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070719d | 송윤주展으로 갑니다.
송윤주 블로그_blog.naver.com/juice129
초대일시 / 2009_1216_수요일_05:00pm
후원 / 서울특별시_한국문화예술위원회_서울문화재단
관람시간 / 10:00am~06:30pm
갤러리 아트사이드 GALLERY ARTSIDE 서울 종로구 관훈동 170번지 Tel. +82.(0)2.725.1020 www.artside.org
다차원적으로 공명하는 촉각적 기호 ● '문자연(文字宴)'이라는 부제로 열린 이번 전시는 2002년 첫 개인전 이래, 섬유질적인 형상이 주를 이루는 송윤주의 작품들과 비교해 보면 그 어느 때 보다도 활기차다. 종이 위에 안료로 여러 겹 표면 처리를 한 후 긁거나 그려서 만들어진 형상은 바탕과 형태에 대한 실험을 거쳐 잔치로 집약되는 인간사를 들려준다. 작품은 기하학적 형상부터 유기적 형상까지, 그리고 칠한 것이 지워진 희미한 흔적으로부터 화면 밖으로 굴러 나올듯한 입체 형태까지 다양한 층위를 가진다. 이번 전시에서는 문자의 도입이나 인간사의 주요 결절점을 이루는 제의적인 주제를 통해 서사가 적극적으로 도입된다. 서사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글을 쓸 때와 같은 선적 요소인데, 이 요소는 벽화나 전각에서와 같이 붓의 날렵함 대신에 두터운 물질의 저항을 이겨내야 하는 작업의 산물이다. 무엇보다도 선은 동양화의 근본을 이루는 요소이며, 이 전시에서 동양 고대의 상형문자들을 변형시킨 모티브들과 조응한다. 잔치를 주관하는 주인공들의 형상은 가는 종이 뭉치로 만든 모형에서 출발했는데, 그 형상은 '아들 子'의 고대적 형태로부터 온 것이다. 섬유다발 형태로 매듭지어진 다양한 세대의 인간군은 연한 색이 칠해진 평면적 바탕에서 입체적으로 두드러진다. ● '바탕 素'를 주제로 한 첫 개인전 이래, 두텁게 처리된 평면을 긁어서 만든 선의 다발들은, 2006년 공화랑에서의 3회 개인전에 출품된 「素-象」시리즈 등을 통해 바닥으로부터 일어나 이합집산하면서 형상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은 구체적이고 명확한 형태를 가지기 보다는, 식물이나 동물적인 요소들이 내포된 '비결정적 형상'(전시부제)이었다. '비결정적 형상'은 점차 우주선이나 에이리언 같은 그로테스크하고 외계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형상으로까지 변모를 거듭했다. 이번 전시에서는 선의 다발이 만들어내는 다양한 형태들이 내포할 수 있는 의미를 인간의 삶에 적용시킨다. 매듭지어지고 풀어진 다발들은 그 자체로 인간의 희로애락의 표정을 담고 있다. 조형적 형태에 글자가 가세하면서 이중의 공명이 발생하고, 화면은 관객에게 중층적인 독해를 요구한다. 문자를 단지 조형적이고 장식적인 차원에서 배열한 것이 아니라, 작품 내용과 긴밀하게 연관시킨다. 이로서 문자(書)와 그림(畵)의 결합이라는 전통은 새로운 맥락을 부여받는다. 기호화된 인간과 최초의 상형문자인 전서체는 어디서부터 이미지이고 어디서부터 문자인지 알 수 없을 만큼 서로 스며든다. 이러한 스며듦을 통해 형태와 의미는 서로 상승되면서 풍부해진다. 울퉁불퉁한 철선묘가 살아있는 파여진 인간 형상은 입체감이 나고, 그려진 문자의 경우 사포로 갈아 흐릿하게 처리하여 수묵이나 깊이감이 있는 회화적 화면을 연출한다.
