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일시_2007_1111_일요일_06:00pm
관람시간 / 11:00am~08:00pm
갤러리 꽃 서울 마포구 서교동 337-36번지 B1 Tel. 02_6414_8840
맹신을 위한 망각적 인간, 호모 오빌리투스(Homo Oblitus) ● 프랑스 소설가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 『파피용 Le Papillon Des Etoiles』은 과도한 발전과 기후 대변화로 인해 파괴 되어가는 지구를 떠나 새로운 행성을 찾아 탈출하는 현대판 노아의 방주에 대한 이야기이다. 태양에너지로 움직이는 햇살 돛 우주범선을 타고 1천년 넘게 여행을 해야 겨우 도착할 수 있는 행성을 위해 14만 4천명의 현생인류가 탑승한다. 새로운 희망의 유토피아를 꿈꾸던 우주선 안에서의 인류는 지구인의 파괴적 행보를 그대로 답습하며 점점 더 추악한 디스토피아를 만들어 나간다. 결국 새로운 행성에 발을 디딘 인류의 후손은 또 다시 지구의 역사를 되풀이할 준비를 한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도대체 우리 인류는 어떠한 성질을 가지고 있는가?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은 인간의 형질과 존재의 본질에 대한 깊은 성찰의 시간을 갖게끔 한다.
인간 호모 오빌리투스(Homo Oblitus), 이 말은 작가 이창이 그녀의 작품에서 만들어낸 가상의 인류에 대한 용어이다. 오빌리투스(Oblitus)는 망각(忘却)을 뜻한다. 작가는 현생인류의 대척적인 용어로 호모 오빌리투스라는 종을 만들어내었다. 현생인류를 학명으로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라고 부른다. 독일의 철학자 막스 셀러(Max Scheler, 1874~1928)는 인간의 지성과 사고를 인류의 본질로 보아 현생인류를 '생각하는 사람'이라고 정의하였다. 이것은 인류의 성질의 근본을 사고와 인식에 두고 있음을 뜻한다. 사고를 하고 인식한다는 것은 또한 기억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인류는 언어를 사용하고 기록하며, 문화를 만들어내었다. 물론 이러한 용어 외에 호모 에렉투스(Homo Erectus), 호모 네안데르탈렌시스(Homo neanderthalensis) 등 여러 인종이 있다. 이러한 인종들은 현생인종과 다른 두뇌와 다른 형질을 가진 다른 종(種)인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아직까지 전혀 모르는 새로운 종들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녀가 만든 가상의 인간 종 호모 오빌리투스는 사실 호모 사피엔스의 또 다른 측면이다. 그녀는 현생 인류의 문명과 역사를 발생, 발전시킨 것이 종의 집단적 이기(利己)와 그것을 유지시킬 망각에 있었음을 주장한다. 즉, 호모 사피엔스가 다른 종들에 가한 폭력과 지배, 공포와 죽임의 기억들을 망각함으로써 자신들의 체계를 유지, 발전시킬 수 있었다는 것이다. 결국 인간은 과거를 딛고 앞으로 향해가는 호모 사피엔스이면서 동시에 호모 오빌리투스인 것이다. 망각이라는 것은 현생인류의 보존을 위하여 끊임없이 살인을 정당화하고 마침내 다른 종의 삶과 죽음을 관장할 수 있는 힘을 가지게 한다. 작가는 바로 이러한 인간의 망각에 대해 다시 한 번 깊게 생각해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녀의 작품은 망각의 인간 종인 호모 오빌리투스의 삶에 대한 동화이다. 그것은 수십 개의 인간 종의 흥망성쇠 속에서 생각하고 또한 망각하는 호모 오빌리투스 인류의 기원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녀의 작품은 시대를 전혀 알 수 없는 과거와 미래가 뒤섞인 태초의 시공간을 드러낸다. 세 작품들로 이루어진 "조용한 흔적기관을 찾아서"의 내용은 대강 이렇다. 고생대 데본기 말기, 최초로 육지에 올라오기 시작한 물고기들이 죽고 살기를 끊임없이 반복하는 풍경 속에서 세 명의 호모 오빌리투스 병사들이 무언가를 찾아다닌다. 병사들은 반은 인간 반은 물고기인 여인을 찾아내어 자신들의 부족으로 끌고 가 연꽃의식을 통해 깨끗하게 정화시키고 축복한다. 그 여인은 상체는 인간이지만 하체에는 아직 바다 속에서의 유영을 흔적기관으로 가지고 있는, 직립으로 바다의 기억을 잊은 인간과는 다른 종이다. 그런 다음 여인을 신성한 제단에 제물로 받치고 집단 예식을 거행한다. 이 작품들에서 작가는 호모 오빌리투스의 사회체계와 생산자, 어린이, 그리고 종교의 다양성을 모두 드러낸다. 5개의 작품으로 이루어진 또 다른 동화 "호모 오빌리투스의 투구"는 성모상과 같은 어머니가 알 수 없는 종의 새끼를 안고 오면서 시작된다. 이 어린동물은 오빌리투스의 아이와 함께 자라면서 오빌리투스 종에 동화(同化)된다. 아이와 어린동물이 성장하여 함께 사냥을 나가 어린동물과 같은 무늬의 동물을 잡는다. 잡은 동물의 시체는 먹고 그 동물의 머리뼈를 씀으로써 이 아이는 오빌리투스 사회의 어른이 된다. 그러나 사실 죽은 동물은 어린동물의 아버지였던 것이다. 오빌리투스 성인이 된 아이는 결국 어린동물의 어머니에게 잡아먹히게 된다.
작가는 이러한 오빌리투스의 동화를 통하여 인간의 탐욕과 이기(利己)가 끊임없이 순환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러한 죽임과 그것을 먹는다는 것은 구강(oral)을 통한 것으로 성적교접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자연사의 순환적 필연성은 새로운 생명을 잉태하고 번식하는 것으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한다.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라는 필연을 유지시키기 위해 스스로 레테(lethe)의 강을 건넘으로써 공포를 망각해왔다. 이러한 망각은 면죄부를 가진 맹신(盲信)의 힘으로 인류의 우월성을 재확인하는 것이다. 이 맹신은 소멸과 탄생을 의미한다. 그리고 인간은 더 많은 교접을 위하여 문명을 맹신하기 시작한다. 인류는 종의 생존에 필요한 죽임보다 더 많은 양의 죽임을 기계화시키고 산업화시켜 소멸에 대한 인간의 공포를 완전히 제거해 버린다. 결국 인간은 시체를 끊임없이 생산해내고 시체로써만 물질의 가치를 매기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 만들어 낸 문명은 총부리를 되돌려 자신을 만들어낸 인간을 공격 목표로 삼고 있다. 과학은 인간의 망각된 이기와 공포를 상기시킴으로써 다시금 인간을 나약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제 인간은 어떻게 할 것인가? 또다시 문명을 소멸시키고 새로운 맹신을 만들어낼 것인가? 작가는 결국 현생인류의 맹신이 바로 망각에 의한 것이며, 이러한 망각을 기억하는 것으로부터 역사가 다시 시작되어야 함을 이야기한다. 그것은 망각된 것들에 대한 인식이며 태초의 시작에 대한 상기이다. 역사가 시작될 때 다른 역사는 끝이 난다. 끝이 난 역사는 기억에서 잊혀지고, 새로운 역사만이 유일한 현재가 되는 것이다. 마치 햇살 돛 우주 범선에서 새로운 지구행성에 도착한 옛 지구인이 지구행성의 새로운 호모 오빌리투스가 되는 것처럼 말이다. ■ 백곤
Vol.20071117g | 이창 회화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