수직적 구조에 의문을 가지며 가치를 수평으로 재배열하고자 한다. QUBICT는 병렬식 연산 단위인 qubit와 정육면체를 의미하는 cubic의 합성어로 평면과 입체의 속성을 동시에 갖는 이율배반적인 가상의 입자다. QUBICT로 만들어진 구조물은 관점에 따라 때로는 평면으로, 때로는 입체로 드러난다. 이는 투시를 제거함으로써 가능한 것으로 모호해진 앞과 뒤의 관계 속에 평면과 입체간에 이루어질 수 없는 접점구역을 만든다. ■ 김용관
1. 관찰자로서 바라보기 ● 김용관은 현상에 대해 여러 질문들을 던진다. 그의 주된 질문은 시각언어가 풀어내지 못하는 개념의 생성에 대한 것인데, 그것은 개념이 만들어지는 구조에 대한 것이다. 그는 하나의 구조(틀) 속에서의 인식과 지각의 영역에 대해 고민하고 연구한다. 그의 이번 작품 『시차적 표시영역』은 사물이나 현상을 바라보는 여러 시점들을 풀어헤쳐 한 화면에 모두 담아내는 것이다. 그는 작품을 통해 서구적 원근법의 틀 속에서 선택되지 못한 다른 시점, 다른 모든 가능한 시점들을 병렬식(그의 표현에 의하면)으로 풀어내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큐빅트(QUBICT)라는 용어를 만들어냈다. 큐빅트는 큐비트(qubit)와 큐빅(cubic, 정육면체의)의 합성어인데 여기서 큐비트는 양자역학에서 쓰이는 용어로 양자의 전산에서 정보의 최소단위를 나타내는 용어이다. 비트(Bit)가 0과 1의 연산 값을 가지는데 반해 큐비트는 0과 1의 값을 가질 수 있을 뿐 아니라 0과 1을 동시에 지닐 수 있다는 특징을 가진다. 이러한 일이 가능한 이유는 중첩, 즉 양자역학에서는 겹치기 상태로 현상이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평소 양자역학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 작가의 말에 의하면 큐빅트로 만들어진 구조물은 관점에 따라 때로는 평면으로 때로는 입체로 드러난다고 한다. 그가 이러한 생각을 어떻게 시각화 시키고 있는지 작품을 살펴보자. 그의 작품 「QUBICT」는 정육면체나 기둥 등 다각형의 블록을 공간 전체에 설치한 것인데, 표면에 사선의 흑백 줄무늬가 인쇄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에셔의 세계와 같이 환영적이고 비현실적인 공간을 표현한 그의 이러한 그림들을 실제 공간으로 확장시켜 놓은 듯하다. 착시효과를 일으키는 어지러운 흑백의 줄무늬를 통하여 그의 의도대로 하나의 시점이 아닌 여러 시점의 공존, 혹은 병렬의 관계를 드러내고자 했다. 보기만 해도 어지러운데 직접 공간에서 체험이 가능할까? 그의 말대로 모호해진 앞과 뒤의 관계 속에서 평면과 입체 사이에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접점의 구역이 만들어지는 것일까? 결과는 예상과는 반대로 실망적이었다. 약간의 어지러움은 있었지만 공간에서의 체험은 직육면체와 기둥들, 그리고 각각의 사선 줄무늬를 각각 인식할 수 있었고 평면과 입체의 중첩, 혹은 시점의 공존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왜일까? 어쩌면 이미 체화된 시각체계와 인식체계의 관점이 너무나 강해서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해석의 한 지점을 확인하게 되었다. 그것은 거리를 유지하고 작품을 멀리서 바라보아야 하고, 또 어느 특정한 시점에 위치하여야만 망막에 맺히는 착시, 혹은 환영의 접점을 비슷하게나마 느낄 수 있었다. 즉, 관찰자의 입장에서 회화의 평면성을 가정하고 그의 작품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평면과 입체의 공존을 평면의 스크린으로 밖에 인식 할 수 없는 것, 그것이 의도의 한계일 수 도 있다. 하지만 양자물리학적인 실재를 표현하고자 하는 그의 의도를 벗어나 순수한 시각으로 작품을 바라본다면, 그의 작품은 관객들의 호기심과 관심을 끌기에 충분하며 꽤 매력적이다. 왜 그럴까? 그의 이야기를 더 들어보자.
