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간격

서윤희展 / SUHYOONHEE / 徐侖熙 / painting   2007_1108 ▶ 2007_1125 / 월요일 휴관

서윤희_Memory Gap 0093_혼합재료_118×92cm_2007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060525a | 서윤희展으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07_1108_목요일_06:00pm

관람시간 / 11:00am~06:00pm / 월요일 휴관

브레인 팩토리 서울 종로구 통의동 1-6번지 Tel. 02.725.9520 www.brainfactory.org

찬바람이 분다. 지난 여름은 어찌나 덥고 길게만 느껴졌는지 한반도가 아열대성 기후로 바뀌어 가는 증거라 한다. 내년부터는 장마라는 말이 사라지고 대신 우기(雨期)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로 했다 한다. 세상이 변하다 못해 날씨도 변했다. 이땅에서 자라 40년을 조금 못 산 사람의 입장에서 참으로 적응하기 쉽지 않다. 때가 되면 비가 오고, 때가 되면 낙엽이 떨어지던 지난날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한데. ● 찬바람이 불고부터 차 생각이 자주 난다. 따뜻한 차나 커피가 유난히 더 그리운 요즈음 서윤희의 작업실을 그려 본다. 1년 내내 차 냄새가 가시지 않을 그 작은 공간에서 작가는 찻물을 계속 우려내고 있을 것이다. 바닥에 비닐을 깔고, 종이나 캔버스를 그 위에 얹고, 여러 가지 농도로 우려낸 찻물과 먹물을 조금씩 그 위에 따른다. 이곳에는 조금 많이, 저쪽에는 조금 적게. 얼룩이 잘 번지도록 손으로 찻물을 밀어보기도 하고, 소나무 껍질 등을 올려서 얼룩을 만들기도 한다. 그윽한 차 향기 속에서 물이 마르기를 기다리고, 또 다시 찻물을 붓고 말리기를 반복한다. 근간에는 차나 커피, 먹과 같은 재료를 넘어서 전통 염료로 쓰이는 다양한 약재를 다려 종이에 색을 낸다. 삼합지를 찜통에 넣어 찌기를 수 차례. 종이는 더 이상 종이 같지 않고, 오래된 가죽처럼 질기고 묵직하다. 옆에선 여러 가지 좋은 향이 나지만 가만히 지켜보기엔 참으로 지루하다. 작업실 밖에서는 실험적인 현대미술이라는 명목 하에 온갖 종류의 작품이 쏟아져 나오는데 이곳에서 완성된 그림을 만나려면 많은 시간과 인내가 필요하다.

서윤희_Memory Gap 108_혼합재료_147×210cm_2007 송은문화재단소장
서윤희_Memory Gap 108_부분
서윤희_Memory Gap 108_부분

서윤희 작품에서 흔히 이야기 되는 부분은 비어있는 공간이다. 전통 수묵화의 맥을 이어 비어있으되, 실제로 비어있지 않은 여백의 공간. 관람자의 상상력이 투시되는 가장 중요한 공간이다. 하지만 서윤희의 작품에서 비어있는 공간을 단순히 비어있다고 단정할 수 없는 이유는 이미지의 개입 이전의 이 공간이야말로 서윤희 작업의 몸체이자 기원이기에 비어있기 보다 먼저 채워진 화면이 되기 때문이다. 종이가 수분을 머금고, 그 수분이 공기 중으로 증발하는 자연의 순환 과정과 그것을 의도적으로 통제하려는 작가와의 팽팽한 밀고 당김 속에서 서윤희는 어느 정도 색과 얼룩을 통제하는 방법을 찾아왔고, 따라서 이 공간은 작가의 치밀한 구성과 통제가 개입된 하나의 추상적인 공간으로 완성되는 것이다. 다소 우연성이 개입되어 있음을 부정할 수 없지만, 얼룩 하나하나는 추상적 공간 속에서 의미를 부여 받고, 구성의 한 부분으로서 역할을 시작한다. ● 이 추상적 공간은 바로 서윤희 작업을 관통하는 기억의 간격을 드러낸다. 찻물을 우리고, 종이를 염색하는 기나긴 반복 과정 속에서 끝없이 뱉어낸 지난 수많은 이야기들이 차곡차곡 쌓여있기에 이 공간은 결코 비어있지 않다. 너무나 할 이야기가 많아서, 말로도, 글로도, 그림으로도 다 할 수 없기에 계속 쌓기만 한 이 무거운 공간 속에는 지나간 시간이 그대로 응축되어 있는 것이다. 낡아서 헤질듯하지만, 더 질기고 거칠어진 종이는 그 어느 때보다 육중한 기억의 무게를 담기에 넉넉해 보인다.

서윤희_Memory Gap 0180_혼합재료_147×210cm_2007
서윤희_Memory Gap 0728_혼합재료_100×140cm_2007

기억의 공간이 완성되고 나면 기억의 조각들이 화면에 등장하기 시작한다. 손톱크기 보다도 작은 수많은 사람들의 모습은 작가의 기억 속에서 파편적으로 떠오르는 이미지 조각들로서, 작가는 흐트러진 퍼즐을 맞추듯이 하나씩 하나씩 화면에 놓아 본다. 작업실 한 벽을 가득채운 여행 사진 속에서 튀어나온 수 많은 사람들은 이곳 저곳에 화면 위에 놓이지만 그들 사이에는 어떤 공감대도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그 곳에 작가는 없다. 작가인 나는 기억의 주체이며, 화면 속의 세상을 창조하는 중심임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 있지 못하고 멀리서 그들을 바라본다. 개인적인 것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한발 짝 떨어져 존재하는 소극적인 기억이다. 그래서 서윤희의 작업은 가까이서 보아도 멀리 보는 듯하다. 세밀한 묘사인데도 불구하고, 작품 속에 등장하는 사람들이 등을 돌리고 있거나 고개를 숙이고 제각기 일에 몰두하는 모습, 더욱이 표정을 숨긴 그들의 모습이 결코 우연만은 아닌 듯하다. ● 그러던 서윤희의 근작에서 처음으로 작가의 모습이 당당히 등장하였다. 어린 딸의 손을 잡고 어둠 속으로 걸어가는 그녀의 뒷모습에서 그 어둠이 끝나면 별이 총총한 밤하늘이 등장하는 상상을 하게 된다. 어둠 속을 헤치고 나가면, 검은 구름이 걷히고 나면, 밝은 별이 나타날 그 공간은 비어있는 공간이 아니라, 웃음과 눈물과 그리움이 첩첩이 쌓인 가슴속 풍경이다. 작가는 이제 자신의 이야기를 할 준비가 된 듯하다. 보일 듯 말 듯 작았던 많은 이야기들을 뒤로 하고 이제 자신감을 가지고 스스로를 드러낸 서윤희 작업의 앞으로의 행보가 더욱 궁금해진다. ● 작업실을 떠난 서윤희의 작품에서 더 이상 차향은 나지 않는다. 찻물과 약재의 짙은 향을 한껏 머금었던 그 그림은 이제 따스하고 아련한 기억을 품고 새로운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세상이 변하고 날씨가 변해서, 그래서 가끔 적응해가는 것이 수고롭다 해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음을 안다. 내가 지내온 시간과 그 속의 수많은 기억들. 그것을 서윤희의 작품에서 본다. ■ 김정연

Vol.20071113g | 서윤희展 / SUHYOONHEE / 徐侖熙 / painting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