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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9_1223_수요일_06:00pm
청계창작스튜디오 2기 입주작가展
주관/주최_서울시설관리공단 후원_서울시
관람시간 / 10:00am~07:00pm
청계창작스튜디오 CHEONGGYE ART STUDIO 서울 종로구 청계천로 137번지 관수교 센추럴관광호텔 1층 Tel. +82.2.2285.3392 artstudio.sisul.or.kr
서울시 문화·디지털 청계천 프로젝트 및 시각예술 분야의 창작환경 조성을 위하여 2007년 12월에 개관한 청계창작스튜디오에서 『2기 입주작가』전을 10월 8일부터 12월 31일까지 청계창작스튜디오 갤러리에서 개최된다. 이번 전시에서는 5명의 입주작가(박광옥, 난나 최현주, 정승, 김정표, 강은구)들만의 독특한 시선으로 해석된 다양한 작품세계를 릴레이 개인전을 통해 선보이게 된다.■
을지로의 온기, 또는 냉기 : 강은구의 근작들 ● 조각은 흘러가는 것, 덧없는 것, 위태로운 꿈과 기억들을 고정시켜 영원한 것으로 만든다. 그것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생성하는 것들을, 그래서 사라져 버리기 쉬운 것들을 무감각하고 말없는 질료와 형태에 고정시켜 놓는다. 이렇게 사라지기 쉬운 것들은 조각의 단단한 질료 속에서 피난처를 발견함으로써 우리의 덧없는 삶을 앗아가고 우리들의 연약한 몸을 흩어트리는 시간의 무서운 파괴력에 맞서고 그 나름의 영원성을 획득한다. 그런 의미에서 조각가는 장 그르니에의 말처럼 "영원히 우리들로부터 벗어날 듯한 것의 윤곽을 잡아내고" 그렇게 응결된 것들은 생명의 싱싱함과 행동성을 간직한다. 그런 의미에서 조각은 알베르 카뮈의 말대로 "가장 반항적이고 가장 야심적인 예술"이라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흘러가는 덧없는 것, 사라지고 잊혀질 것들을 단단한 질료와 형태 속에 고정, 응결시켜 영원성을 부여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강은구의 조각 또한 반항적이고 야심적인 예술이다. 그런데 강은구가 고정시키고 싶어 하는 것들은 무엇인가? 그가 내게 보낸 메일의 한 구절. 곧 을지로는 금융권으로 바뀌게 되고, 여기서 일하시던 어르신들은 은퇴하시거나, 다른 곳에서 일을 하게 될 것입니다. 어려서부터 보아왔고, 현재 예술적 모티브가 되었던 정든 을지로 골목들이 사라지는 것에 대한 아쉬움과, 창작스튜디오에서의 마지막인 아쉬움과, 기타 여러 가지 아쉬움들을 표현하고 싶었고...그러니까 지금 강은구가 고정시키고자 하는 것은 곧 사라지게 될 을지로(그리고 청계천)의 풍경이다. 머지않아 사라질 도시의 특정 풍경들을 조각으로 남겨 그 사라짐에 대한 아쉬움을 표현하고 싶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그는 스틸, 스테인리스 스틸 등의 금속판 위에 고층빌딩과 공장이 있는 도시 풍경을 옮긴 뒤 윤곽을 잘라내 일으키는 방법으로 그렇게 한다. 이 방식은 종이에 원하는 형태를 그린 다음 윤곽을 잘라내 만드는 팝-업책 제작 방식과 유사하다. 이렇게 잘려진 네거티브 형태들과 빈틈들에서 형광등 불빛이 흘러나온다. 이로써 강은구의 조각은 어떤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내게 된다. 즉 거기서는 이규현의 말처럼 "딱딱하고 차가워야 할 금속이 따뜻하고 인간적인 소재로, 어떤 면에서는 여리기까지 한 소재로 둔갑하고", 또 이경림의 말대로 "표면의 매끄러움과 차가운 금속성에도 불구하고…온기가 느껴지게" 된다.