2. 에셔의 환영적 공간 ● 네덜란드의 판화가 에셔(M.C. Escher, 1898~1972)는 여러 세계를 넘나들고, 변형과 이율배반, 무한성 등 불가능한 형태를 그림으로 표현하였다. 계단을 오르내리는 <상대성>(1953)이라는 작품은 현실에서 존재할 수 없는 세계를 잘 표현하고 있다. 에셔의 작품은 일정의 법칙이 존재하는데 그것은 현상을 바라보는 각각의 시점들을 모두 하나의 화면에 공존시킨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에셔의 작품이 완전히 비현실적이게 보이지 않는 이유는 각각의 시점에 맞는 중력의 법칙을 고스란히 잘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시점들은 서로 고유한 영역을 유지하면서 공존한다. 에셔의 작품이 환영적이며 정신적이라는 생각은 감상자의 지각체계에서 어느 한 지점, 즉 자신의 관점을 스스로 인식할 때 이루어진다. 다시 김용관의 작품으로 돌아가 보자. 그의 작품이 에셔의 환영적 공간연구에서처럼 이율배반과 무한성, 다시점을 표현하는 것이라 했을 때 그의 작품은 어디에 서있는가? 그의 작품을 바라보아야 할 관점은 명확하게 원근법을 가리키고 있다. 가상공간과 실제공간의 혼란은 원근법에 의해 깊이감이 생겨난다. 그가 의미의 직렬방식을 거부하고 수평적, 혹은 병렬적 가치생산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을 때 그 인식은 바로 그가 부정하고자 했던 직렬의 구조체계에서 출발한다. 즉, 이율배반적인 관점들을 하나의 시공간에 올려놓고자 한 그의 전략이 실패함으로써 스스로 이율배반이 되는 모순을 드러내고 있다. 안타깝게도 자가당착에 빠짐으로써 인식의 한계를 드러낸다. 상대주의의 명제를 참으로 인정할 때 스스로 타당성을 잃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기존의 가치를 부정한 역사적 아방가르드의 운동이 실패로 끝이 나면서 오히려 역사에 편입되어 하나의 가치로 인정받게 되었을 때 아방가르드의 정신은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가? 어쩌면 아방가르드는 미술의 역사에 편승되기 위한 몸부림일지도 모른다. 김용관이 표현하고자 한 평면과 입체의 공존은 회화의 평면 위에서 그 한계를 드러내면서 동시에 회화의 무한한 가능성을 긍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의 작품은 평면에서 끊임없이 가상의 세계를 꿈꾼다.
3. 관점(perspective)의 시작 ● 그의 연구와 실험은 현상을 분석함으로써 시작된다. 그는 하나의 체계를 갖춘 구조틀을 이해하기 위해 현상을 분해하고 직접 그 구조를 사용한다. 그의 이전 작품 「SYLLABRICK」은 음절(syllable)과 완구(brick)의 합성한 용어인데 한글 문자의 시각적 유희를 위한 프로젝트이다. 그는 평행진리를 위한 탐구를 위해 한글의 창제원리를 분석하고 의미를 부여하여 레고와 같이 끼워서 즐길 수 있는 놀이도구를 만들었다. 그는 필연적 당위성이 아닌 우연성에 관심이 있는데 그 이론을 고스란히 장난감에 대입시킨다. 즉, 완구의 끼워짐에 의해 한글의 틀이 자유롭게 상대적인 개연성을 획득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안타까운 것은 그가 한글에 대해 연구하고 실험한 이론이 실제 작품과 크게 연관성이 없다는 점이다. 한글의 시각적 유희를 위해 시작한 작품이 한글의 구조를 완전히 벗어나 한글 구성의 당위성을 다시 생각해보라고 하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한글의 구조위에서 작품을 인식한다. 그의 의도가 어떻든 간에 그의 작품은 시각적으로 상당히 매력이 있고, 관객들에게 즐거움을 전해주는 것은 사실이다. 그가 상당히 지식적이고 개념적이면서 시각예술의 미적 감각을 잃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그가 미술의 영역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내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왜 그가 상대성 이론과 양자물리학, 또는 철학과 가상현실에 대해 연구하고 고민하면서 학문적으로 파고들지 않는가? 정확하게 그는 시각예술을 하고 싶어서이다. 그는 만화를 그리면서 예술적 상상력을 키웠다고 한다. 만화는 텍스트(문자)와 이미지가 동시에 공존하기에 그는 이 두 세계를 모두 드러내고 싶어 한다. 만화의 구조는 컷과 컷을 이루는 네모 틀 사이에 존재하는 비연속적인 빈 공간을 독자가 메워 자연스럽게 연결하게 하는 것이다. 그 사이의 틈에서 독자들은 문자와 이미지가 풀어내는 연속성의 상상을 실현시킨다. 이 구조를 토대로 그의 작품을 살펴보자. 과연 그의 작품을 감상할 때 텍스트(설명)와 이미지를 연결시키는 상상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수 있는가? 감상의 범위를 너무 한정시켜 놓지 않았는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SYLLABRICK」의 구조를 관객들에게 던져주고 즐겁게 즐기라고 했을 때 관객들은 그가 구축해놓은 구조가 아니라 구조 밖으로 나왔을 때 진정으로 즐길 수 있을 것이다. 아니라면 '복잡하다', 혹은 '어렵다'라고 인식하면서 구조의 틀을 쉽게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즉, 공감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말이다. 작가의 제작 의도와 작품, 그리고 관객들의 반응이 함께 소통될 때 훌륭한 작품으로 인정받는다. 왜 고전작품들이 그렇게 오랜 시간 많은 사람들을 끌어당기는가? 거기엔 교감할 수 있는 공통의 감성이 녹아 있기 때문이다. 솔직해져야 한다. 시각예술을 통해 예술가로서 살아가고 싶다면 예술에 더욱 에너지를 쏟아야 한다. 이론적 연구를 하고 싶다면 그에 맞는 실천을 내놓아야 할 것이다. 아니면 반대로 은유적인 방법으로 작품을 위트 있게 재구성해야 한다. 합성어의 남발이 아닌 마음을 끄는 시각언어의 진정성에 관객들은 더욱 감동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먼저 자신만의 독창적인 관점이 필요하다. 하나의 관점(선 이해)이 사물과 현상을 바라보는 출발점이다.
