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너

용해숙 개인展   2007_0928 ▶ 2007_1011

용해숙_계급의 화원_화분에꽃, 파_가변크기_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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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7_0928_금요일_06:00pm

관람시간 / 11:00am~08:00pm

갤러리 꽃 서울 마포구 서교동 337-36번지 B1 Tel. 02_6414_8840

나와 너: 비늘 밑에 속살 ● 보는 것과 말하는 것은 같은 것을 향하여 다르게 표현함이다. 여기서 표현은 이미 보고 있는 것으로도 말하는 것으로도 완성되어진다. 그럼으로 표현하고자 했던 그 시도는 그것이 욕망이건 의지이건 간에 완성을 지향한다. 완성은 그렇게 우리 앞에 놓여져 있는 것이고 예술적 행위는 그것을 선취하는 일이다. 용해숙은 전시를 통해 자신이 선취한 바를 솔직하게 드러낸다. 그것이 작가의 입으로 전하는 성공과 실패 그 어느 쪽으로 기울어져 있든지 상관없이 그러하다. 일반화 시켜 말하기는 곤란하지만 '현대'의 시공간에서 벌어지는 시각문화제작 방식에서 '보는 것'은 부차적인 일이 되고 있다. 우리가 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하다. 보는 행위와 보여주는 행위에 항상 앞세워져 있는 것은 읽음으로써 말해지는 바를 알아채는 것이다. 작가들은 이제 말하는 방식으로 표현한다. 그러니까 완성됨은 말하는 바를 알아듣는 행위와 직접적인 연관을 지닌다. 무엇을 말할 지 준비하는 일이 시각적 전제가 되었다. 무수한 말은 그래서 신중하게 선택되어야 할 표현의 대상이다. 과연 이러한 '현대'를 우리는 동의했었는가? 아니면 동의하기도 전에 관습화된 태도로서 수용하고 있는가? 이런 질문은 가능하기라도 한 것인가? 비늘 밑에 속살은 말해져야만 전달될 수 있는 표상으로 전시에서 등장했다.

용해숙_토성아래 꽃_점열전구 , 밥상_가변크기_2007
용해숙_지시의 발송처_합성수지_165cm_2007
용해숙_보았을까_천에 아크릴채색_110×90cm_2007
용해숙_womad_실물지도에 혼합재료_2007

전시장은 점멸하는 작은 전구가 첫 인상을 만들어낸 그 상태에서 관람객을 맞이한다. 점멸되는 그 조도 안에서 이것저것의 사물들이 제 위치를 차지하고 있어 전시장을 환하게 만들지 않는 작가의 의도를 엿봐야 하는 시련을 준다. '사실'은 말하고자 하는 작가의 의지가 두어 번 반복해서 나타나는데 '계급적'이라는 단어와 '(도미니카 공화국 내)사건'에 대한 간략한 설명(동영상 화면 속 경고를 제외하고)을 통해서이다. 그 것만이 이 전시에서 실재하는 사실이다. 나머지는 해석일 터인데 해석의 틀, 맥락 파악이 불안하다. 그러한 경험을 유발하게 하는 것 또한 이 전시의 '사실' 중 하나다. 용해숙은 두 가지 '사실'을 흘려주면서 자신의 의도된 세계에 관람자를 초대한다. 그 중 하나, 보여져 읽혀지는 '사실'은 이데올로기적 판단을 요구한다. 작가의 입장에서는 세계에 대한 배려임이 분명하다. 그녀의 유도에 따라 우리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건의 세계조차도 이미 전제된 틀 안에서 읽혀짐으로 분명한 소통의 공유장이 있음을 알아차리게 되고 작가에게 동의하거나 반대하게 된다(나는 동의했다.) 그러나 이런 동의를 구하는 일은 이번 전시에서 작가가 노리는 중심 화제가 아니다(그 점은 전시 디스플레이에서 기술적 측면이라고 지적하기에는 신중하지 못한 점이다. 그러나 기술적인 이야기라서 오래 끌고 갈 성질이 아니다.). 맥락 파악이 불안한, 그러나 그 조건에서 던져져 있는 화제는 읽혀지기 전에 보여지고 있다. 물론 이번 전시는 온통 읽혀져야만 한다. 전시에서 드러나는 불안한 맥락은 작가가 자신의 작품이 그렇게까지 완성되어져 오는 과정에 대한 외연을 보여주지 않기 때문이다. 작가는 자신의 외부에서 어떤 자극을 받고 제작 동기를 촉발시켰는지 친절하게 알려주지 않는다. 그렇다고 2007년도에 여기 삶 속에서 우리가 통념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상징을 작품에 결부시키지도 않았다. 따라서 그 전시를 보는 그 행위로부터 작가에 대한 이해가 겨우 촉발될 뿐이다. 작가는 관람객의 외연이 된다(여기서 전시 그 자체가 외연이 되기도 한다. 같은 말이다.). 그렇다면 작가의 자기 결정을 쫓는 일만 남게 되었다. 그것은 곧 보는 행위의 정당성이다. 봄으로서 얻어지는 해석 그 자체일 뿐이다. 그렇다면 가장 강렬한 것이 손가락으로 앞 어딘가를 지시하고 있는 중성적 인간의 등신대 작품이다.

