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mpty Material

조재영展 / CHOJAIYOUNG / 曺宰榮 / installation   2009_0319 ▶ 2009_0402

조재영_COCA COLA_천에 바느질_33×136cm_2009_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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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9_0319_목요일_06:00pm

관람시간 / 09:00am~06:30pm

송은갤러리_SONGEUN GALLERY 서울 강남구 대치동 947-7번지 삼탄빌딩 1층 Tel. +82.2.527.6282 www.songeun.or.kr

비움과 충만 ● 조재영은 조각을 전공했지만, 작품에 글자, 숫자, 돈, 지문, 이파리 같은 가볍디가벼운 소재를 담는다. 캔버스 천이나 트레이싱 페이퍼 같은 곳에 수놓아지고 새겨진 기호들은 지상 위에 우뚝 선 기념비를 지향하는 전통적인 조각의 파토스를 벗어나 있다. 많은 작품에서 보이는 까칠한 표면들은 조각적 노동이 집적된 것으로, 촉각성을 중시하던 이전 작업과 연속적이다. 이 전시에서도 3차원적인 입체 작품이 있지만, 그것은 대부분 2차원적인 것이 집적된 것으로, 기본적으로 평면으로부터 출발한 것들이다. 조재영의 많은 작품이 점과 선으로부터 출발하여 평면이나 부피가 창조된다. 평면은 작업 내부로 보다 용이하게 들어가게 하는 것으로, 집요하게 파고드는 것으로부터 긴장감과 예민함이 발생한다.

조재영_COCA COLA_천에 바느질_33×136cm_2009

'empty material'라는 전시 부제는 비워낸 물질과 차원의 감축, 그리고 이에 비해 강화되는 내밀성을 예시한다. 그러나 여기에서 내밀성이란 반복적 수행성으로부터 파생된 것이며, 작가의 내면 표현 같은 것과는 거리가 있다. 객관성의 상징일 수 있는 물질을 비워내기에 몰두한다는 것은, 객체의 짝패라고 할 수 있는 주체도 비워내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가령 무미건조한 숫자의 나열을 보여주는 한 작품은 시작은 있지만 조직하고 끝맺으려는 의지가 없다. 숫자의 순서는 있지만 단순히 나열된 상태로, 무덤덤하게 지나가버리는 일상의 나날들을 일기 같은 느낌으로 새겨 넣었으며 배열했다. 몇 십일이 지나도 비슷한 패턴이다. 다만 그것을 새기기 위한 가혹한 노동과정 만이 흔적으로 남아있다. 그러나 일상의 모든 순간을 작업으로만 가득 채우고자 하는 의지까지 감추어지지는 않는다. 작가는 같은 방식으로 깃털을 새긴 적도 있다. 숫자나 깃털 같은 대상이 가지는 무미건조함, 가벼움 같은 가치는 종이가 뚫리기 직전의 긴장감과 병치된다.

조재영_WHAT AM I_천에 바느질_99×99cm_2009

그것은 공허함과 가혹함이 교차하는 삶의 질서에 상응한다. 삶과 달리, 예술은 공허함 대신에 충만함이 가능할 수 있지만, 가혹함까지 면제되지는 않는다. 이전에 발표된 작품 중, 니들을 이용하여 캔버스에 도포된 아크릴 물감을 긁어내어 만든 장미꽃 이미지는 아름다움의 이면이 무엇인지 폭로하는 듯하다. 수평적, 그리고 수직적인 차원에서 순서는 있지만 순서의 의미를 탈각시키는 종이 입체 작업은 아래의 좌대와 연결되어 시간이 공간으로 집적되는 방식을 보여준다. 그것은 컴퓨터로 워드를 쳐서 자간과 부호를 다 없애고 글자만 남겨두고 종이에 복사해서, 글자 간격만큼 한 칸씩 줄여나가 마지막에 한 글자가 남을 때까지 쌓아올린 것이다. 한글자만 보이는 면이 맨 바닥 면이 되어 작품 전체적으로는 중심 같은 역할을 하는데, 중심에 오는 단어는 핵심적 의미를 내포하는 것이 아니라, 기계적 프로세스에 의해 임의적으로 결정된 것일 뿐이다. 텍스트는 소설책이나 미술사 등에서 발췌한 글자들로, 읽을 의지만 있으면 읽을 수는 있지만 메시지를 전달하는 글자의 역할이 아니라, 임의적인 기표로 보여진다. 규모와 차원만 변형되었을 뿐, 거의 피라미드를 쌓는 정도의 공력이 들어간다.

