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아를 찾아가는 투명한 여행일지

오정은 회화展   2007_1205 ▶ 2007_1211

오정은_untitled 1_장지에 수채_30×30cm_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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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7_1205_수요일_05:00pm

관람시간 / 10:00am∼06:00pm

학고재아트센터 서울 종로구 관훈동 100-5번지 Tel. 02_739_4937 www.hakgojae.com

정교한 드로잉작업을 하는 오정은의 개인전이 파라다이스 문화재단 후원으로 학고재 아트센터에서 열린다. 세필을 이용하여 일기를 써내려 가듯이 화면을 메운다. 그 안에서 여성 작가 특유의 우아함과 섬세함을 읽어낼 수 있다. 작가들에게 작품활동은 언제나 삶이 전부요, 생활의 중심일 것이다. 그러나 오정은에게 작업은 그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선을 하나하나 그어가는 행위가 생활 현장의 기록과 같은 것이다. 그는 내면을 정화하고 치유하기 위해 작업을 한다. 섬세한 선을 긋기 위해 집중과 몰입의 과정을 거치는데, 마치 마음 속에 엉킨 실타래를 끄집어내어 화면에 옮기듯이 화면을 채워나가는 것이다. 멀리서는 단순하게 색을 입힌 것으로 보이던 원은 가까이 갈수록 복잡한 구조를 드러내게 된다. 순간 전체적 윤곽은 사라지고 현미경의 축적으로 빠져드는 것이다. 오정은은 여성만의 특성을 작가의 정체성으로 삼는다. 여성적이라고 폄하되었던 장식적이고 감성적인 취향들은 작품 속에서 화려하게 드러난다. 여성을 상징하는 소재인 원, 사과, 곡선을 사용하면서 그것이 약하지만은 않음을 보여준다. 오정은의 작품은 감성의 넓은 포용력과 시간의 무한함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오정은_untitled 4_장지에 먹_52×52cm_2007
오정은_untitled 5_장지에 먹_60×60cm_2007

자아를 찾아가는 투명한 여행일지 ● 어린 시절 가지고 놀던 유리구슬 속에는 작은 우주가 있었다. 구슬을 들여다보면 그 안의 작은 기포들과 물감무늬는 갑자기 현실의 축척과 시간을 뛰어넘어 광대한 우주가 되는 착각이 일어나곤 했다. 오정은의 작품을 보면서 또다시 이러한 상상의 나래를 펼치게 된다. 커다란 원, 사과, 꽃 등으로 보이는 형태에 가까이 갈수록 그것은 의미를 잃고, 아주 세밀하게 그러진 곡선들의 리듬에 따라 시선이 춤을 추게 되는 것이다. 그 순간 작가가 그토록 무수한 선들을 그려내었을 방대한 시간을 짐작할 수 있게 되면서, 우주의 광대함 앞에서 느끼는 숭고함과 같은 경이로움을 느끼게 된다.

오정은_untitled 7_장지에 먹, 잉크_130×130cm_2007

액션페인팅이 위대한 작가의 정열적인 제스추어를 기록한 것이라면, 오정은의 작품은 일상을 이 느릿한 선으로 기록한 것이다. 어린 시절부터 반복적으로 그려오던 방식을 작품의 모티프로 사용하였는데, 그것이 작가 자신의 고유성을 나타낼 수 있는 방식이라 생각했다. 사람들마다 고유한 끄적거리는 낙서의 방식이 있게 마련이다. 작가는 이야기를 하거나 다른 것에 집중하면서 무의식적으로 그린 것에서 자신의 고유성을 찾는다. 논리적 분석보다는 오랜 기간 행하여 온 무의식적 반복행위의 과정 속에서 자아의 통일성을 찾아내는 것이다. 이러한 반복적 행위는 치유의 과정이 되기도 하다. 거창하게 인격도야를 위한 도구였던 문인화의 정신을 예로 들지 않더라도, 오정은에게 작업이란 생활 속 정신적 행위이며 내면을 비워가는 작업이다. 이 과정에서 스스로의 여성성에 대해서도 드러내며, 소위 소녀취향이라고 폄하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 예쁘고 화사한 것, 곡선적이며 부드러운 것들에 가치를 부여하고 있으며, 그것들이 강하고 합리적인 가치관에 의해서 손상되지 않기를 원한다.

오정은_untitled 8_장지에 수채_130×130cm_2007

오정은에게 성실한 작가라는 표현은 어울리지 않는다. 그야말로 작품활동이 생활 그 자체인 작가이다. 작품을 부러 계획하지도 않으며, 노동이라 생각지도 않는다. 하루 종일 아틀리에에 앉아서 쉼 없이 붓을 놀린다. 그는 초현실주의자들이 자동기술법(Automatism)이라 부른 방식, 즉 손 가는 대로 유선(fluid line)과 타원을 붓 끝으로 긋는 방식으로 화면을 채워나간다. 그러나 그들이 자동기술법을 통해 작품 속의 자아(Ego)를 지우려 했다면, 오정은은 이를 통해 자아를 가장 잘 반영하는 형식을 찾기 원한다. ● 이렇게 무수히 반복되는 행위로 그려진 선들은 기록되는 순간의 고유성을 지니고 있기에 시간의 기록이기도 하다. 도장으로 찍거나 동시에 그은 선이 아니기에 한 선 한 선이 고유한 의미를 지니게 된다. 이 선들은 곱슬머리, 깊은 우물, 아메바, 배아 혹은 태아와 같은 형태이며, 팽팽한 긴장 속에서 유기적으로 흐르며 순환한다. 더욱 정밀한 시선으로 바라보면 작은 소용돌이 문양들에서 눈을 뗄 수 없게 된다. 그 순간 빠져나올 수 없는 치명적 관능성과 끊임없이 유동하는 생명력을 드러낸다. 언뜻 패턴과 같이 보이는 선들의 엉김 속에서 반복을 발견할 수 없다는 것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선들은 단 하나도 교차하지 않으며 끝이 맞닿아 강낭콩형이나 원을 이루기도 하며 다른 선에 흡수되기도 한다. 선으로 표현된 시간은 끝과 끝이 연결되어 순환의 덩어리를 이루면서 기억과 같은 자기충족적인 시간이 되기도 하며, 때로는 다른 선의 개입으로 더 큰 맥락에 연결되어 전체 화면으로 다시금 시선을 확장시키게 하기도 한다.

오정은_untitled 10_장지에 먹_130×130cm_2007
오정은_untitled 10_2007_부분

전체화면으로 시선을 옮기는 과정에서 방대한 우주를 헤매다가 다시 유리구슬로 돌아오듯 현실로 돌아온다. 현실로 돌아온 시선은 화면 전체를 관조할 수 있게 된다. 가까이서 보면 선들은 모든 화면에 균질하게 채워져 있으나, 멀리서 보면 색의 농담만이 보일 뿐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까지 세밀하게 그려낸 작가의 편집증적인 시간의 기록을 보면서 울렁임마저 느끼게 된다. 그림 속 구조를 앎의 눈으로 바라보면서 세상의 시작과 끝, 만물을 상징하는 만다라를 떠올린다. 다가가서 바라보면 고통스럽고 복잡해 보이던 것들의 실체는, 거리가 멀어지면서 마음 속 고통과 함께 형체가 사라진다. 우리는 오정은의 자아를 찾는 투명한 여행일지 앞에서 그의 긴 여행에 동참할 수 있게 될 것이다. ■ 이수정

Vol.20071208b | 오정은 회화展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