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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9_0519_화요일_06:00pm
한밭(아마추어 증폭기) 오프닝 공연_07:00pm
작가와의 대화_2009_0524_일요일_03:00pm
후원_경기문화재단
관람시간 / 11:00am~06:00pm
그문화_SPACE OF ART, ETC. 서울 마포구 서교동 400-22번지 2층 Tel. +82.2.3142.1429 www.artetc.org
생성과 소멸의 과정으로서의 창작 행위 ● 사실상 모든 미술은 현실에 비교할 때 메타포이다. 현실이 그 직접성으로 감각되어진다면, 미술은 그 감각에 예술이란 소여가 더해지고 동시에 작가의 의식과 주관이 겹쳐지면서 일종의 발언을 만들게 된다. 이 발언으로만 본다면 미술은 독립된 언어, 즉 언어학자들에 의해 야기된 구조주의에서 독립된 시니피에가 되지만, 그것이 유래한 현실과 의식적으로 병렬 비교상태에 놓고 보면, 미술은 분명 메타포이다. 그러므로 어떠한 이미지도, 하다못해 화면 위에 실수로 떨어뜨린 물감의 자국도 의미를 구성한다. 그리고 이것들은 현실과의 매개나 연관 혹은 연상을 통해 메타포로 우리에게 인식된다. ● 최혜영의 테이프 콜라주도 역시 이러한 범주의 정의 속에서 빠져나가기 어렵다. 그가 구성한 풍경은 현실의 풍경을 연상하게 해줄 일종의 메타포이자, 그런 연관을 위한 열쇠가 된다. 하지만 우리의 의식이 관습적으로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실행하는 연상 작용을 잠시만 끊으면, 그가 우리에게 제시한 화면은 무질서하고 막연하게 남아있는 '붙임'과 '떼어냄'의 행위의 흔적이다. 작가는 바로 '그' 화면에 붙어 앉아 (혹은 서서) 긴 시간을 단순한 노동으로, 즉 붙이고 떼어내는 일로 보냈을 것이다. 추상표현주의가 행위의 결과로서의 예술작품을 주장하고, 더 나아가 행위 자체가 조형원리로서 판단하게 만들었다는 것을 굳이 불러들이지 않더라도 최혜영의 작업은 행위 자체에 주안점을 두고 있다는 사실을 단박에 알게 만든다. 하지만 그의 행위는 단순히 예술적, 그러니까 순전히 자기목적성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이 행위 자체가 다른 이미지들처럼 메타포가 되고 있다는 사실을 필자는 먼저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최혜영의 행위는 그가 세상을 바라보고 인식한 어떤 특정한 현상을 작업이란 방식으로 재현하는 것이며, 여기서 행위는 재현성을 보유한 그리고 그렇게 의미를 구성하는 요소로서 재 정의된다. ● 현재의 많은 구상작가들이 그리기를 일종의 시각적 방법론에 대한 나름대로의 결론과 의식을 표하는 것으로 삼았다면, 유사한 방식으로 최혜영은 자신의 행위, 이제 필자는 이것을 붙이기 혹은 떼기라는 작가의 독창적인 방식에 대해서 이해하고자 한다. 문제는 작가가 취한 방식의 특수성과 그것을 이해하려고 하는 우리들의 공감대를 형성시켜줄 보편성이 얼마나 확보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며, 여기에 더하여 그 형식이 자체적으로 보유한 의미 외에도 작품의 내용과 얼마나 밀접한 상관관계를 맺고 있는가, 아니 형성할 수 있는가에 대한 비평적인 문제제기가 요구된다는 것이다.
