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lemnis

라유슬 회화展   2007_0913 ▶ 2007_0923

라유슬_춤을 추고,-Dancing_캔버스에 유채_130×130cm_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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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7_0913_목요일_06:00pm

금호미술관 서울 종로구 사간동 78번지 Tel. 02_720_5114 www.kumhomuseum.com

잠 못 이루는 밤을 위하여... ● "새로운 천국을 건설한 사람은 누구나 먼저 자신의 지옥에서 필요한 힘을 얻었다" -니체 (Friedrich W. Nietzsche) ● 홍대 앞 술집에서 처음 라유슬 작가를 만난 때만해도 그녀는 맑고 경쾌한 소리를 냈고, 그녀의 그림은 반짝였다. 누구보다도 감각적으로 노래를 부르던 그녀는 스스로의 그림 속에 고스란히 들어가 감미롭게 생동하는 음률의 파장을 색으로 담아내었다. 불과 일 년 사이에 다시 만난 그녀는 짙은 보라색으로 이동 중인 듯이 보였다. 적어도 내가 그 색에 대하여 고귀한 삶의 끝과 같은 깊은 신뢰를 갖고 있는 한에 있어서 말이다. 지금 그녀는 이전보다 무게 있고 짙은 소리를 내고, 새로운 그림들은 엄숙해졌다. 물론 여전히 색의 파동은 마치 음률처럼 화폭을 지배한다. 그리고 여전히 그 아름다운 미세한 떨림이 나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라유슬_춤을 추고, -Dancing_캔버스에 유채_80×130cm_2007
라유슬_노래하라-Sing_캔버스에 유채_180×180cm_2007

아마도 그녀의 변화는 지속되어 온 것이겠지만 이번 전시를 기하여 한 사람으로써, 무엇보다 작가로써 한 단계 도약하지 않았나 싶다. 지난 일 년 사이 그녀는 어느 때보다도 진지하게 작가와 작품 그리고 관객의 시선에 대해 고민한 흔적이 역력하다. 이런 작가의 숙명에 대한 존재론적 고뇌는 분명 도약의 발판이 되었다. 스스로는 이번 전시 제목이자 미사 음악에 주로 쓰이는 용어인 'Solemnis(장엄하게 연주하라)'가 내포하고 있듯 안식을 원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녀의 고민과 변화는 오롯이 작품에의 전념을 통한 비상(飛上)으로 나타날 듯하다.

라유슬_Into_캔버스에 유채_162×260cm_2007
라유슬_참을 수 있는 존재의 가벼움- Bearable lightness of being_캔버스에 유채_130×194cm_2007

'장엄하다'는 단어는 마치 영웅처럼 찬란하고, 위엄을 가지고 있어 그 앞에 선 개인을 한없이 작게 만든다. 미사 음악의 장엄함은 위대한 신 앞에서 자신을 털어버리고 마음의 안식을 갖도록 해준다. 라유슬 작가는 그런 자신의 마음을 이번 전시 작품의 주된 모티브인 날개와 뱀에 담아내었다. 뱀은 허물을 벗는 고통을 지나 안식을 찾고, 거대한 날개는 평안을 향해 날아가도록 해준다. 그러나 이런 안식은 단순히 심신의 안락이나 정체(停滯)가 아니다. 그것은 또 다른 성장이고, 도약이며, 성숙의 단계이다. 뱀은 탈피를 하지 못하면 몸이 자라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 비늘이 단단히 굳어버리고 결국 피부가 찢어져 죽고 만다. 라유슬 작가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그녀는 지금의 고뇌가 안식을 바라는 마음을 불러일으키지만, 그 안식은 또 다른 출발점이 될 것이라는 것을 스스로 알고 있을 것이다. 끈적끈적한 작가의 피가 흐르기에 탈피의 고통을 통하여 성장할지언정, 붓을 놓는 순간의 안락은 택하지 못할 것이다. 그것을 알기에 허물을 벗고 있는 뱀의 고통에 찬 괴성에 'Sing(노래하다)'이라는 제목을 붙여준 것이 아닐까. 그리고 저 거대한 날개를 달고 비상하려는 것은 아닐까. 니체의 말대로라면 지금 라유슬 작가는 자신만의 새로운 천국을 건설 중이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니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녀가 단 날개가 결코 이카루스의 날개는 아니라는 사실이다. ■ 장우인

