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산 Empty Mountain

이구용 수묵展   2007_1121 ▶ 2007_1127

이구용_빈산_장지에 수묵채색_150×213cm_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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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7_1121_수요일_05:00pm

학고재 아트센터 서울 종로구 관훈동 100-5번지 Tel. 02_739_4937 www.hakgojae.com

순수한 마음과 영혼의 산 ●가을의 타는 단풍산은 숨 막힐 듯한 찬란함으로 가득하다. 대자연이 도처에 현란한 색으로 물들이며 우리들 시선을 압도한다. 모두가 이름난 산으로 순례하는 가을날이라 저마다의 마음에도 단풍이 한창이다. 산은 어디에나 있고, 산은 계절마다 다른 풍경을 보여준다. 어쩐지 가을산은 화려해야 제격일 듯싶다. ●한국화가 이구용의 '산'은 산이로되 자연의 대상을 구현하는 것으로서의 산의 형상이 아니다. '산'은 산이로되 우리가 평소 보아오던 진경이나 명승으로서의 산세가 아니라, 작가의 마음속에 자리 잡은 이상향으로서의 산이다. 이미 '산'을 소재삼아 여러 차례 작품을 발표한 적이 있는 그는 이번 전시회에서는 '빈 산'을 부제로 내재된 심상이 반영된 산의 사계(四季)가 표현되어 있다. 그가 특히 '산'이라는 형상에 마음을 두고 있는 이유는 어린 시절 추억이 실려 있는 고산의 형상에서 신성함과 신비로움이 내면세계에 잠재적으로 담겨있기 때문이라고 밝힌 바 있다.

이구용_산-결_장지에 수묵채색_100×70cm_2007

그는 조부모님을 따라서 선대의 유골과 영혼이 깃들어 있는 산을 자주 찾았다. 전형적인 농촌에서 태어나 성장하였던 그에게 자연은 예술적 감성을 자극하는 대상이었으며 스승이었다. 사계의 다른 느낌, 다각다색으로 변화하는 산의 모습은 그에게 특별한 조형적 매력으로 다가왔다. 세상이 새롭게 깨어나는 듯한 아침의 기운, 그 속에서 매일매일 다른 형국으로 펼쳐진 산의 모습은 그에게는 경이로움이었다. 그런 '산'의 존재는 그에게 추억이 가득하고 좋았던 시절의 소중한 서정으로 평생 자리 잡았다. 그러나 그 '산'을 아름다운 탐미의 대상으로만 되살려낼 것인가.

이구용_산-결_장지에 수묵채색_193×130cm_2007

그에게 '산'은 시각적 인식으로서의 미적 대상에 그치지 않고 궁극적인 자연의 본체에 대한 실현으로서 산의 묘사에 마음이 더 기울어졌다. 그는 다분히 경험적이고 감각적인 미의 인식에서 벗어나 주관적이고 심상적 대상으로서의 '산'을 마음에 세우고 싶었다고 할까. ●이러한 이유로 그는 오랜 동안 '산'을 주제로 다양한 형상을 선보이며 그 '산'의 미학적 완성을 위해 한 걸음 한 걸음 내딛고 있는 것이다. 그의 이러한 생각을 반영하듯 '빈 산'이라는 부제의 작품들은 '비어있음'보다는 '충만함'이 먼저 느껴진다. 작가의 고요한 성품처럼 묵묵하게 펼쳐진 산의 형상은 심지 굳은 산의 정기를 은은히 과시한다. '빈 산'은 '비어있음'으로 무엇인가를 무한하게 가득 채울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빈 산'은 무소유를 의미하기도 한다. 불교에서는 사물에 대한 집착을 버리기 위해 무소유를 가르친다. 물욕이란 가질수록 더욱 채워지기를 갈망하고 버릴수록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고 한다. 동양적 순환의 사고에서 비롯된 음양의 원리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하늘과 땅, 산과 바다, 여자와 남자로 이루어진 세상은 상생의 관계에서 조화롭게 순환되고 있음을 암시한다.

