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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9_0506_수요일_06:00pm
관람시간 / 10:30am~06:30pm
갤러리 도올_GALLERY DOLL 서울 종로구 팔판동 27-6번지 Tel. +83.2.739.1405~6 www.gallerydoll.com
포착된 일상의 풍경 ● 겹을 쌓고 있는 손은 지금까지 실의 특성에 갇혀 재료가 주는 에너지에 익숙해졌고 어느덧 길을 텄다. 접착제의 지저분함을 조심하며 실이 가는 길을 찾아 드로잉을 하고 있다. 하나의 선이 참으로 진지하고 지루한 시간을 목도하게 만든다. 그 시작과 끝은 캔버스를 실로 덮는 일이요, 자신에게 있어서도 놓치고만 재료의 뒤편에 관한 얘기다. 엄마의 무릎에서 손으로 실타래가 감긴다. 화면의 자리이동이 일어나고 있다. 이렇게 작가의 손은 잘 정리하고 꼼꼼하게 화면의 면적을 활용하고 있다. 결국, 어떤 작업에서는 캔버스를 다 덥히고 말테지만 화면에 드러난 형태의 외곽선을 쫓아 다양한 방향성이 다양한 빛살이 된다. 이 글은 실을 가지고 일상을 대상으로 작업하는 이상미의 작업에 관한 내용이다. 그는 그의 손에 거쳐 간 다양한 사물들에 관심을 갖고 있다. 가장 많이 시간을 보내는 작업실의 풍경이 주로 화면에 등장한다. 거기엔 자신이 쓰던 의자, 테이블, 선풍기, 소파, 신발 등이 있다. 그 형태를 따라 실을 붙인 기억을 따라가면 큰 굴곡 없이 성실한 일상이 누적되어 있다. 시간은 실과 같고 그 실은 그늘을 갖고 있다. 이 그늘이 사물의 무게를 만들어 실재하도록 한다. 정확하게 보면, 이미지 속에 실재는 사물이 아니라 사물을 형성하는 가냘픈 오브제였다. 사물은 오브제와 오브제가 마주하는 지점, 기억의 경계에 위치하고 있고 많은 면적에서 사적인 사연이 풀칠되어 있다. 여기서 관심이란 시선의 행적이 기록되기 시작하며 감정이 개입하게 된다.
감정은 지극히 가까운 곳, 일상에서 발생하는 마찰과 같다. 일상은 반복되고 있다. 큰 변화가 있기보다는 익숙한 길과 같다. 충격은 전혀 새롭거나 경험하지 못한 것에서 오는 체험으로 그것을 일상적이라 하지 않는다. 또한 일상은 현실이며 사실이다.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꿈과 같지 않고 텔레비전 속에 등장하는 스타들처럼 부유하거나 고상하지 않다. 일상에서 느끼는 감정은 그 어떤 것에 대한 권위를 갖지 않은 채 다만 일상이라는 리얼리티를 반영할 뿐이다. 그렇게 사물성에 고착된 그늘은 시선의 외면에서 '시선의 행적'으로 기록되기 시작한다. 그것은 이상미의 작업에서 진정성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는 익숙한 것에 마음을 두고 하나씩 하나씩 사물을 펼치고 있다. 그 중에도 중요하다 싶은 것에는 색실을 사용하여 구별한다. 그 어떤 것도 소외됨 없이 두루두루 관심을 쏟는다. 이제 화면은 기억을 펼쳐 한 장면이 되었다. 그는 그렇게 성의 없이 우연성을 만들어 내지 않았고 자신과 크게 상관없는 대상에 마음을 두지도 않았다. 자신의 위치를 아는 것에서 시작하여 하루 동안 다시 집으로 돌아올 수 있는 거리만큼의 작업에서 마친다. 이것이 진정한 의미에서 리얼리티가 아닌가. 캔버스 화면에는 실의 드로잉이 있다. 그 드로잉은 이미지를 재현하기 위하여 충실히 화면에 봉사하고 있을 뿐, 시선에 대고 사기를 치지 않는다. 실 끝과 실 끝이 만나는 지점에 보풀거리는 드로잉이 나타난다. 이 드로잉은 실이 만들어 낸 드로잉과 다른 우연찮은 수확이다. 이런 방식으로 평면에서 사물은 발견되며 기억 속 모든 대상은 자신과 관계하고 관계되는 지점까지만 의미와 해석을 갖춘다. 이를 주름(겹을 쌓아 올림)이라 하였다. 이 주름은 사유물에 '단순한 공식의 옷'을 입혀 공론화 시킨다. 누구든 부담 없이 사적인 시선이 가능하면서 드로잉을 쫓는다. '포착'(prehension)이다. 포착된 이미지는 평면이다. 단적으로 말하면, 시선이 이미지를 포착할 때 이미지의 단면을 볼 뿐이다. 그럼에도 그 시선은 장소성을 이미지에게 바라고 있다. 포착은 순간에 가깝고 재현은 지루하다. 어찌되었든 실의 드로잉은 사물의 형태를 강요하면서 상황을 연출하게 되었다. 가방의 손잡이가 갖고 있는 곡선을 따라 실의 드로잉이 화면에 붙는다. 아무리 정교하게 실을 붙인다 하더라도 작가의 손은 자신의 지문처럼 실의 주름을 만든다.
