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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9_0902_수요일_05:30pm
후원_서울시_한국문화예술위원회_서울문화재단
관람시간 / 10:30am~06:30pm / 토요일_11:00am~07:00pm / 일요일_12:00am~06:30pm
갤러리 그림손_GALLERY GRIMSON 서울 종로구 경운동 64-17번지 Tel. +82.2.733.1045 www.grimson.co.kr
'회화한다'함의 의미, 또는 '자유로서의 회화' - 1. '회화'가 되는 특별한 순간 ● 허미자의 회화가 걸어온 여정을 되돌아보면서 그 길이 어디서부터 시작되었으며 또 어디로 향하는가를 묻게 된다. 작가로서, 그리고 한 인간으로서 그가 '회화'라는 자신에게 부여된 용기(用器)에 그토록 담고자 했던 것은 무엇일까? 적어도 지난 10년 동안 그는 잎으로 덮인 무성한 나무와 앙상한 나뭇가지들을 그렸고, 자주는 아니지만 그것들에 달린 작은 실과들을 그리기도 했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허미자를 아는 사람이라면, 그가 이젤과 캔버스를 들고 들녘을 쏘다니는 풍경화가나 눈으로 본 것만을 스케치하는 사생화가가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일관된 모티브들에도 불구하고, 그가 그려 온 것은 자연(自然) 이 아니다. 그의 회화가 대도시와 그 거리들을 배회하는 상심한 사람들을 다루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더라도, 그렇다고 그의 세계를 단번에 예컨대 환경주의자의 마니페스토와 같은 것으로 규정지으려 들어서는 안 될 것이다. 허미자의 회화를 녹색의 맥락에서 읽는 것만큼이나 어떤 상징체계의 일환으로 간주하는 것 또한 매한가지로 적절치 못하다. 그의 나무와 가지와 잎들은 보이지 않는 다른 세계를 지시하기에는 너무도 그 자체일 뿐이다. 회화의 밖을 말하기엔 그것들은 너무도 회화적일 뿐이다.
어떻든 작가가 어떤 생태적 메시지를 소통시키기 위한 기표로서 자연의 산물들을 차용하고 있지는 않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하다. ● 허미자의 회화 내부에는 사물의 직접성을 조정하는-감추거나 소외시키는- 별도의 기제가 없다. 반드시 소통되거나 설득시켜야 할 어떤 절박한 메시지가 발화되는 것도 아니다. 이 세계는 이따금 중립적인 회색조나 갈색 톤의 뉘앙스를 머금긴 하지만, 굵거나 가는 짙은 검정색의 선들에 의해 주어지는 단정하고 위엄있는 질서에서 멀리 벗어나는 일이 없다. 배경은 경쾌하지만 결코 가벼워보이지는 않는 단아한 하양색이나 미색의 여백이다. 여기 어디에도 거창한 담론을 가장한 강변과 설교, 남아도는 것, 수다, 허튼 소리를 만드는 발성기관은 없다.
허미자의 회화는 설명하려 들지 않는다. 따라서 납득도 요구되지 않는다. 성실한 재현이나 세심한 묘사의 결과라면 모를까, 가지와 잎들이 회화로 실현되는 방식은 직관적인 착상의 그것에 가깝다. 진한 검정색의 가지들은 흐르듯 화면을 가로지르고 서로 교차한다. 잔가지들의 예민한 위치와 방향, 그리고 잎들의 집산(集散)은 치밀한 밑그림과 성실한 채색과정의 산물로서가 아니라, 절반의 자동기술적 실현으로서, 순식간 그 자리에 그렇게 위치된다. 직관적인 붓질로 조율되는 선의 흐름과 맺힘은 놀랍게도 대상을 관류한다. 대상의 특성은 정확하게 포촉되고, 붓의 끝은 그것을 가감없이 실현한다. 그럼에도 그의 붓질에는 대상의 감각적 재현만으론 설명될 수 없는 요인, 곧 대상과의 유사성으로만 뭉뚱그릴 수 없는 단절이 있다.
나뭇가지는 어느덧 붓의 자유로운 운행에 자리를 내어주고, 터치들은 화면을 가로지르고, 교체되고 중첩되면서 자연스럽게 나뭇가지의 재현으로 되돌아간다. 세계를 이루던 경계들이 직관적으로 완화된다. ● 이렇듯, 허미자의 붓질에는 세계와 세계로부터의 자유, 대상의 수용과 저항의 변증적 양가성이 내포되어 있다. 그것들은 재현적인 동시에 탈재현적이다. 그의 선들은 대상에서 출발하지만 대상으로 종결되지는 않는다. 사물과 함께하지만 사물에 속박되지는 않는다. 사물의 정체를 흔들면서도 여전히 사물친화적이고, 재현의 고전적인 교훈을 승계하면서도 부단히 그것에 도전한다. 이러한 세계와의 변증적 상호성에 의해 그의 붓질은 비로소 단지 행위의 차원을 넘어서는 '회화적인' 것으로 거듭나게 된다. 이것이 개념이 현실이 되고, 사고가 회화로 전환되는 놀라운 순간인 것이다.