조재영_blue paper_지폐_13×13cm_2009

이러한 작업은 미세한 차이를 둔 반복으로, 무엇인가를 재현하는 언어의 기능을 와해시킨다. 고립된 기표는 물질화 된다. 검은 실로 문장이나 단어가 새겨져 있는 작품들은 '나는 무엇인가?'라는 심오한 질문부터 일상의 가벼움을 암시하는 '코카콜라' 같은 단어까지 아우른다. 어떤 글자이든 33×33cm의 정사각형 패널에 기계적으로 안치되어 있는데, 확실한 대답이 불가능한 형이상학적인 질문이나 대중 소비문화의 기표는 어디에 더 강조점을 두는 것 없이, 동일한 비중으로 다루어진다. 여기에서도 대상이나 메시지의 전달보다는 한 땀 한 땀 뜨는 노동의 수행성이 두드러진다. 어떤 내용이든 바느질 하는 순간은 모두 같은 것이다. 조재영은 작품 「scan」에서 가혹한 노동을 수행하는 자신의 몸을 복사한다. 숫자작업처럼, 이미지는 시간의 간격들로서 이루어진다. 손가락 10개의 지문을 찍어 확대 복사해서 판화용 니들을 사용하여 트레이싱 지에 형태를 새겨 넣는다. 다른 재료가 첨가되지 않고도 표현 가능하며 침의 압력만으로 명암이 나오는 이 작품은 평면적으로 보이지만, 조각적 프로세스가 내재해 있다.

조재영_untitled_프린트된 종이쌓기_16×17×112cm_2009

작가는 작품제목처럼 아무 생각 없이 스캔판 위에 올려놓을 때 그냥 지나가는 느낌으로 자신의 몸을 스캐닝 하려 했다고 말한다. 지문들은 자기동일성을 대변하는 형태들이지만 주관의 표현이 아니라, 일련의 흔적이며 기계적 프로세스에 의해 대상을 인식하는 바코드 같은 차원을 가진다. 반복적인 수행성을 따라 객관과 주관을 비워내는 과정들은 가학적이기도 하고 피학적이기도 한데, 이는 돈까지 조각내는 반달리즘적인 행동에 이른다. 작품 「blue paper」와 「green paper」는 각기 천원 권과 만원 권 3-4장을 사용하여 규칙적인 크기로 잘라서 천처럼 짠 것이다. 천원 짜리들은 푸른 색조의 종이로, 만원 짜리들은 녹색 색조의 종이로 변화한다. 이 작품에서 사용된 짜깁기라는 방식은 씨실과 날실이 교차되는 평등 구조로, 가차 없이 조각내서 겹쳐나간다. 제목 그대로 종이쪼가리처럼 만들어 버림으로서, 돈은 물질 그자체로 드러나는 것이다. 그것은 실제에 부응하는 가치를 나타내는 기호의 기능을 삭제해 버림으로서, 돈으로 집약되는 보이지 않는 사회적 삶의 위계질서를 무화시키려 한다. ● 질서를 가장한 채, 삶을 옥죄는 글자와 숫자의 법칙들을 작가가 나름대로 설정한 규칙들로 바꾸어 버림으로서, 실재는 비워지고 가상의 유희가 시작된다. 반석 위에 새겨진 진리 같은, 실재의 견고함과 무게를 떨치고 싶은 것이다. 주관과 객관이 비워진 그 자리에 한 땀 한 땀 이어지는 순간적 행위만이 남게 된다. 그것은 물질과 언어에 묶이지 않은 체험을 지향하는 수행성을 지닌다. 이러한 수행에서 반복은 해체이자 충만 이다. 조재영의 작업방식은 거의 강박에 가까운 반복현상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프로이트가 「쾌락원칙을 넘어서」에서 개념화한 '반복강박'에 가깝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반복, 즉 동일한 어떤 것을 다시 경험하려는 것은 분명 그자체로 쾌락의 한 요소이지만, 쾌락원칙보다 더 원시적이고 기초적이며 본능적이다. 그것은 시간과 공간이 사고의 필수불가결한 형식들이라는 칸트의 법칙을 거슬러, 무의식적 정신 과정이 그자체로 무시간적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무시간성은 삶보다는 죽음의 욕망에 조응하는 것으로, 모든 생명체는 무기물의 상태로 되돌아가는 근본적인 경향을 가진다.

