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성윤 개인展   2007_1022 ▶ 2007_1031

문성윤_0-3_장지에 채색, 파스텔_196×134.5cm_2007

초대일시_2007_1022_월요일_06:00pm

관람시간 / 11:00am~08:00pm

갤러리 꽃 서울 마포구 서교동 337-36번지 B1 Tel. 02_6414_8840

나무들은 두 가지 방향으로 자란다. 한 방향은 이미 익숙한 대로 하늘을 향해 / 빛 속에서 / 땅위로 자라는 것이며, 또 다른 방향은 아래로 / 어둠 속에서 / 땅 속으로 자라는 것이다. 후자의 방향은 다소 낯설게 느껴지는데 그래서인지 나무를 그릴 때 약 80 퍼센트의 사람들은 뿌리를 그리지 않는다고 한다. 무의식 속에서 뿌리는 '드러나지 않아야 할' 부분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묻혀서 보이지는 않지만 나무의 가장 영속적인 부분이자 인간의 무의식 속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 뿌리, 여기서 작가의 문제의식이 비롯된다. 뿌리가 지니는 의미는 다양하지만, 한편 우리의 무의식에서 일종의 원형(原型)으로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그 의미를 굳이 나열할 필요는 없을 터이다.

문성윤_0-4_장지에 채색, 파스텔_196×134.5cm_2007

작가 문성윤은 이러한 뿌리에 천착한다. 석조물을 집어 삼킬 듯한 파괴력과 신비로운 생명력을 동시에 보여주는 모습은 앙코르와트에서나 봄직하다. 식물이지만 '동물적'이며, 한 곳에 뿌리를 내리고 있지만 그 영역에 만족하기 보다는 깊숙이, 더 넓게 그 손길을 뻗어나간다. 나무에 대한 인간의 경외심은 그것이 자라온 시간과 그 생명력이 연장되어 있는 공간과 비례 관계에 있는데, 한계를 가진 존재로서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이처럼 뿌리가 보여주는 시간과 공간의 연속성은 작금(昨今)을 막론하고 인간의 삶의 조건과는 반대된다. 이 지점에서 긴장이 발생하고 불안으로 이어진다.

문성윤_0-5_장지에 채색, 파스텔_196×134.5cm_2007

불안에 대한 인간의 정상적인 반응은 투쟁(Fight)이나 도피(Flight)라고 한다. 하지만 살다보면 대부분 이도 저도 아닌 어중간한 '버티기'인 경우가 많다. 도망가지도, 그렇다고 맞서지도 못하는 불안한 상황이 작품의 '방독면'과 음울한 배경, 무서우리만큼 뻗쳐나가고 있는 뿌리의 형상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작가는 초기작에서 나무와 함께 빨강, 노랑 원색이 두드러지는 안전모, 방독면, +AAA 초강력 건전지, 오토바이, 보드 등으로 대표되는 자아의 이미지를 병치 시켰다. 정착과 생명력을 그 특성으로 하는 나무와 이동 수단, 초소형 소품들을 나란히 한다는 것은 일종의 모순이다. 그렇지만 그러한 모순을 전제조건으로 삼고 살아가는 것이 결국 인간이 아닐까. 이번 전시에서는 이처럼 작가의 관심이 개인의 정체성보다는 모든 인간의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심리에 맞춰져 있다는 점에서 공감대가 형성된다.

문성윤_0-9_장지에 채색, 파스텔_196×127.5cm_2007

나무의 뿌리는 인간적 상황에 대한 메타포이다. 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불안을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 이름붙이면서도, 불안과 절망이야말로 삶의 완성을 위한 필수 요소라고 말했다. 그러나 평소 후자는 쉽게 간과된다. 인생이라는 배의 사공은 자기 자신밖에 없기 때문에 매 순간 반성하고 노력하는 인간이라면 더 높은 단계의 삶으로 옮겨가는 과정에서 불안과 절망을 연료로 삼을 수밖에 없는데도 말이다. 문성윤의 작품에서는 이처럼 키에르케고르가 인간의 상황이자 조건으로 꼽고 있는 불안과 희망이 동시에 읽힌다. 뿌리를 내린 토양이 과연 흙인지 물인지도 불분명하고, 주변의 상황도 어둡고 음울하다는 점에서는 불안이 엄습하지만, 동물적인 생명력과 어디든 옭아매어 흔들림 없이 서있는 뿌리의 이미지에서는 희망과 강력한 힘을 느낄 수 있다.

문성윤_0, 0-1_장지에 채색, 파스텔_134.5×364cm_2007
문성윤_0-22_장지에 채색, 파스텔_134.5×193.5cm_2007

그렇지만 이것은 비단 작가만이 아니라, 사회·경제적으로 독립이 유보되어 있는 오늘날의 20~30대가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문제의식이다. 부족한 삶의 조건을 만족시키기 위해 때가 되면 이동해야 했던 것이 전통적인 유목민(nomad)들의 운명이었다면, 부족할 것 없이 삶의 조건이 충족되어 있는 오늘날에도 직장으로 / 학교로 / 외국으로 / 웹 공간으로 끊임없이 이동해야 하는 것이 디지털시대 유목민의 운명이다. 그 옛날에는 목적지라도 확실했지만, 모든 것을 허울 좋은 포스트모던의 이름으로 면제받을 수 있는 오늘날에는 지적 매춘에 가까우리만큼 자유로운 실험과 모험에 급급한 나머지 목적지를 정하기만도 벅차다. 여행의 불안은 커져만 가고, 안정은 영원한 노스탤지아(nostalgia)다. 동시에 정박(碇泊)의 꿈은 포기할 수 없는 마지막 보루다. 이것이 우리가 문성윤의 작업에 공감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 이지희

Vol.20071030a | 문성윤 개인展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