그런데 강은구의 작업에 감도는 "따뜻하고 여린 느낌" 때문에 나는 그것을 다소간 비현실적이라고 느낀다. 어떻게 보면 강은구의 작품은 연극 무대 같아 보이기도 한다. 그는 현실에 테두리-경계, 벽, 상자(큐브), 원(圓)-를 긋고 거기에 특별한 조명을 가한다. 이렇게 테두리 없는 시간의 어둠 속에 흡수되어 있을 때는 무의미했던 것들에 문득 어떤 특수한 조명이 가해지고 그 한 조각이 어떤 테두리에 씌어져 분리되면 그로부터 어떤 새로운 의미가 부상하게 된다. ● 그 새로운 의미란 강은구의 작업에 감도는 "따뜻하고 여린 느낌"과 무관치 않을 것이다. 그가 보여주는 것은 주관을 배제하고(또는 배제하려고 노력하면서) 포착한 즉물적인 도시풍경이 아니다. 거기에는 극히 주관적인 감정과 정서의 외피가 덧 씌어져 있다. 그는 풍경에 다양한 삶의 이야기, 그로부터 파생되는 다양한 감정을 담고자 한다. 그는 거기에 자신의 기억과 소망을 개입시킨다. 가령 강은구가 표현한 을지로 풍경에는 거기서 20여년 세월을 샤링집(금속 절단가게)을 운영해 온 아버지에 대한 기억, 그리고 그와 연관된 자신의 다종다양한 심리적, 물질적 경험이 분리불가능할 정도로 결합돼 있다. 그는 (도시에서) "어린아이들이 마음으로 보는 아름다움"을 표현하고 싶었다고 말한다. 이 말을 나는 이렇게 해석한다. 그는 현실을 표현한다. 그런데 그 현실은 어린아이의 시선으로 포착한 현실이다. 좀 더 정확히 그 현실은 작가의 유년기 기억들이다. ● 그런데 프로이트는 기억하는 행위에서 '재생한 과거'와 '상상한 환상'사이의 구별은 명확하지 않다고 한다. 그는 회상과 상상의 산물이 환영의 구별이 명확치 않다는 것을 다음과 같이 명시하고 있는 것이다. "놀라운 일은 유아기의 (기억에서 나온) 장면들이 항상 진실은 아니라는 점이다. 진정코 그것들은 많은 경우 진실이 아니며 그것들 가운데 몇 가지는 (유아기의)역사적 진실과 정면으로 위배된다" 이 말은 강은구의 유년기 기억들과 연루된 작품들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 안데르손의 유명한 동화 『성냥팔이 소녀』를 언급하면 어떨까? 추운 겨울 소녀는 성냥 한 갑도 팔지 못하고 집에 돌아가지도 못한 채 건물 벽에 기대 주저앉아 온기를 갈구하며 성냥 한 개비를 그었다. 빨갛게 타오르는 불빛 속에서 온갖 환상이 소녀 앞에 나타난다. 그렇게 코펜하겐 거리의 텅 빈 벽은 순식간에 영롱하고 따뜻한 크리스마스트리의 환각으로 메워진다. 마지막 환상을 기억하는가. 그것은 소녀를 사랑했던 유일한 사람. 그렇지만 지금은 죽은 할머니의 환상이다. 그러나 성냥은 타들어가며 할머니는 사라져 간다. 해서 소녀는 할머니를 붙들기 위해 성냥 묶음 전체에 불을 당겼다. 그 순간 소녀는 그 어떤 때보다 크고 아름다운 할머니의 모습을 발견한다. 그것은 기억이었을까? 아니면 환각이었을까? 아마도 그것은 기억이기도 하고 환각이기도 할 것이다. 나는 예전에 『성냥팔이 소녀』를 읽었을 때의 묘한 흥분감, 어떤 연민감, 비애감을 강은구의 작업에서도 느낀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단번에 모든 것(판타스마고리아)을 눈앞에 펼쳐놓는 팝-업 형식은 정말 잘 어울리는 형식이 아닌가. ● 추운 밤이 지나고 날이 밝자 사람들은 미소를 띤 채 죽어 있는 소녀의 모습을 발견한다. 그리고 날이 밝으면 을지로의 불빛도 꺼질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 불빛을 그리워하게 될 것이다. 한낮, 을지로를 거닐면서 나는 문득 그 그리움이야말로 강은구가 붙들고 있는 진정한 주제가 아닐까라고 자문했다. ■ 홍지석
Vol.20091226g | 강은구展 / KANGEUNGOO / 姜恩求 / sculptu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