가루 안료와 아교로 수십 차례 올려가며 만들어진 층과 주름으로 형성된 물질성은 인간의 감정이나 몸에 공히 적용될 수 있으며, 문자적 이미지가 스며들거나 배어나오는 배경과 함께한다. 한 화면에 다양한 형식들이 어우러져 있으며, 인간 형상 뿐 아니라 문자 역시 손수 만든 모델의 활용으로 다양한 형상에 실체감을 준다. 전시장 1층에는 탄생일, 돌잔치, 결혼식, 환갑잔치, 장례식 등을 주제로 한 작품 7점이, 2층에는 「素-풀기」시리즈 6점과 판화 드로잉 5점이 전시된다. 작품 「함께 나다」는 화면 가운데에 나란히 놓인 두 형상이 쌍둥이처럼 보이는데, 주름은 완전히 반복되지 않지만 거의 유사한 배열을 보여준다. 쌍둥이를 이루는 주름들은 배 발생 단계부터 세포막이 접히는 방식에 따라 유기체의 특성을 하나하나 획득해가는 과정을 연상시킨다. 그 위에는 사람의 염색체 23쌍이 있다. 인간의 기호화는 유전자 코드와도 조응한다. 과학기술에 의해 낱낱이 드러나는 생명의 지도와 마치 클론처럼 보이는 두 개체를 감싸는 것은 새싹의 색이다. 작품 「첫번째 선택Ⅰ」은 아이의 돌잡이 모습이다. 화면 상단에는 돌잔치에 등장하는 목록들이 실루엣으로 뒤엉켜있다. 생애 첫 번째 선택인 골프공은 장수나 출세 외에, 사치스러운 여가생활을 욕망하는 시대의 흐름을 반영하고 있다. 인간은 물론 더불어 등장하는 사물들 역시 두툼한 물질성을 덧입고 있으면서 기호와 형상의 중간적 단계들로 얽혀있다.
작품 「결혼」은 남자와 여자의 만남을 필두로 파생되는 새로운 인간관계와 그것이 형성되는 계기를 표현한다. 주름과 매듭, 그리고 회화성이 강한 문자 등을 이미지화하여 결혼, 그리고 결혼에 고려되는 여러 가지 요인을 복잡한 관계도로 드러내는 듯하다. 작품 「회갑연」에서는 화면 위에 천간(天干)을, 아래에 지지(地支)를 배치하여 무자(戊子)년이 돌아옴을 상징적으로 표현한다. 환갑잔치의 주인공인 노인을 둘러싼 사방에는 춤을 추며 흥겨워하는 또 다른 형태들이 있다. 춤추는 이들은 舞자의 전서체에서 사람이 팔을 벌리고 옷소매에 장식이 달린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라고 한다. 반쯤만 보이는 글자들은 둥글게 배열되면서 노인이 문자들과 흥겹게 놀고 있는 모습이다. 작품 「Oriental cycle」는 지지(地支)가 한 바퀴 돌면 환갑이 돌아옴을 상징적으로 표현한다. 늙을 老가 지팡이를 짚고 있는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는데, 그것은 마치 시계 바늘처럼 자신의 갈 길을 재촉하고 있는 모습이다. 회색조의 바탕과 다른 작품에 비해 많이 풀어진 섬유다발은 늙음의 의미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문자와 형상, 그리고 색채는 중층적으로 작용하면서 작품의 상징적 깊이를 부여한다. 작품 「귀천」은 장례식을 표현한다. 얼키고 설킨 끈으로 형상화된 사람들은 인생의 의미를 집약한다. 죽음은 이 착종된 끈을 끊고 하늘로 되돌아가는 과정으로 보여 진다. 다양한 인간의 감정들을 상징하는 문자들 역시 하늘을 향해 승천한다. ● 2층에 전시된 그림과 드로잉, 판화들은 이전 작품과의 연결고리를 가진다. 실 뭉치 같기도 하며 복잡한 실루엣을 가지면서 여러 모양이 연상되는 「素-풀기」 시리즈와 '분수나무'나 '황금나무' 같은 미지의 것으로 변신중인 「Making-image」 시리즈들이다. 두툼한 화면을 긁어서 만드는 형상은 인간의 실루엣을 떠오르게 하는 묘사적 선이기도 하지만, 그 자체의 리듬과 방향성으로 움직이는 선이기도 하다. 지시대상과 완전히 합치될 수 없는 그것은 묘사이자 표현인 것이다. 그것은 시각적 요소 그자체로도 주목받을 만하며, 「Making-image」 시리즈처럼 자율적 색채와 결합되었을 때 폭발적인 효과를 자아낸다. 