4. 시각예술의 가치 ● 현대예술의 난해함은 종종 난해함을 위해 존재하는 듯하다. 앞서 살펴본 에셔의 작품 중 「뫼비우스의 띠」를 보자. 뫼비우스의 띠는 실제 현실세계에 존재한다. 그러나 뫼비우스의 띠 위를 사람들이 걸어간다고 가정해보자. 과연 제대로 걸어갈 수 있을까? 중력의 법칙이 존재하는 한 쉽지 않을 것이다. 물론 속도의 제한이 없다면 가능하다. 원심력에 의해서 밑으로 떨어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롤러코스터의 즐거움은 속도와 원심력의 원리 속에서 가능한 것이다. 어쨌거나 현실에서 우리는 중력장의 영향을 받는다. 우리가 발을 딛고 있는 이 세계가 중요하다는 말이다. 예술의 중력장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예술의 순수성과 감성언어의 진정성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시각언어의 위대함은 문자언어로 표현하지 못하는 감성의 세계를 드러내고 이를 지각하게끔 하기 때문이다. 위대한 예술가는 철학자보다도 더욱 철학적이다라는 말이 있다. 이는 예술가가 철학을 연구하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만의 독창적인 예술세계의 진정성을 작품으로 표현하고, 그 메시지가 관객들의 감각에 강렬한 자극을 주기 때문일 것이다. 김용관의 작품이 예술의 장에서 이야기되고 이해되어야 할 지점은 바로 관객들과의 감성적인 교감에서 찾아야 한다고 본다. 예술은 지식의 실험장이 아니라 감성의 대화를 위한 따뜻한 손을 필요로 한다. 기존의 가치를 전복시키는 무엇에 대한 대안이 아니라, 잠재된 상상력을 자극하는 신선한 제안을 기대해본다. ■ 백곤
PARALLAX VIEWPORT ● Two images viewed by a spectator from two different perspectives of an object are called parallax. Parallax is shown in diverse realm, such as objects, incidents, notion, and is two different faces of the same phenomenon while not containing each face as a hexahedron. Each viewpoint cannot coexist and is concluded as one face of a thrown dice (a regular hexahedron). However, the problem is that the chosen viewpoint is not inevitable. If a certain decision were made on the crossroads of decisions, that following realm would be alive. I look for another unrevealed perspective in a physical-historical-conceptual realm and reconstruct it in a parallel way. Qubict is a compound word of "qubit", which is an arithmetic unit of a quantum computer with parallel operations, and "cubic", which implies a regular hexahedron. It is a particle of antinomy concurrently possessing the properties of a 2-dimensional and a 3-dimensional. A dice is an object that shows a parallax and eventually is concluded as one face when thrown. The 3-dimensional works of Qubict show diverse possibilities and images before it is decided as one plane, and it has 6 different images of up, down, right, left, front, and back. The 2-dimensional works of Qubict-Parallax Viewport are able to capture three faces of a hexahedron simultaneously since they convey a shape of a regular hexahedron from an isometric projection drawing. In addition, the distance is not applicable to them and their characters of not having any shadow create an illusion that cannot be reproduced as a 3-dimensional. ■ KIMYONGKWAN
■ 서울시립미술관 신진작가지원프로그램 본 전시는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시행중인 2010 SeMA 신진작가 전시지원 프로그램의 선정작가 전시입니다. 서울시립미술관은 전시장 임대료, 인쇄료, 홍보료, 작품재료비 및 전시장 구성비, 전시컨설팅 및 도록 서문, 외부평론가 초청 워크숍 개최 등 신진작가의 전시전반을 지원하는 SeMA 신진작가 전시지원 프로그램을 시행하고 있습니다.
Vol.20101120g | 김용관展 / KIMYONGKWAN / 金容寬 / installation.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