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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10_0610_목요일_06:00pm
관람시간 / 10:00am~06:00pm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 난지갤러리 NANJI GALLERY 서울 마포구 하늘공원로 108-1 Tel. +82.2.308.1071 nanjistudio.seoul.go.kr
'먹는다'의 의미 : 권순왕의 근작들 ● 지금 권순왕의 주된 관심사 가운데 하나는 '먹는' 일이다. 그는 지금 "당신이 먹는 것이 당신이다"라는 서양 속담에 몰두해 있다. 예컨대 권순왕의 작업실을 방문했을 때 내가 처음 한 일을 회상하면 이렇다. 그는 내게 종이컵을 절단해서 얻은 둥근 팔레트 형태의 그릇과 물감, 붓을 주고 그 안쪽에 어제 먹은 음식의 이미지를 그려 넣을 것을 주문했다. 나는 기꺼이 그의 요구에 응해 여러 그릇에 전날 먹은 음식 이미지를 노랗게, 파랗게 칠해 그에게 건넸다. 그릇 옆에는 내 이름과 음식의 명칭을 기록해 두었다. 그는 이렇게 주변 사람들로부터 받은 수많은 음식 이미지(그릇)들을 사각의 그림 프레임 안에 부착, 배열해 나간다. 그가 작업을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을 만나는가, 또 그 사람의 반응은 어떤가에 따라 작업 속도는 달라질 것이다. 이러한 축적을 통해 완성된 그림은 여러 사람의 취향과 기억, 손놀림이 뒤섞인 색채의 향연(!)을 우리 눈앞에 선보인다. ● 또 이런 예도 있다. 그는 둥글고 납작하며 돌처럼 단단한 형태를 만든 다음 그 위에 짙은 갈색을 칠한다. 그러면 그 단단한 형태는 초콜릿처럼 부드럽고 달콤해 보인다. 그는 이것들을 작업실 책상 위에 펼쳐 놓았다. 그것은 먹음직스러워 보인다. 그러나 이 느낌은 그 위에 덧붙은 정치가들의 이미지들을 확인하는 순간 전혀 다른 느낌으로 돌변한다. 부드러운 것과 단단한 것, 달콤한 것과 씁쓸한 것이 충돌한다. 이렇게 '먹는' 행위를 정치적인 이슈와 관련짓는 예는 또 있다. 그의 근작들에는 타미-플루나 촛불-소고기 파동처럼 먹는 일과 관련된 정치적인 이미지들이 빈번히 등장한다.
이렇게 권순왕의 근작들에 나타나는 '먹는' 행위와 관련된 이미지들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먹는다'는 말의 함의를 진지하게 헤아려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가령 우리는 인스턴트 식품을 배격하고 유기농산물을 먹는 일을 '잘 먹는다'고 표현한다. 이렇게 잘 먹는 삶이 바로 웰빙(well-being)이다. 또 우리 가운데 일부는 과거 입시에서 더 나은 점수를 위해 영어사전을 먹었다. 큰 회사가 작은 회사를 합병할 때도 먹었다는 표현을 쓴다. 그러니까 '먹는다'는 말은 우리 사회에서 자기 외의 존재자들을 갖가지 방식으로 자기에게 기여할 수 있도록 만들어(타자를 자신에게 흡수하여) 자기 존재를 좋게 하는 일을 함의한다. ● 그런데 권순왕은 이런 종류의 함의를 못마땅해 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에게서 이런 종류의 '먹는' 행위는 '잘 먹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잘 먹는다는 것, 곧 웰-빙(well-being)은 잘(well) 존재함(being)의 문제다. 여기서 잘(well)은 선(善)의 문제다. 타자를 자신에게 흡수하는 식으로 먹는 사람은 세상의 모든 것을 자기 소유의 금으로 만들고 영원한 고독에 빠진 마이다스 왕처럼 될 것이다. 그는 행복할 수 없다. 그러면 잘 먹는 자는 어떤 존재인가. 그는 무엇보다 타인의 '먹음'에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이다. 더 나아가 그는 "내 입에 들어갈 음식을 가져다 타인을 잘 먹이는 자"다. 나는 배고프면서 타인의 허기를 달래는 사람, 베푸는 사람은 행복하다. ● 철학자 서동욱의 표현을 빌면 이렇게 베푸는 사람은 '마음대로 다룰 수 없는 존재의 타자'를 영접하는 사람이다. 밤늦게 배고픔에 우는 아기를 따뜻하게 품고 젖을 먹이는 부모의 마음이 그러할 것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타자를 자기 마음대로 다룰 수 있다고 믿는 마음이다. 그 마음이 쌓은 벽은 보이지 않지만 단단해서 좀처럼 깨트리기 힘들다.