그러나 송윤주의 작품에서 선적 요소가 개념과 무관하다면 힘을 받지 못할 것이다. 그녀의 작업은 그리기와 글쓰기기라는 행위를 중첩시킨다. 그것은 단순한 소통을 목적으로 하는 코드도 아니며, 단순히 눈을 즐겁게 하는 이미지도 아니다. 기호에는 살이 붙여지고, 이미지에는 개념적 뼈대가 심어있다. 그것은 명확히 해독되지 않는 불완전한 기호이지만, 단순히 눈을 위한 향연으로 휘발되는 환영도 아니다. 현실이랄 수도 상상이랄 수도 없는 이 중간단계의 이 모호한 실체들은 끝없는 이행 중에 있다. 개념과 연결된 이미지는 구조적 동일성을 갖추고 있지만, 여기에서 '구조란 정적인 개념이 아니라, 구조화 자체'(바르트)이다. ● 이러한 이미지는 바르트(Roland Barthes, 1915-1980)가 말한 바 있듯이, '하나의 체계의 보관소가 아니라, 체계들의 생성단계'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생성은 의미를 고정시키지 않고 끝없이 지연하고 보충한다. 바르트는 만일 의미의 보충이 없다면 예술은 존재하지 않고, 단지 커뮤니케이션만이 있을 뿐이라고 덧붙인다. 물질을 가르는 선묘는 작가가 의도한 이미지를 투사할 뿐만 아니라, 그자체가 손동작에 의한 접촉의 산물임을 드러낸다. 단순히 씌여진 것도 더구나 인쇄된 것도 아닌, 새겨진 것이다. 중층적 표면들을 통과하면서 여러 번 작업한 산물들은 시각 못지않게 촉각에 호소한다. 송윤주의 작품에서 이미지와 의미의 출발이 되는 문자는 시각적 추상화로 고정되기 이전의 시원적 형태의 상형문자라는 점이 중요하다. 거기에는 향후 문자의 추상화에서 벌어진 소리나 육체로부터의 단절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단절은 알파벳이나 한글 같은 표음문자에서 전형적이다. 표음문자는 루소(Jean-Jacques Rousseau, 1712-1778)가 「언어의 기원에 관한 시론」에서 말하듯이, 목소리를 음성적이거나 조음된 성질에 따라 일정수의 기본 요소로 분해하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서 예상할 수 있는 모든 낱말과 음절을 구성할 수 있다. 이러한 글쓰기 방식은 말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분석하는 것이다. 그래서 표음문자는 과학적이라고 평가된다.
그러나 고대의 상형문자에는 더 많은 감각이 동시에 개입되는 복잡한 장이다. 마샬 맥루한(Marshall McLuhan, 1911-1980)은 「구텐베르크 은하계」에서 한자는 말과 시각적 코드로 분리된 것이 아니라고 지적한다. 그에 의하면 글이 상형문자나 표의 문자로 쓰여 지는 것은 하나의 장, 혹은 개인이나 사회적으로 다양한 상황을 스냅 사진처럼 찍은 것이다. 이와 비교하면 과학적인 표음문자의 세계에서는 형식과 내용이 강제적으로 분리되는 것이 보편적이다. 표음문자에 내재되어 있는 것은 반복가능성, 즉 복사성이다. 소리로부터 의미를 추상화하고 소리를 시각적 기호로 전환하는 표음문자가 주어진 후에야, 오늘날 명제의 언명 기술(형식논리)을 창조될 수 있었다. 그것은 아무런 의미 없는 소리에 의미 없는 기호를 연결한 알파벳이란 기호의 힘이며, 그물같이 얽혀있는 5개의 감각의 복합체로부터 시 감각 양식을 분리시킨 데 따른 결과이기도 했다. 그것은 이원론, 원근법, 재현의 폐쇄적 구조, 주체의 시점 등을 차례로 낳았다. 송윤주가 선택한 상형문자는 과학적 기호가 확립되기 이전의 다차원적인 언어의 공명성을 내포하고 있다. 작가는 의식적일만큼 한 화면에 다양한 기법을 구사하면서, 기호가 단지 무엇인가를 지시하는 차가운 추상적 대상으로 환원되는 것을 저지하려 한다. 이를 통해 기호는 다양하게 변형되고 변주된다.