용해숙_삼식이_가변크기_2007
용해숙 개인展_갤러리 꽃_2007
용해숙 개인展_갤러리 꽃_2007
용해숙 개인展_갤러리 꽃_2007

전체 인상은 점멸등이 만들고 있지만 공간에서 찾아보게 되는 첫 표상-이미지는 등신대 조상이 가장 강렬하다. 그녀/그는 무엇을 지시한다고 하기보다 머쓱한 채 손을 내밀어 화해를 구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발송된 지시」(카탈로그에서 알 수 있는 작품명이다.)는 그 이름으로 하여 화해의 몸짓이 아닌 지시의 은유라는 것을 알게 한다. 그 손가락 끝은 바닥을 향하고 있어 다른 설치물들과 하등의 연관이 없어 보인다. 그럼에도 다른 사물들과 관계 맺으면서 공간을 압도하고 있다. 그것만이 유일하게 봄으로써 알아버리는 '의미'를 구조화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복잡한 체계를 전시에 내보이는 의도는 읽지 말아야겠다. 오히려 보여지는 한 '세계'가 생긴다는 전통적인 해석 방식에 몰입하는 편이 좋겠다. 무엇을 지시하는 한 우리는 관계를 떠올리게 된다. 이 중성적 모티브가 열쇠말이 될 수 있다. 여기서 작가의 전시제목에 대한 오해와 진실이 드러난다. 우리가 '나와 너'로 나누어져 지시된다면 이미 그 관계에 대해 말하고 싶을 게다. 그렇다면 그 지시체는 중성적 이미지를 갖는 것이 배려될 만한 결과다. 그러나 이 지시체-등신대 인물상은 여성성으로 가득하다. 누가 보아도 마찬가지일 게다. 여성성으로 구분하여 보여주려는 것은 아직 미답의 '세계'임이 분명하다. 용해숙(그녀)은 이 미답의 혼란한 세계(남성적 시각으로 질서 잡혔다고 선언될 수 없는 그 무한한 세계)를 나와 너의 구분됨으로 질문한다. 그 대답은 이 전시에 없다. 그러나 이 질문의 타당성으로 말미암아 기술적 오해가 있을 법한 작품들 모두가 한 자리에서 보여지기 시작한다. 전시의 탁월함(그러나 그것을 성공이라고 말할 수 없는)은 엉뚱하게도 보여짐과 말해짐의 사이에 놓여 있었다. 이제 편안하게 말하면, 그녀는 그녀의 전시에서도 글에서도 지속적으로 하나의 지향을 내보임을 발견하게 된다고 말할 수 있다. 굳이 전시평을 쓰면서 이 부분을 이야기하는 것은 그녀의 지속성이 전시의 가장 중요한 판단근거이기 때문이다(적어도 이 글을 쓰고 있는 나에게 그렇다.). '새로운 질서 잡힘'으로 드러나게 될 미답의 '세계'에 대한 호기심이 그녀로 하여금 듣는 행위에서 착안하지만 결과적으로 보여주는 행위에 치중하게 한다. 이렇게 과감하게 주장하면서 나는 글을 쓸 수 있다. 그녀의 그 세계가 무엇인지는 앞으로 그녀가 보여줄 작품들과 전시에서 드러나지, 단박에 쓰는 짧은 글에서는 절대로 예견하지 못하는 법이다. ■ 이섭

Vol.20070928d | 용해숙 개인展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