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일시 / 2006_0523_화요일_05:00pm
창동미술스튜디오 서울 도봉구 창동 601-107번지 전시실 Tel. 02.995.0995 www.artstudio.or.kr
서윤희의 삶의 흔적으로서 홍차 얼룩이 주는 허상공간(virtual space)의 의미 ● 1. 새로운 허상공간으로서의 화폭과 미적 가상성의 극대화가 가능한 근거 ● 화폭 일반이란 회화적 소재로 예술화되는 활동공간이다. 이러한 예술적 공간은 일반적인 공간과 구별하기 위하여 틀(frame)에 의하여 구별되며, 예술가의 표현활동 영역이므로 상상(想像)적 유희활동이 자유로울 뿐만 아니라 공간의 허구성을 인정받는다. 요컨대, 화폭의 존재가치는 허상(virtual image)적인 버추얼 스페이스(virtual space)로서 그 공간에 얼마나 많은 상상력의 자질(feature)의 계기를 작위적으로 설정하는가의 문제는 작가의 역량에 달려있음은 자명한 사실이다. 보편미학의 잣대에서 비추어 볼 때, 이는 예술작품에 있어 미적 가상성(美的_假象性..?esthetic semblance..?sthetischer Schein..)의 문제와 맞물리는 것이기도 하며, 이 때 가상(假象, Schein)은 아름다움의 본체인 예술적 진리(Wahrheit)가 직관형식인 감성, 곧 시간과 공간으로 드러나는 방식으로서 이는 예술작품의 불멸의 특성(eternal quality)의 근거가 되기도 한다. 주지하다시피, 예술가는 유예(游藝)의 정신적 상태에서 미적 가상을 극대화할 수 있으며, 이는 인간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으로서 유예의 정신은 동서 상통하기도 하다. 요컨대, 화가는 늘 새로운 허상공간(virtual space)을 제시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창조성(creativity)은 새로움(novelty)의 원리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2. 서윤희의 미적 경험에서 오는 심원(深遠)한 공간인식 ● 서윤희가 그린 화면에는 갑자기 지중해 색 둥근 얼룩 반점이 나타나면서 한편에서는 아주 작은 인물 군상이 등장한다. 작가의 말에 의하면, 이 둥근 타원형의 얼룩은 깊이를 알 수 없는 호수 이미지라 한다. 곧 서윤희가 카나다에서 본 자연풍광에 대한 어떤 인상이 미적 경험으로 반추된 흔적이다. 서윤희의 화면이미지는 신대륙을 행만리로(行萬里路)한 데서 오는 어떤 알 수 없는 크기의 개념을 우리에게 느끼게 한다. 필자의 식견으로는, 작가가 화면에 어떤 크기의 비율(ratio)을 보여주는 가에 대한 작위적 선택도 미적 가치에 대한 판단이다. 왜냐하면 미는 이미 크기(size) 안에 있기 때문이다. ● 예술가의 시간과 공간에 대한 인식은 미적 경험(aesthetic experience)에서 오는 창조적 직관형식이다. 서윤희는 과거의 행복했던 시간들을 공간화하기도 하고, 공간적 차이와 시간의 연기(延期, postponement)의 얽힘을 화면에 심원(深遠)하게 펼쳐놓는다. 여기서 우리는 동양의 산수화가 본질적으로 선사하는 "마음이 막힘 없이 넓게 펼쳐지는 맥락의 사호탕(思浩蕩)한 쾌감"으로서 허상공간을 맛볼 수 있다.
