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070620e | 김이수展으로 갑니다.
초대일시_2009_1111_수요일_06:00pm
관람시간 / 10:00am~06:00pm
김진혜 갤러리_Kim.jinhye Gallery 서울 종로구 인사동 149번지 Tel. +82.2.725.6751 www.kimjinhyegallery.com
김이수의 '구조-회화'론(論) : '기억의 집'을 짓다. - 1.'구조-회화'론, 보임으로써 보이지 않음을 설정하기 ● 바넷 뉴만(Barnett Newman)은 시각적으로는 아무 사건도 일으키지, 않은 작업을 통해 사람들에게 자신의 작품을 단번에 받아들일 것을 종용했다. 일테면 그것은 전체가 아니면 아무 것도 아닌 세계였다. 김이수의 회화도 적어도 시각적으로는, 즉 가까이에서 시각 너머의 진실을 확인하기 전까지는 하나의 전일적 회화, 즉 전체 아니면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보인다. 다소간의 마티에르가 인지되는 순간에도, 김이수의 회화는 순백의 공간에 가까운 것으로 보인다.(최근에 조금씩 색이 개입하는 빈도가 늘어나고 있다) ● 하지만, 김이수의 작품은 (많은 미니멀 계열의 작업이 그렇듯)관객들을 자신으로부터 멀리 떨어지게 해 그 전체를 깨닫도록 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김이수의 것들은 반대로 사람들을 가까이로 끌어들이기 위해 만들어졌다. 그것들은 가까이 다가섰을 때 비로소 시각의 이면(裏面), 곧 확인 가능한 틈새들의 매우 촘촘하고 규칙적인 겹들로 이루어져 있는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다.
멀리서 보았을 때 희미하게 선으로 보였던 것들은 실은, 그 이면에 하나의 보이지 않는 깊이를 지니도록 조치된 겹들의 지속이다. 하나의 조형적 사건, 진실이 시각적 부재 안에 감추어져 있는 것이다. 김이수의 회화는 보여짐과 동시에 감추어지는, 시각과 시각의 이면이 공존하는 하나의 세계를 만들어낸다. ● 김이수는 단 하나의 선도 긋지 않았다. 모든 전통적인 회화의 기초가 되는 선긋기는 그 자체로 이미 너무 많은 요인들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너무 표현 지향적이고 재현의 유혹에 열려 있으며, 재료와 노동의 통제하기 어려운 변주로 이끄는 성향이 있다. 자주 불확실성과 변칙의 통로가 되곤 하는 이같은 노출과 개방성이야말로 작가가 '그리기를 좋아하지 않는' 가장 중요한 요인이다.
그런 작가가 (마치 모눈종이처럼)무수한 선을 그은 것으로 알려진 아그네스 마틴(Agnes Martin)(1912~2004) 같은 작가를 자신의 중요한 참조로 제시한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보인다. 하지만, 마틴이 자연을 포함한 시각적 환경 속에서 결코 자신의 느낌에 대응할만한 무언가를 찾을 수 없기 때문에 추상으로 전향했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선을 긋고, 긋지 않고는 부차적인 문제일 수 있다. 마틴과 김이수 둘 다에게 분명한 사실은 "보이는 것이 아닌, 마음속에 있는 것으로 알려진 것"을 보여주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 하지만, 보이지 않는 것을 어떻게 보여준단 말인가? 그것은 진위여부를 떠나 논리적으로 모순이다. 보여주는 그 순간, '보여줄 수 없는 것' 의 명제 자체가 거짓으로 판명나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작가는 보임으로써 '보이지 않는' 것을 형성하는 일종의 '회화적 구조'를 발상해내는데, 그것을 실현하는 방식은 다음과 같다.