특히 물질의 표면을 가르는 철선이 가지는 촉각성은 인간적인 경험에 내포될 전체적인 상호작용을 내포한다. 작품 속의 촉각적 문자는 신체적 율동과 어조와 정념이 실려 있으며, 그것은 인간의 총체적 감각을 고무하는 축제나 잔치로 승화된다. 작품 속 문자는 명시성, 획일성, 연속성이라는 현대를 지배하는 표음문자의 전형적인 기능을 벗어나, 함축성, 동시성, 불연속성이라는 비문자적인 양식으로 변모한다. 그것은 현대적 문자가 가지는 선형적인 질서를 깨고 화면이라는 하나의 장에서 어우러진다. 그래서 송윤주의 작품은 한순간을 포착한 정지화면이 아니라, 거듭해서 해독되어야할 복잡한 양피지 문서 같은 상징적 울림을 가지게 된다. 이전에 발표된 작업과 보다 직접적인 연결고리를 가지는 2층에 전시된 작품들은 깔대기나 역삼각형 형태가 많이 등장한다. 단지 엉켜진 실타래 같기도 한 그것의 중심부에는 파여진 선들이 밀도 높게 교차되어 있으며, 외곽으로는 복잡한 실루엣을 만들어 낸다. 하나의 불확실한 지점에서 폭발하듯이 선적 형태는 자라나는 듯이 보인다. 선이 만들어낼 형태의 가능성이 무한하듯이, 이러한 형태의 조합은 풍부한 다산성을 가진다. 덩어리는 잠재적인 것으로 웅크리고 있다가 때가되면 펼쳐져 현실적인 것으로 변환된다.
송윤주의 작품에서 잠재적인 것과 현실적인 것은 작품의 두 중심이 된다. 들뢰즈(Gilles Deleuze, 1925-1995)는 「차이와 반복」에서 잠재적인 것과 현실적인 이 두 계열은 끝없이 이어지는 어떤 회로 안에서 서로를 조직한다고 말한다. 양자는 대조되는 것이 아니다. 들뢰즈는 잠재적인 것은 심지어 실재적인 대상을 구성하는 어떤 엄정한 부분으로 정의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구조는 잠재적인 것의 실재성이다. 예술작품은 어떤 잠재성 안에 잠겨있다. 예술작품은 자신의 발생적인 미분적 요소들, 잠재화된 요소들, 배아적 요소들을 통해 형성되는 어떤 구조, 완결적으로 규정된 구조를 끌어들이고 있을 뿐이다. 잠재력을 띤 어떤 것, 또는 잠재적인 것에 대하여 현실화된다는 것은 언제나 발산하는 선들을 창조한다. 잠재적인 것 안의 차이와 반복은 현실화의 운동, 창조로서의 분화의 운동을 낳는다. 가장자리부터 서서히 풀려지는, 또는 상승하면서 폭발적으로 분열하는 실루엣은 물질의 자연스러운 흐름이나 생명의 발생하고 전개되는 과정을 연상시킨다. 마치 씨앗이 그러하듯이 잠재적인 것은 그자체로 어떤 충만한 실재성을 가진다.
그러나 비슷한 기저 면에서 시작되는 선의 운동은 동일성으로 회귀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성을 지향한다. 송윤주의 작품에서 유전자는 완전히 똑같은 인간을 생산하지 않으며, 선의 흐름은 똑같은 패턴을 낳지 않는다. 그것은 「차이와 반복」이 말하듯이 동일한 것의 반복이 아니라, 언제나 차이와 발산, 또는 분화를 통해 현실화된다. 선을 각인하는 반복적인 움직임은 계속되는 불일치를 향하며 재현의 동일성에 대립하고 차이로 가득하다. 그런 상황은 고유한 의미에서 변별적이고 원천적인 어떤 시공간을 전제한다. 물질 위에 직접 새겨진 밀도 높은 선들은 잠재적인 것을 현실화시키는 기본적인 동력이 된다. 분화는 어떤 선들의 창조를 함축하고 바로 그 선들을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다. 송윤주의 작품에서 선은 또한 균열이다. 예술작품은 '자신이 결코 메우지 못하는 어떤 균열로부터 비롯되며 그 균열 주위에서 전개'(들뢰즈)된다. 선은 무엇인가를 구분하지만, 구분을 통해 이어주는 주름이 된다. 주름은 연장과 증식에 의해 만들어진다. 주름은 접힘과 펼침을 통해 자신의 잠재성을 전개 한다. 송윤주의 작품에서 주체와 세계는 모두 주름 잡힌 형태들을 통하여 무한한 계열로 수렴되고 발산한다. ■ 이선영
Vol.20091216d | 송윤주展 / SONGYUNJU / 宋倫朱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