"예술작품에서 진정 특별한 순간은 개념이 현실로 전환되는 순간, 즉 그 강을 건너는 순간이다." (데이빗 베일즈와 테드 올랜드, David Bayles & Ted Orlend) ● 이 세계의 모든 요인들은 얽매임 없이 스스로를 구현한다. 선은 자유로이 흐른다. 그렇다. 허미자의 회화는 구축되거나 조직되는 대신 흐르는 세계다. 안료는 화면에 새겨진 섬세하게 수평적인 결들을 따라 지나치지 않게 번진다. 가볍게 흐트러진 경계로 인해 이미지의 윤곽은 한 발 뒤로 물러선다. 이야말로 세계의 응고, 사물의 어혈을 풀어내는 회화 고유의 처방이 아니고 무엇이랴.
2. '회화한다'함의 의미, 또는 '자유로서의 회화' ● 앞서 언급했듯, 허미자의 회화는 교란되지 않은 사물의 직접성과 관련되어 있다. 이 직접성, 곧 담론이 아니라 울림이요 설득이 아니라 다가섬인 그것으로부터 듣기 위해서는 신체적인 기관을 넘어서는 다른 기관이 요구된다. 모더니즘의 자율적인 시선은 이를 위해서는 그다지 적절한 기관이 아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만들어 온 함축된 시간의 결을 아우르는 인식과 지속적으로 결부되지 않는다면, 시선은 자칫 피상적 탐미의 무덤에 갇히고 말 수도 있다. 눈만으로는 실현의 이전, 보이지 않는 연대기를 포촉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두 기관의 차이는 대도시가 길러낸 현란한 혼돈의 감수성과 그 무절제와 과잉에 기초한 문화적 소양으론 잘 구별할 수 없다. 이것이 허미자가 그리는 것이 자연이 아니라 '회화'라는 진술의 의미다. 이같은 진술은 일견 지난 세기 '모던 페인팅'의 세례를 받아온 세대에겐 귀에 익은 것으로 들린다. 알다시피 모던 페인팅의 정신은 '회화' 자체가 회화의 궁극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허미자의 회화론은 모더니즘의 그것과 거의 아무런 상관이 없다. 허미자의 회화가 자연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회화 자체를 실현하는 것이라 할 때의 '회화 자체'는 그 자체로 완료이자 궁극인 것으로서의 그것이 결코 아니다. 허미자에게 '회화한다'함은 회화 자체로 구심되는 대신 세계를 아우르는 것이요, 끝이 아니라 출발이기 때문이다. 작가에게 회화는 이미 도달한 세계를 입증하는 것이 아니라, 도달해야 할 곳을 암시하는, 즉 미지의 차원을 열어나가는 장인 것이다.
그렇다면, 그의 회화가 관련되고자 해 온 그 미지의 세계는 어떤 세계인가? 허미자의 회화가 그것에 대해 강론하는 대신, 스스로가 그것의 한 최선의 국면이 됨으로써 그렇게 하고자 했던 그 세계 말이다. 이에 대해 한 가지는 밝힐 수 있는데, 그것은 사물의 경계를 완화하고, 형식과 묘사를 더 흐르게 하고, 터치들을 한 줌의 자유라도 더 머금은 것들로 하려는 그의 부단한 시도들에서 하나의 일관된 방향성이 보인다는 것이다. 그 방향은 인간의 마음 깊이 내재하는 갈망을 충족시키는 것으로 믿어져 왔던 기존의 모사물(simulacre)들에 가장 덜 의존적일 수 있는 어떤 지향으로 이해될 수 있다. 모사물은 진실에 대한 부담감을 갖지 않으며, 어떤 거짓에도 경보음을 울리지 않는다. 모사물은 불확실성을 부정하고 불안을 참을 수 없으므로, 그럴듯하게 보이는 기제들, 깜짝 아이디어, 재치, 효율성, 심리적 안정감, 의문의 부재, 회의의 말소, 확고함 속으로 숨어든 결과다. 기실 얼마나 많은 회화나 조각들이 여전히 스스로를 욕망충족의 모사물화하기 위해 애를 쓰고 있는가. 이런 맥락에서 허미자의 회화가 성립시킨 선의 운용들, 오랜 세월의 검증을 거친 경쾌하게 빠른 터치들, 하나의 획, 자유로운 번짐을 단지 '회화적'인 것으로만 제한하는 것은 금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하나의 선이 그어질 때, 그것에는 세계와 더 나은 세계, 회화의 내부와 외부가, 사물의 경직과 처방으로서의 이미지가 신비로운 방식으로 결부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더 자유로운 세계, 어떻든 현재보다 훨씬 더 자유에 의해 정의될 수 있는 그런 세계에 대한 갈망이 조용히 전체를 이끌고 있기 때문이다. 이야말로 회화가 정화된 인식으로 '투명하게' 만나야 할 어떤 것으로 여전히 정의되어도 무방할 하나의 논거로 삼을만 한 것이 아닌가. ■ 심상용
Vol.20090909h | 허미자展 / HUHMIJA / 許美子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