종이를 띠 형식으로 잘라 평면의 지지대에 붙이는데 이때 한쪽 모서리만 접착시켜 다른 한쪽은 표면으로부터 들떠 있도록 만들고 다시 다음의 종이 띠를 접착한다. 이와 동일한 과정이 반복될수록, 시각적으로는 아무 사건도 일으키지 않으면서, 지속적으로 그 이면이 확장되어나가는 회화적 구조, 일종의 '구조-회화'가 성취되어가는 것이다. 이 구조는 정확하게 시각적 무위가 지속되는 만큼, 그 속으로 비시각적 차원을 증가시키도록 되어 있는 구조다. ● 김이수의 회화가 보이는 부분을 넘어 보이지 않는 부분을 추구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결벽적으로 시각적 부재를 확인하는 일련의 개념적 기제인 것은 결코 아니다. 그의 회화는 단지 '보이는 세계'에 대한 시각적 거부로서의 차원을 넘어 '시각의 초월'에 해당하는 차원을 동시에 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2. 금욕주의 안으로 난 개방성 ● 회화의 표면은 '표현의 부재'로 덮여있다. 감정은 극도로 절제되어 있다. 회화적 구조가 만들어내는 결과 겹들은 지지대(support) 자체의 질서를 고스란히 따르면서, 그리고 다른 질서가 개입할 여지를 지속적으로 말소시키면서 표면을 더할 수 없을 만큼 금욕적인 것으로 만든다. 그것은 각각의 종이 띠들이 만들어내는 회화의 이면, 보이지 않음, 시각의 초월을 위한 알리바이이자 구조의 일환이다. ● 김이수의 세계는 그 자체를 넘어서는 어떠한 전제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것은 어떤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내러티브의 한 일환이 아니다. 그것을 통해 반드시 완성되어야 할, 그것 밖의 차원은 존재하지 않는다. 지지대에 하나의 종이 띠를 부착할 때, 그 하나의 띠, 하나의 행위가 그 자체로 완성의 일환이며 완성 자체이기도 하다. 완성은 처음을 규정했던 하나의 행위, 하나의 결과 안에 전적으로 수록되어 있다. 종말(Ende)은 태초(Anfang)에 부응한다.
마지막은 처음을, 그것도 전적으로 반영한다. 처음의 의도와 기획에는 부재했던 과정의 소산들, 교란적이거나 훼방적인 요인들의 개입은 허용되지 않는다. 행위가 종료되었을 때, 거기에 처음의 흔적은 너무나도 역력하기 때문에, 관객들은 그것의 끝없는 연장과 확장에 상상적으로 가담할 수 있게 된다. ● 이 세계는 하나의 명백한 일관하는 지향성을 가지고 있다. 그 지향성은 순수하고 순수한 만큼 배타적이기도 한 어떤 것이다. 내러티브, 문학적 구성, 극적 긴장감은 물론, 심지어는 최소한의 시적 리듬조차 이곳에선 배제되어야 할 대상일 뿐이다. 이질적 요인. 일탈성, 임의적 변주는 기획단계로부터 행위의 종료 시까지 개입할 여지가 없다. 우연, 곧 불확실성의 미학은 여기서 추방되어야만 할 어떤 것이다. 마지막까지 어떤 준엄한 일관성이 과정 전체를 관리하고 있다. 모든 것은 철저하게 의도된 가운데 진행된다. 비의도, 계획의 수정, 탈선이 과정에 영향을 미치거나 지배하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과정은 최대한 간결해야 한다. 그래야만 탈계획적 요인이 개입될 여지를 최소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김이수의 세계가 어떤 비의도나 탈선도 허용되지 않는다는 의미는 스스로를 모든 개연성으로부터 유폐시킨 닫힌 세계라는 의미가 결코 아니다. 이 세계가 매우 엄격하게 자신의 노선을 지향하고, 금욕적 태도를 견지하는 것은 분명 사실이더라도, 그러한 읽기는 이 '구조-회화', 즉 그 안에 보이지 않는 구조를 동시에 지니고 있는 회화의 이면을 생각할 때 상대적으로 완화될 수밖에 없다. 이 세계는 밖으로 닫혀있지만, 오히려 안으로 향해 열려있다. 재현적으론 스스로를 닫고 있지만, 구조적으로는 개방되어 있다. 시각적으론 금욕적이지만, 초월을 향해서는 열려있고자 한다. 김이수 자신의 표현을 빌자면, 그는 '기억의 집' -망각의 늪지나 무(無)의 사원이 아니라-을 짓고 있는 것이다. 띠와 또 다른 띠의 사이에서, 결과 결의 그 보이지 않는 사이에 시간이 축적되고, 기억의 저장고가 건축되고 있는 것이다. ● 이 세계를 열린 것으로 만드는 또 하나의 통로가 있는데, 촉각이 바로 그것이다. 촉각은 작가가 시각보다 우위로 여기는 또 하나의 인식기제이다. 즉 질료와의 신체적인 접촉을 통해 훨씬 더 깊이 있게 세계와 대면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김이수의 구조-회화는 행위의 무수한 반복으로 인해 성취된 결과 겹을 만들어낸다. 이것이 그리는 회화가 아니라 만드는 회화며, 눈의 인식적 제한을 훨씬 능가하는 것으로서 손의 미학적 가능성이 반영된 회화이다. 회화적 표현성이 아니라 공예적 감수성에 의해 성취된, 즉 대안적 인식기제로서의 여성적 손노동에 기반하는 따듯한 회화론의 실체이기도 하다. ■ 심상용
Vol.20091110e | 김이수展 / KIMYISU / 金利洙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