풍경을 소비하다 ● 인간은 흔적을 남기는 존재들이며, 이러한 일은 문화라는 이름으로 제도화 되었다. 흔적은 한편으로 고고한 문화적 유산으로 평가되기도 하지만, 때론 지울 수 없는 상흔처럼 현존에 동거하게 된다. 최혜영의 작업은 바로 이 중요하고 거시적인 문화사적 측면을 건드리고 있다. 물론 작가 본인이 그것을 의식적으로 인식하고 있는지는 다른 문제이지만. 다른 작가들이 무엇인가를 남기려는 데에 주력하고 있다면, 최혜영은 바로 이것이 도대체 무엇인가라는 본질적인 질문을 던지는 작가이다. ● 최혜영이 화면에 담아내는 대상은 주로 풍경이다. 그것은 지극히 현대적이며, 또한 일상적인 풍경으로서 사회의 생성과 소멸, 좀 더 리얼하게 표현하자면 삶의 생산과 소비 그리고 폐기의 현장을 담아내고 있다. 현장성은 작업이 지닌 다른 장점이기도 하다. 이 점에서 작가는 사회비판적인 관점으로 대상을 보고 있다고 판단할 수 있다. 하지만 작품에서 직접 드러나는 풍경의 이미지는 사회비판성보다는 다른 측면을 더 강조하는 듯하다. 앞서 형용사로 한번 썼듯이 이미지가 '막연하게' 보이는 것으로 인해 비판적 태도가 일반적으로 동반하는 대상에 대한 명료한 시각을 기대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보다 심미적인 상태로 우리의 감식안을 유도하고 있는 듯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차원에서도 이미지가 지닌 본질적인 정서는 간단하게 해소되어지지 않는다. ● 작가는 무엇을 보여주려는 가? 유효기간을 채우고 이제는 버려져 있는 삶의 현장들인가? 그래서 그 허망한 상태를 보여주며 인간의 사회와 삶을 반성하는 기회를 주려는 것 같지는 않다. 이미지는 미리 언급한 대로 메타포이며, 이것은 직접적인 설명을 대신하려는 창작 의지와 함께 이미지를 (재)구성하는 작가의 조형론이 만들어낸 결과이다. 텔레비전 모니터와 벽면의 야광안료로 우리에게 투영된 지도는 작가의 변형과정의 결과이다. 작가는 지도의 세세한 정보를 인식하는 대신에 지도에 명멸하는 면과 선을 - 어쩌면 이러한 시각은 인상주의자들의 그것과 닮아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 따오고 이것을 모니터와 벽면에 투사한다. 그리고 그것은 작가가 변형한 또 다른 지도가 된다. 여기서 우리는 작가가 어떻게 세상과 사물을 읽어내는 지를 볼 수 있다. 작가의 시각은 순수한 시각행위를 추구하는 것 같다. 여기서 공간이나 촉각적 매개는 더 이상 유력하게 작용할 수 없게 된다. 인식론적 시각도 유보된다. 이러한 시각적 방법론을 인상주의의 순수시각성에 비유하는 것은 무리가 있지만, 적어도 인상을 지식과 혼용하지 않고 직접적으로 받아들이는 이유만으로도 작가의 시각법은 약간 남다른 면이 있다 하겠다. 인상주의의 그것과 비교된다는 것으로 독창적이란 의미는 아니다. 오히려 그들이 지녔던 것보다 더 진보된(?) 시각관을 보여주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고, 작가의 이 방식은 어쩌면 현대의 매우 표면화 되어버린 디지털 시각과도 얼추 유사성을 지니게 된다. ● 풍경은 이제 보여주고자 하는 그 자체가 아니라 도구적인 성격을 지니게 되었으며, 이 도구는 작가의 독특한 행위를 지지해줄 다른 근거가 된다.
생성과 소멸의 무한 인식 고리 속에서 ● 정작 보여주려는 것이 풍경이 아니라, 풍경을 이렇게 만들어 놓은 생성과 소멸의 현상학적인 드러냄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작가는 이렇게 구성된 화면에다가 「생사(生死)동시발생 Co-occurence)」라는 타이틀을 명기하고 있다. 모든 사물에는 삶이 존재한다. 다만 인간의 이기적인 목적의식이 그 삶의 양태를 자신의 편익을 기준으로 단정할 뿐이다. 이런 철학적 질문을 약간 뒤로 미뤄보면, 최혜영이 가져다준 이미지는 편한 풍경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먼저 허물어지고 버려진 장소로서 풍경은 인간의 유용성에 기댄 판단으로는 소멸의 상태이다. 하지만 작가는 여기다 생성의 개념을 겹쳐 놓는다. 이것은 매우 모순적인 발언이지만, 이 두 가지 양태는 이미지의 생성과 현실의 소멸이란 현상을 떠올려 보면 그다지 비논리적인 것만은 아니다. 아니 대상인 풍경 안에서도 소멸과 생성이 동시에 발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즉 유용성의 의미로서의 소멸과 다른 차원의 맥락에서 생성이 그것이다. "파괴된 이미지들과 파편화 된 풍경들"은 "물질의 해체과정"을 내재하고 있다고 작가는 말한다. 하지만 여기서 해체는 또 다른 의미의 생성 혹은 의미의 이동을 말하는 것이고, 그러므로 순환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바로 이 순환성을 이해할 수 있을 때, 최혜영의 작법은 비로소 의미를 획득하기 시작한다. 버려진 풍경은 단순히 여분과 잔여물이 아니라 미래에 사용될 에너지를 가지고 있는 함축물이고, 이것은 또 다른 형태로 생성하고 소멸될 것이다. 이러한 사물의 끊임없는 순환구조는 겉으로 보기에는 매우 느리고 진부하지만, 작가의 행위로 전이되었을 때에는 의미심장한 현상이 된다. ● 작업의 방식인 테이핑은 아무래도 붓이나 다른 도구나 수단에 비하여 거칠고 조악하며, 또한 섬세한 면을 포기해야 한다. 벽에 포스터를 붙이는 일당작부처럼 그 일은 어쩌면 단순한 노동일 수도 있다. 최혜영의 작법은 이 단순함을 특정한 의미로 치환해 놓는다. 단순성은 풍경에 진행된 시간의 모습을 메타포로서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고, 노동을 집약함으로서 얻어질 수 있는 어떤 다른 질서를 예시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작법은 생성과 소멸 그리고 그 반복을 보여주기에 매우 좋은 방식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인식의 순환이 어떻게 행위로 보여질 수 있는가를 실험하는 것이기도 하다.