3. 창동 스튜디오 204호 라는 창작 공간 ● 요즘 창동 스튜디오 204호에는 '미풍의 여신(Aura)'이 구석구석 돌아다닌다. 39세의 여류화가는 그녀의 창작 산실에서 화면을 거울처럼 비추어 보면서 화가로서의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반성적 판단을 해 본다. 그곳에는 그녀의 삶에 얽힌 많은 플롯이 크고 작은 얼룩의 흔적과 함께 파노라마처럼 펼쳐져 있다. 그녀의 과거의 시간들은 이미 흘러 사라져 버린 것이 아니라, 그 기억에 대한 시간성은 그녀의 심신에 습기(習氣)로 남아서 살아 움직인다. 그녀의 붓질은 오늘도 한 자루의 붓의 움직임이 다(多)의 파동으로 이어지고, 그 파동이 화면의 전체에 어떤 공명(resonance)을 자아내고 있는 중이다. 문득 옆방의 동료화가들이 그녀의 화면에 나타나기도 하며, 그녀의 아들과 딸이 여러 가지 버전의 장경(場景)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곧 화가는 공간과 시간으로서 대우주 속에 소우주의 상호 인과관계를 그림의 총요(總要)인 경영위치(經營位置)로써 바지런하게 미적 배열을 해 간다. 그 순간 그녀의 과장된 여백은 모든 물을 다 용인하듯이 바다[海]가 되어, 그녀의 자녀들을 유영(遊泳)하게 하기도 하면서 화면은 인간사의 모든 연기(緣起)의 무수한 작용을 다 수용해 버린다. 이처럼 그녀의 허상공간은 보는 이에게 많은 상상을 가능케 한다. 이는 10여 년 붓을 놓았던 서윤희의 내적인 활력이 기거하는 곳, 곧 "고요한 신비스런 심처(深處)(quiet mysterious depths)"에서 품어져 나오는 창작 에너지에서 비롯된 것으로 필자에게 비쳐진다.
4. 시간성의 흔적으로서 얼룩을 그리기에 적합한 예술적 표현 매체로서 홍차의 상징적 의미 ● 티백 홍차를 우려낸 매체는 서윤희의 시간성의 흔적으로서 얼룩이라는 속성을 그리기에 적합하다. 예술적 표현 매체의 적합성 문제를 찾는 일도 화가의 임무이며, 화가의 예술적 판단 작용이 관여하는 일이다. 또한 이는 보는 이에게 즐거움의 원인이 되기도 하는 요소이다. 필자의 식견으로는, 특히 예술의 본질을 충족시키는 임무에 대한 매체에 대한 적합성(appropriateness) 문제는 예술의 한 특질적 근거가 되기도 하며, 이는 작가의 마음을 정합(整合)하게 담아낼 수 있는 심미적 수단이기도 하다. 그녀가 화면을 항상 홍차로 우려내는 이유는 그 속에서 표상 되는 얼룩들은 그녀가 살아온 흔적들을 상징하기 때문이라 한다. 곧 그녀는 그 흔적들을 말로다 표현 할 수가 없어 화면에 크고 작은 얼룩들을 남기기도 하며, 때로는 무심코 홍차로 광목 천들을 염색하기도 하고, 종이에 홍차를 우려내면서 심지어는 홍차티백을 그리기까지 한다. 이러한 그녀의 행위는, 서윤희의 말에 의하면, 화가 자신이 간혹 느끼는 지점이기도 한데, 마치 홍차 티백과 자신의 인생이 닮아있다는 생각이 들면서 이 둘은 상호 조영(照影)처럼 서로서로 차이가 나지만, 한편 서로를 반영하고 있기에 그 둘은 서로를 침투하면서 상입상즉(相入相卽)하고 있다는 경계를 가끔 체험하는 데서 기인한다 한다. 요컨대, 서윤희에게 있어 홍차라는 매체는 그녀가 살아온 추억과 삶의 흔적으로서 필연과 환경, 시간과 공간, 과거와 미래, 자연과 인간, 우주와 인간, 진리와 사실, 자리(自利)와 이타(利他), 체(體)와 용(用), 공(空)과 실(實), 연기(延期)와 연기(緣起)에 대한 그녀의 '공시적(共時的) 사유(synchronic thinking)'를 가역적(可逆的, reversible)으로 가능케 하는 예술적 상징 매체의 자격을 갖는다하겠다. ● 그러나 아직 서윤희의 작업 일반은 우리에게 심미적 속성으로서 최고의 단계인 가지적(intelligible)인 상태로서 명료성(claritas, clarity)을 주기에는 뭔가가 충족되지 않은 상태이다. 그 무엇으로서의 예술적 진리를 보게 만들고 볼 수 있게 만드는 것은 예술의 본질이며, 예술가의 신성한 임무이다. 그것이 충족될 때 화가의 화면은 스스로 자족성을 획득한다하겠다. ■ 김인환
Vol.20060525a | 서윤희展 / SUHYOONHEE / 徐侖熙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