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treme Private Practice

유비호展 / RYUBIHO / 劉飛虎 / performance.installation   2010_0730 ▶ 2010_0812 / 월요일 휴관

유비호_Extreme Private Practice_골프채, 일상탈출메뉴얼이 들어있는 공, 자루_퍼포먼스, 00:13:36_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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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비호 홈페이지_ryubiho.com

초대일시_2010_0730_금요일_06:00pm

관람시간 / 10:00am~07:00pm / 월요일 휴관

갤러리 쿤스트독_KUNSTDOC 서울 종로구 창성동 122-9번지 Tel. +82.2.722.8897 www.kunstdoc.com

백색의 고담시에서 살기 ● 1 모조 욕망 도시는 빛으로 가득하다. 야간비행기에서 내려다본 도시가 그렇고, 실제 도시 속의 삶 또한 빛으로 가득해보인다. 이런 생각은 너무 나이브한가? 반복되는 경제위기와 만성화된 높은 실업율도 또 대기오염과 각종 범죄와 질병, 교통문제와 교육문제와 의료서비스 등 도시당국자들을 괴롭히는 온갖 것들이 소용돌이치는 곳. 모두가 그런 도시에 매혹되어 걷는다. 달짝지근한 하얀 양귀비꽃으로 가득한 곳. 유비호의 개인전이 열리는 쿤스트 독. 전시장 바닥에는 플라스틱 공들이 널려 있다. 두 개의 영상이 상영되고 있다. 한 화면 속 도심의 건물 옥상에는 사내가 골프를 친다. 싸구려 플라스틱 모조 골프공을 부담 없이 사방으로 쳐댄다.

유비호_RyuBiho_Extreme Private Practice_ 야구방망이, 일상탈출메뉴얼이 들어있는 공, 자루_퍼포먼스, 00:24:13_2010

불과 얼마 전까지도 골프가 우리 사회에서 귀족 스포츠로 왕좌를 차지했던 것을 생각하면 한편의 광대 짓처럼 보인다. 그런데 모조골프공을 등에 가득 메고 어두운 도시를 거니는 영상은 오래전 쓰레기를 줍던 망태기아저씨를 연상시킨다. 망태기아저씨는 70년대까지도 활약하던 고물수집상이며 도시의 계층의 최하류층의 대명사였다. 더욱이 아이들에게는 낯선 타인이며 공포의 대상이었다. 물론 아이들이나 어른이나 모두에게 그들은 타자다. 망태기를 등에 멘 그들 자신을 제외하고는. 여기서 마치 오래전 망태기를 둘러맨 고물상처럼 유비호는 밤의 도시를 걷는다. 그 시각 사람들은 집으로 돌아가 가족과 행보한 한 때를 보내거나 야근을 하거나, 친우들과 음주가무를 즐긴다. 작가는 모조 골프공을 메고 걷는다. 지난 시기 유비호의 영상에서 공통적으로 흘렀던 분위기는 어디에도 소속되지 못한 국외자, 공포와 불안의 심리, 어두운 광장과 폐쇄공포증, 그런 심리적 분위기를 양육하는 도시. 대체로 어둡고 심리적이다. 일종의 싱글채널로 보는 느와르풍의 고립감 같은 것이 있었다. 물론 드라마나 스토리가 없는 느와르적 분위기 같은 것. 작가 자신이든(물론 그 자신이 영상에 출현하니) 그저 익명의 사내이든 홀인원을 향해 수없이 골프채를 휘두르나 이 도시에서 그것은 헛수고이다. 쉼 없이 욕망을 불사르고 불굴의 의지를 발휘하나 단지 모조(fake)일 뿐이다. 거짓 행위는 그 대상인 자기 자신을 향한 것인지 이 도시에 사는 익명의 모든 사람들을 향한 것인지 불분명하다. 사실 대상을 명확히 하는 것보다 모조를 통해서 18번 홀을 돌고 홀인원을 하는 것이 무슨 의미를 만드는지가 더 중요해 보인다. 비약하면 영상이 더 이상 의미 있는 행위를 기록할 수 없다는 고백인지 아니면 작가가 허위적 실천 외에는 더 이상 의미 있는 실천을 할 수 없다는 것인지 다른 갈래의 의미들이 고개를 들며 꼬리를 문다.