이구용_산-결_장지에 수묵채색_193×130cm_2007
이구용_산-결_장지에 수묵채색_193×130cm_2007

엷은 옥색으로 묘사되고 있는 봄의 '빈 산'은 삼라만상이 생명을 열어가는, 꿈틀거리는 소리로 가득하다. 생명의 색채는 환상으로 가득하다. 생명을 가득 안고 있는 봄의 '빈 산'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환희, 신비로움으로 둘러싸여 있다. 여름의 '빈 산'은 쨍쨍한 여름 하늘의 뜨거운 창공을 감춘 듯 하다. 하늘빛이 산에 어리어 있어 여름산은 정결하고 청정하다. 여름의 신록이 손에 잡힐 것만 같다. 가을의 '빈 산'은 현묘한 노란색으로 가을이 물든 정취를 담아내고 있다. 가을은 어디를 보아도 무르익고 원숙함으로 충만해 있다. 가을 산은 다음 계절을 위해 후 두둑 잎들을 떨구기 전 마지막 안간힘으로 가장 아름다운 색채로 온 몸을 채색하듯 물들어 있다. 겨울의 '빈 산'은 산의 골격을 그대로 드러낸 흙색의 산이다. 온 세상의 살아있는 것들을 모두 보듬어 내려는 꼿꼿함이 형형하다. 능선 위에 펼쳐진 하늘빛은 순수한 영혼의 심상이 투영된 듯 먹의 농담을 잘 살려 묘사하고 있다.

이구용_빈산_장지에 수묵채색_150×213cm_2007

자연의 무위 사고가 투영된 그의 작품은 현묘한 먹의 색감과 그것을 더욱 강조하기 위해 한 번의 묵점에 호분으로 한 번 눌러주고 묵점 한 번에 호분으로 앉혀주기를 여러 차례 반복하면서 산의 무게감을 더하고 있다. 수묵의 표현이 맑고 담박하지만 그의 마음 속 '산'의 골격이나 살집을 표현하기에는 얇은 채색도 거침없다. 그래서 어디에도 없는 '산'이건만 어디서나 존재하는 그런 '산'으로서 위용을 드러낸 것이리라. ●거침없는 선의 필력에서 생동감과 자유로운 선의 묘미를 잘 구사하고 있는 가하면 자유로운 선의 움직임으로 능선, 산줄기 그리고 간간히 묵점을 이용한 만물의 생명체들이 산 전체로 산재되어 신성함을 느끼게 한다. 또한 여백미의 여유가 충만함과 조화를 이루어 신비감이 더해진다.

이구용_산-결_장지에 수묵채색_193×130cm_2007

만물의 생성의 근본은 도(道)라고 한다. 그 道를 이루기 위해서는 無의 상태로 회귀해야 한다. 만물의 有는 無에서 시작되었다. 범우주의 만물은 有에서 생겨났고, 有는 無에서 생겨났다. 즉 천하의 만물은 모두 有를 가지고 생겨났지만 有의 시작은 無를 근본으로 삼고 있다는 것이다. 無에서 一이 생기고, 一은 다시 二를 만들고 다시 二는 三으로 늘어나 만물이 생성된다는 이치와 같다. 그동안 작가는 '산'을 소재 삼아 하나로 시작하여, 그만의 자연 속의 만물을 생성해 가는 것이 아닐까. ●'뜻은 필 앞에 있다(意在筆先)'고 했듯이 이구용에게는 마음이 움직이고 난 연후에 손이, 필이 따라감을 느낄 수 있게 해 준다. 마음과 손이 하나 됨을 보여주는 경지는 엄청난 습작과 내공 아니고서는 이룰 수 없다. 손끝만을 벼려 양산되는 향기 없는 작품이 난무하는 시대에 작가는 서두르지 않고 원래의 마음으로 돌아가고 있다. 정신의 자유로움을 위하여 그 마음속에 공들여 '산'을 쌓아가고 있는 것이다. ■ 정금희

Vol.20071124b | 이구용 수묵展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