벽을 무너뜨리고 존재의 타자를 영접하는 사람은 이질적인 타자-나와 다른 너-를 수용할 줄 아는 존재다. 그 결과는 조각 모음 같아서 부드럽게 연결된, 일관된, 한눈에 명확하게 파악되는 전체와 대립한다. 즉 그는 편재하는 총통의 목소리에 응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익명적 다수의 행태가 못마땅하다. 하여 그는 어긋난 중첩, 병렬을 자신의 어법으로 수용한다. 타자와 나 사이에 분리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 분리는 부정될 것이 아니라 긍정될 것이다. 그의 말을 빌면 "현재의 이미지는 틀어진 벽의 각도에 따라 새롭게 해석"되어야 한다. 이러한 작업이 궁극적으로 나와 타자의 행복한 합일로 이끌어질 수 있을까? 문제는 그 분리, 틈을 악랄하게 이용하는 세력이 항상 존재한다는 것이다. 또한 작가 자신이 그것들을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 조율하거나, 이해를 통해 개념에 매개시킬(그리하여 그것을 자신에게 흡수할) 가능성이 항상 존재한다. 다시 그의 이미지를 보면 동그라미들은 서로 겹쳐져 홀(hole)을 만들어낸다. 그 홀 깊숙한 곳으로부터 타자의 흔적이 베어 나온다. 또는 총통의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고통받는 타자의 목소리와 고압적인 총통의 목소리가 동시에 거기서 함께 들린다는 것. 그는 타자의 목소리에 응하면서 총통의 목소리를 부정하고자 한다. 그것은 구성하면서 동시에 파괴하는 일이고 또한 파괴하면서 새로운 구성을 모색하는 일이다. 그것은 어쩌면 가장 아름다운 만찬을 꿈꾸는 일일 게다. 아무쪼록 나와 타자, 그리하여 우리 모두가 잘 먹고 잘 살 수 있기를! ■ 홍지석
물질과 속도의 시대에 우리는 얼마나 앞을 보고 가는가? 또한 무엇에 의해 움직여지는가? 기억상실증에 걸린 사람은 부분적으로나 전체적으로 자신의 과거를 기억하지 못한다. 이런 환자들의 특징은 과거를 모름과 동시에 미래를 계획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내일에 대한 플랜이 없고 앞날을 예측을 할 수 없기 때문에 미래가 없게 되는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본인은 역사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고 그 중에서 근대사의 이미지나 역사적 사건에 주목 하였고 그런 이미지들은 물질의 역사였다고 보게 되었다. 그런 물질의 벽은 분단과 내부적인 벽을 객관화시켜 드러내 작업을 하게 되는 배경이 되었다. 그런 내부적인 벽을 어떻게 드러낼 것인가와 어떻게 깰 것인가가 최근 몇 년간의 주제였다. ● 내가 무엇을 먹는다는 것을 안 다는 것은 나의 본질에 다가서는 것이요. 작은 나의 존재를 확인하는 것이다. "어제 먹은 것을 기억하라"고 하는 문장에서 중요한 것은 나의 물질에너지는 어디서 오는가를 아는 과정에 있게 되는 동시에 어제 한일을 생각하라는 것이고 그 공간을 다시 가보는 시간의 탐험이 되는 것이다. 속도의 시대에 작은 어제를 생각하는 것은 나의 가까운 역사를 아는 것이요. 나의 미래를 설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당신에게 어제 무엇을 먹었는가 묻는다. 그런 다음 배열의 과정에서 내가 기록한 컵의 밑 부분을 이어 나가다가 누군가의 기록을 붙일 때는 한 칸의 공간을 뗀다. 그리고 다시 타자가 기록한 것을 붙여나간다. 이러한 과정은 나의 과거와 만나고 당신의 과거와 만남으로서 소통하게 된다. 이때 나타나는 것이 나와 타자가 만나는 부분이다. 나와 당신이 만나서 만들어내는 공간은 너와 우리를 가르는 단절이 아니고 시간 속에서 이루어지는 지속적인 소통의 영역이 된다. ● 브리아 샤바랭의 "당신이 먹은 것을 말해보라 그러면 당신이 누구인지 말해 주겠다." 를 인용하여 어제 먹은 음식들을 기록하고 역사적 논쟁의 인물들을 먹는 것에 은폐시킨다. 이러한 과정은 시간속에서 이뤄진 사건들을 다시 삼킴으로서 그 시간들을 지연시키는데 있다. 어제를 기억해 기록한다는 것은 기억상실증에 걸린 사람이 떠도는 이미지를 조합해 내는 것만큼 중요한 일이며 내일을 볼 수 있는 밑그림일 수 있다. 먹는 음식에 먼지가 있거나 가시가 있다면 쉽게 먹지 못할 것이다. 필름 이미지를 확대하거나(맥아더와 히로히토), 대립된 이미지(소와 촛불)를 동시에 드러내거나, 초콜렛처럼 가장한 것에 마치 불순물처럼 보이는 역사적 인물이미지를 전사한 것(지속적인)은 이것들을 쉽게 먹지 못하게 하는 한 가지 장치일 뿐이다. ■ 권순왕
Vol.20100616f | 권순왕展 / QWONSUNWANG / 權純旺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