유비호_RyuBiho_Extreme Private Practice_ 야구방망이, 일상탈출메뉴얼이 들어있는 공, 자루_퍼포먼스, 아이폰 중계방송_2010
유비호_Extreme Private Practice_일상탈출메뉴얼_2010

2 유기적 예술가 ● 최근 몇 년간 작가들 사이에서 '사회적 개입'이 중요한 이슈로 부각되어 왔지만 거의 대부분이 예술의 창작의 문제 보다는 예술의 공유나 공공적 실천에 무게가 더 실렸던 것 같다. 많은 작가들의 작업들은 공공적 의미와 과제의 과부화로 스스로 좌초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미술현장에서는 창작과 비평과 기획의 경계가 상호 삼투하고 모호해지면서 많은 작업들이 소통과 협업의 이름으로 정리되기도 했다. 나 또한 그로부터 자유롭지 못하지만 모든 이들이 대동소이한 상황에 있다고 보였다. 우리 모두는 어쩌면 오래전 많은 이들이 예언했던 언어의 감옥, 아니 그보다 더 무시무시한 도시적 삶과 가치의 감옥에 갇힌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우리 사회가 20세기 이후 갇혀버린 백색의 가치, 유일한 삶, 안식처인 도시라는 감옥 말이다. 이 세계에서 예술가는 타고난 도시민이다. 예술가의 꿈과 욕망과 현실은 철저하게 도시적이다. 예술이 그렇듯 도시 또한 허구적 꿈과 현실의 구조가 유기적으로 뭉쳐있다. 이탈리아의 사회철학자 안토니오 그람시는 지식인들이 어떤 장소나 사람들에 소속되어 있을 때 '유동적 지식인'이라고 불렀다. 그들은 자신의 지식을 팔아 생존하는 뿌리 없이 유동하는 존재이다. 그런데 그람시는 한 사회를 혁명하는 데 있어, '유기적 지식인'을 긍정적 맥락에서 본다. 정통 맑스주의자들에게 지식인은 부르주아의 허위의식을 더욱 견고하게 만들어 주기 때문에 비판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유기적 지식인'은 시민 속에서 현실에 대해 유동적이며 깨어있다. 그러므로 그람시에 따르면 사회를 변화시키는 데에 '유동적 지식인'들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유비호_Extreme Private Practice_일상탈출메뉴얼이 들어있는 공_2010

오늘날 대중과 시민과 일반에 속하지 않는 지식인들이 있을까? 아마도 90년대 들어 주요한 국제 전시들과 중요한 프로젝트들의 상당수가 전통적인 미술사적 조형적 문제에서 벗어나 사회적 개입과 행동을 중시하는 흐름을 떠올리면 비록 허구적 도는 가상적 세계에 발을 딛고 있지만 예술가들 또한 '유기적 예술가'를 지향하는 것처럼 보인다. 뿌리 없이 유동하며 정착하지 못하는 이들이 단지 지식인이나 예술가처럼 특정한 집단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아주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 우리 모두는 '유기적(organic)'이다. 더구나 도시 속에서는 그렇다. 우리가 사회적인 존재라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한 개인의 사소한 행위, 진실하건 또는 허위적이건 그것은 사회적인 것이고 모든 체계와 계급이 유기적으로 연결된 것을 반영한다. 이런 관점에서는 미적 쾌감이란 더 이상 사적인 것을 넘어선다. 니체는 사회적 본능은 쾌감에서 나온다고 한다. 그때의 쾌감이 바로 유기적인 것이며 어쩌면 이러한 사회적 본능으로서의 쾌감이 동시에 미적인 것으로 보인다. 현대예술이 비록 미적인 문제를 벗어난 지 오래되었지만 니체가 말한 쾌감의 문제는 오늘날 욕망의 문제를 떠올리게 하는데, 아마도 한 사회가 욕망하는 것과 관련되어 유기적 예술가들에 의해 재현되는 것이다. 유비호의 작업의 궤적을 따라가 보면 이러한 유동하는 '유기적 예술가'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다만 유비호의 작업이 재현하는 것은 이 유기적으로 사회와 연결된 도시민으로서 존재하기이다. 그것은 선명하고 투명한 개념이나 감정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인공의 태양으로 가득한 백색의 고담시. 작가는 도시의 삶은 나와는 하등 상관없는 듯 도시를 향해 가짜 골프공을 날리고 배회한다. 몸을 구부정하게 숙이고 이리저리, 작가는 마치 빛 한 점 없는 거리를 걷는 것처럼 보인다. ■ 김노암

Vol.20100730g | 유비호展 / RYUBIHO / 劉飛虎 / performance.installation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