지루했던 이미지의 재현이 순간에 포착되는 시점이 온다. 그것은 달그락 거리는 시선의 소리다. 눈으로 일상의 주름을 만진다. 그것은 감각체계의 변화다. 궁극적으로 일상이 체험되기 위해서는 현실이 되어야 하는데 캔버스 화면은 더 이상 스틸 컷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의 일상을 구성해 내었다. 더군다나 무게를 갖는 사물이 입체가 되어 현실공간에 화면의 일상을 재현하고 있다. 이것이 '진정한 각자의 몫의 해방'인지는 모르겠지만, '다양한 방향성'이 화면을 향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현실공간에 오브제가 등장하면서 실의 드로잉은 감는 것으로 바뀐다. 사물을 감는 드로잉은 그 도구적 기능성을 잃게 하면서 일방적으로 화면을 향하도록 요구한다. 또한 그 오브제로 말미암아 주어진 화면의 기억과 교차되길 바라고 있다. 어쩌면 드로잉이 사물을 취한다고 할 때 사물의 도구적 경험치가 얼마나 소유된 대상화되었는지를 발견하게 한다.
의자를 감고 여행 가방을 실로 감는 행위는 그 사물을 알아가는 작업이다. 안다는 것은 손의 지문으로 대상을 느끼는 살스러운 이해다. 여기서 '형태'의 새로운 의미가 드러난다. 사물은 그 고유한 색을 잃어버린 형태로만 남았고 거기에 감긴 실은 사물의 지문이 되었다. 그 오브제는 평면의 풍경에서 입체로 튀어 나온 중요한 실마리로, 그것은 형태라는 것이며 그것으로 관객은 화면에 참여하게 된다. 사적이지만 누구나 공유할 수 있는 사물의 형태를 통하여 우리의 시선은 다시 화면으로 돌아가게 된다. 비로소 흥미 있는 사실이 발견되었다. 그것은 평면에서의 사물 이미지와 공간에 놓인 사물 오브제에서 오는 유비였다. 이 둘은 동일한 형태를 갖고 어느 하나의 방향으로 포착되어 있다. 전시공간에 있는 의자나 여행용 가방은 평면에서 포착되어 나왔으며 화면이 암시하는 사적 내러티브를 읽을 수 있게 한다. 실제로 의자에 앉지 않아도 시선은 의자에 앉아 테라스에서 커피를 마시며 도로의 풍경을 의식했던,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 아울러 그 시선은 전시공간에 위치한 사물이 화면을 향하여 그(사물)의 정면성을 조아리고 있는 방향성으로 강요받기 시작한다. 모든 것이 '단면'에 대한 고민으로 불거져 나온 것이다. 기억이라는 것 역시 시간의 단면이다. 작가는 실을 풀며 그 주름을 재며 그 거리만큼 기억을 더듬는다. 그의 풍경은 평면이며 단면이다. 단지 실재성을 갖고 있는 단면이기에 사물을 거리와 면적으로 파악한다. 평면이 공간을 활용하고 있으나 벽을 타고 불쑥 튀어 나온 정도에서 그친다. 즉, 일상의 포착이다. ■ 김용민
Vol.20090506f | 이상미展 / LEESANGMI / 李相美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