라유슬_139 Eyes_캔버스에 유채_90×90cm, 60×60cm_2007
라유슬_그 너머에-Beyond_캔버스에 유채_97×194cm, 60×97cm_2007

"잦은 바람에 허우적거리는 부질없는 날개짓 세상에 나의 날개짓이 헛되어도 허공에 발을 딛고 비상하라" ● 그다지 많지도 않은 몇번의 전시를 거치면서 내 그림과 나의 기싸움은 점점 거칠어진다. 나의 색들로 쌓여진 그 공간은 미풍도 불지 않을 고요한 영원 같기도 하고 때로는 숨이 막히도록 답답한 소용돌이가 몰아친다. 나는 그 공간이 언젠가는 나를 집어삼키는 환상을 꿈꾼다. 꿈이기도 하고 염원이도 한 이 소원이 늘 숙제처럼 작업을 하게 만드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제껏 그래왔던 것처럼, 노래를 하듯이 그림을 그린 이번전시의 제목은 'Soleminis, 장엄하게 연주하라' 이다. 죽음에 다다른 자의 안식을 위해 연주되던 장송곡에 있는 이 단어는 죽은 자는 듣지 못하는 의식에서, 어쩌면 살아있는 이들에게 분명한 끝이 있는 삶을 대하는 태도를 환기시켜주는 데 의미가 있을 수 있다.

라유슬_찬란한 슬픔-Glorious Sorrow_캔버스에 유채_260×194cm_2007

새삼스럽게 내 인생에서 장엄하리라 여겨질 만한 순간이 언제 있었을까, 생각해보면 비장한 마음이 들게끔 삶의 위기라는 순간도 아직 오지 않았다. 그러나, 겨우 서른이라는 문턱을 넘어서 이제야 삶의 무게가 더해지고 시간의 가속도가 느껴진다. 그리고는 어른 흉내 내기로 익숙해져 있던 삶에서 내가 미처 알지 못했던 뿌연 어떤 것에 대한 존재를 감지하게 된다. 그 것은 너무나 가까이 있지만 낯설고, 아직 알지 못하기에 두렵다. 그리고 마주보기에 두렵지만 삶의 과정에서 알아가야만 하는, 받아들여야 하는 상황에 놓여진 나를 볼 때 작아져 있는 나를 발견한다. 그리고 나의 한계를 인정하게 되는 순간에 모순된 감정을 느끼게 된다. 이 숙명과도 같은 감정이 내 작업 안에서 머뭄과 움직임으로서 맴돌고 있고, 그 안에 유쾌한 긴장감을 가진 내가 있다. ● 유한하지만 무한한 내 작업 안에서 나는 온몸으로 기고 있는 한 마리의 뱀이다. 내가 살아가는 방법은 축축한 음지를 내안의 온기로 데워가며 걷는 것이다. 내안에는 그 음지로부터 얻어진 곰삭은 독이 있다. 그 독은 내게 세상을 걸어가는 힘을 주며, 세상을 벗어나고픈 날개를 꿈꾸게 한다. 꿈꾸어진 날개는 찬란한 슬픔이다. 그 찬란한 슬픔은 내게 눈을 갖게 하고, 노래하게 하고, 춤추게 하고, 참을 수 있는 존재의 가벼움, 그 너머에 무언가가 있음을 알게 한다. 그래서 나는 또 걸어가야 한다. ■ 라유슬

Vol.20070915f | 라유슬 회화展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