회화의 형식에 대한 회의 ● 오래 전 나는 그가 대학원 실기실에서 청색 면사 테이프로 자연과 사물을 묘사적으로 재현하는 것을 종종 보았다. 그리고 몇 년 후에 그것의 다른 결과를 확인할 수 있었다. 이전 붓 대신이라는 단순했던 논리가 이제 작업의 정당성을 획득하려는 논리로 비약했음을 볼 수 있다. 우리는 쉽게 회화의 역사가 벽화에서 타블로로 그리고 캔버스로 확산되었다가 콜라주로 일대 혁신을 이루었다는 사실을 미술사에서 재차 배웠다. 물론 이 방식이 지배적이라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것으로 인해 변화된 회화이론은 바로 현대미술의 변론(Apology) 그 자체라고 할 수 있겠다. 콜라주는 지금까지 지녔던 회화의 환각주의를 무참히 깨버렸고, 다른 한편 현대회화의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이상인 평면성을 가능한 것으로 기대하게 만들었으며, 또 다른 한편 오브제를 비롯한 새로운 재료들에 대한 실험을 촉발시켰다. 이 모든 것이 최혜영의 작품을 미술사적 근거로 설명하려는 필자에게 필요한 것이지만, 작가는 자신의 테이프 콜라주를 통해 회화의 형식에 대한 다른 논의를 준비시킨 것 같다. ● 이미지는 그림자이며 흔적이기도 하다. 예를 들면 옷에 든 얼룩은 그것을 발생시켰던 원인에 대한 시각적 기록이 된다. 이런 식으로 최혜영의 테이프는 이러한 흔적을 쫓아가는 일이다. 언급한 것처럼 인상적으로 받아들인 순수한 시각적 감응을 따라서 그것을 다양한 색과 폭 그리고 질감의 면사테이프를 사용하여 재현하는 것은 단순히 외형의 아웃라인을 따라 그리는 고전적 미메시스를 넘어서 그 현실에 가까워지려는 의지를 반영하고 있다. 작가는 오래된 동네의 거리 벽에 남겨진 자국들, 특히 광고지 등을 붙여다 뗀 자국들에 대해서 말하고 있으며, 이런 것들이 시간의 누적과 함께 이루어진 이미지들의 현상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이 정의는 매우 타당한 것이며, 광고지를 비유했지만, 그 스펙트럼을 조금만 넓힌다면, 이것이 우리를 에워싼 전 사회와 환경으로 확대 소급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최혜영의 이미지를 메타포라고 부르는 것은 너무나 타당한 일이다. 하지만 이미지를 구성했던 작법까지 고려대상에 올려놓으면, 이것조차 하나의 메타포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작업이 그가 풍경을 통해 보여주려고 한 생사동시발생의 행위라고 정의해 보자. 그러면 최혜영의 작업은 외부의 대상을 빌어 표현하려고 했던 그 순환적이고 항시적인 변화에 대해 작가의 몸이 연동되어 움직였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다. 작가는 이미지를 만들면서, 즉 테이프를 붙이고 떼어내는 노동과정을 통해서 자신의 의식 속에 생성과 소멸의 순환을 경험하게 되고, 이것을 또한 밖으로 전사시켜 우리에게 간접경험하게 만든다. 여기서 우리는 최혜영이 메타포를 만들기 위해 같은 메타포를 수행하는 중층적인 작업방식을 가지고 있음을 증명할 수 있다. 더 나아가 그의 시각이 행위와 일치하고 또한 만들어진 이미지의 성격과도 일치하는 매우 통일된 작업이라는 사실도 아울러 확인할 수 있다. 그의 풍경은 어쩌면 그렇게 생선 소멸하는 과정과 그와 유사한 방법으로 재현된 작가의 노동과정을 중첩시킨 모습이며, 이것은 현장성을 그대로 전이하려는 노력과 이것을 발언 (혹은 메타포)로 만들려고 한 작가의 의도이자 노력의 결과라고 말할 수 있겠다. ■ 김정락
Vol.20090519d | 최혜영展 / CHOIHYEYOUNG / 崔惠榮 / mixed med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