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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6_0808_화요일_06:00pm
정 갤러리 서울 종로구 내수동 110-36번지 Tel. 02_733_1911 www.artjungwon.co.kr
음악적으로 솟아오르는 색의 울림 ● 나는 색으로 그림을 그린다. 그래서 화면은 온통 색으로 가득 차 있다. 단순한 얘기 같지만,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 색을 필요로 한다는 것은 나에게 필연적인 이유였다. 취향의 문제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세계를 살아가는 나를 표현하기 위해서, 즉 나의 경험, 나의 감정, 나의 기억을 표현하기 위해서 색 이외에는 다른 것을 찾을 수가 없었다. 철학자에게 개념이 필요하고, 시인에게 언어가 필요하고, 음악가에게 음표가 필요하듯이 화가에게는 색, 오직 색만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항상 색을 통해서 세계를 만나고 싶다.
나는 나의 그림이 음악처럼 느껴지길 원한다. 음악은 공간을 바꾸는 힘을 가지고 있다. 말하자면 삶이 거칠고 삭막하고 비정하게 느껴진다 하더라도 꿈을 꿀 수 있게 하고 아름다운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 그리고 소리의 울림은 마음속에 알 수 없는 무언가를 끌어올리는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를 전율하게 한다. 사실 소리라는 것은 물질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의 떨림과 연관성이 없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어쨌든 사실이 그렇다. 나는 시간과 함께 공기 중에 흩어져 버리는, 보일 수 없는 음을 붙잡아 화면에 고정시키려고 노력했다. 감성을 움직이는 음의 공명들은, 사실 음악의 것만은 아닐 것이다. 나는 색의 진동이 음률과 닮아있다고 생각한다. 규정할 수 없고 단언하기 힘든 그들의 진동이 나에게 음률을 갖게 한다. 공간에 울려 퍼지는 선율의 떨림처럼 색은 나로 인해 캔버스에 울려 퍼지면서 화폭을 공간으로 만든다. 그렇게 화폭은 기하학적인 공간이 아닌, 깊이를 갖고서 리듬이 충만한 공간이 된다. 그리고 음악에서 화성법과 대위법이 있듯이 나는 그 공간에 음과 음의 화성을 그리면서 코드를 증축한다. 그렇게 기억의 저 깊은 곳에서 아우성대는 감정을 중첩시킨다.
나는 살아가면서 느끼는 감정들을 색으로만 받아들이기 때문에 캔버스에 표현되는 색은 나의 감정 그 자체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사실 세계는 색으로 가득 차 있고, 우리는 색의 공명을 느낀다. 이 세상은 다양한 색색의 공명으로 둘러싸여 있다. 이러한 색의 공명들이 파장이 되어 울림으로 나에게 다가오는 것이다. 쇼팽의 「녹턴」이 나의 감각에서 푸른색으로 번지고, 피아졸라의 「탱고」가 초록의 소우주에서 붉음이 흘러나오는 지각을 갖게 하듯이 말이다. ● 시간이 흐르면 모든 것은 변한다. 또는 시간이 흐를 때 모든 것은 변하는 중에 있다. 그래서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나는 항상 변하고 있는 시간 안에 있다. 그림이 존재하는 방식도 마찬가지일거라고 생각한다. 색으로 가득 차 있는 한, 평면일지라도 깊이를 지니고 있고, 정지되어 있을지라도 운동을 가지고 있다. 나는 세계의 진동을 색으로 느끼기 때문에 내 화폭을 가득채운 색은 사실 나를 사방에서 온통 둘러싸고 있는 세계를 표현한 것이다. 그래서 나의 그림은 심연에서 끊임없이 떠오르는 나의 기억들처럼 나의 감각의 깊은 울림과 지속되는 운동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이제 나의 그림에서 색은 세계의 리듬을 간직한 채, 알려진 색들과는 다른 어떤 것으로, 음악적으로, 관념 그 자체가 되어 그윽하게 솟아오를 것이다. 나의 자아, 그리움, 꿈, 욕망, 상처, 추억들의 고요한 울림이 되어... ● 나는 달콤한 꿈을 꾼다. 영원히 깨고 싶지 않은 그런 꿈을... 그 꿈이 비록 나를 내 시선과 멀리 닿은 곳으로 발끝을 향하게 할지라도 내 슬픈 눈은 한없는 미소를 짓는다. 그 꿈을 꾸는 동안에 세상에서 가장 차가운 냉소 앞에서도 발바닥이 따가운 사막 한가운데에서도 나는 눈을 감고 춤을 춘다. ■ 라유슬
Vol.20060808a | 라유슬 개인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