조재영_untitled_트레이싱지에 타공_가변설치_2009

조재영이 숫자나 문장들을 다루는 방식은 삶의 본능처럼 통일체로 구조화하거나 결합시키는 것이 아니라, 죽음 본능처럼 흩어지려는 충동에 가깝다. 그것은 유기체가 발생한 무기체적 바탕, 그리고 자아에 내재한 근본적인 공허와 상실을 은연중에 드러낸다. 그러나 그녀의 작품에서 반복은 죽음본능이라는 부정적 가치를 넘어선다. 그것은 재현의 동일성을 지향하는 같음의 반복이 아니라, 차이로서의 반복이기 때문이다. 질 들뢰즈는 「차이와 반복」에서 반복은 개념 없는 차이라고 지적한다. 그는 프로이트가 전적으로 물리적이거나 물질적인 반복의 모델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죽음 본능을 무기적인 물질 상태로 되돌아가려는 경향으로 해석하기 때문이라고 본다. 죽음본능을 무기물질을 향한 회귀로 파악하는 프로이트의 발상은 삶과 죽음 사이의 갈등에 기초하는 이원론에 완전히 묶여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원론은 표상의 요구들에 종속되어 있다. 생명체가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무생물로 돌아가는 것이 죽음이라면, 그런 규정은 단지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외적 정의에 불과하다. 반면 예술적 반복은 내적이다. ● 예술은 모방하지 않고, 반복한다. 예술은 허상이고 모상들을 허상들로 뒤바꾼다. 예술은 일상적 삶이 표준화될수록, 일상적 삶에서 작은 차이를 끌어내어 유희한다. 여기에서 삶과 죽음은 반대편에 놓이기 보다는 서로 공명하는 관계이다. 들뢰즈에 의하면 반복은 부정 없는 차이이며, 이 차이가 부단한 탈 중심화와 발산의 운동으로 나아간다. 차이는 어떤 반복의 질서로부터 다른 반복의 질서로 옮겨가게 해준다. 차이의 고유한 역량으로서의 반복은 비유사성과 계속되는 불일치를 긍정하고 우연한 것, 다양한 것, 생성 등을 긍정한다. 조재영의 작품에서 반복은 개념적 차이가 아니라, 개념 없는 차이를 지향한다. 기의 없는 기표가 떠도는 작품들에서 반복은 재현의 체계를 해체한다. 실재나 언어를 총체화, 또는 자율화하려는 리얼리즘이나 모더니즘의 기획은 극복 대상이 된다. 동요하는 기호들은 숨어있는 어떤 의미를 들추어내는 것이 아니라, 의미의 재현 그 자체에 균열을 낸다. 반복적인 수행은 지시행위 자체를 문제 삼는다.

조재영_scan_트레이싱지에 타공_44×32cm_2009

조재영의 작품 속 기호들은 사물을 지배하는 명칭으로서의 기호, 요컨대 로고스로서의 언어를 포기한다. 그것은 지시나 소통이기 보다 물질성으로서의 언어이다. 바늘로 찔러진 점이나 선은 글자나 숫자, 지문 등을 보여주지만 좀 더 가까이 보면 흔적들로 나타난다. 정확한 위치가 없는 흔적들은 차이를 보여준다. 실재의 결핍과 부재를 보충하는 것은 무수한 반복적 행위들이다. 여기에서는 불안정하고 불연속적인 운동이 안정된 자기 동일적 고유성을 대신한다. 작가는 자기동일성으로 보이는 것 내부에 타자의 흔적을 각인하는데, 동일자에 대한 타자의 진입은 주체의 위상도 변화시킨다. 단순히 자아를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자아는 무수히 작은 조각으로 쪼개져 산종(散種)한다. 자아는 어디에서나 존재하고 발견될 수 있다. 유한한 자아와 무한한 타자 사이에는 얇은 막 밖에 없는 것이고, 이 사이를 바늘과 침이 반복적으로 왕래한다. 작가는 텅 빔, 바탕 없음, 내맡김과 사라짐을 통해 무한한 타자를 받아들이고, 중심이 비어있는 자유를 지향한다. 반복적 수행 속에서 장소와 시간조차도 없는 어떤 순간의 도래를 기다리는 것이다. ■ 이선영

Vol.20090319c | 조재영展 / CHOJAIYOUNG / 曺宰榮 / installation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