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ar my second

김현주 영상展   2007_0525 ▶ 2007_0530

김현주_dear my second_영상_loop_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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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7_0525_금요일_06:00pm

퍼포먼스_2007_0525_금요일_06:00pm

2007 Kunst Doc 공모작가 개인展

갤러리 쿤스트독 서울 종로구 창성동 122-9번지 Tel. 02_722_8897 www.kunstdoc.com

타자와의 경계를 위반하는 사회적 주체, '또 다른 나'I. 타자로부터 명명되어진 '나'- 관계지형 안의 주체 ● 퍼포먼스를 근간으로 영상, 설치 등의 복합미디어적인 작업을 해온 작가 김현주는 이번 개인전에 'Dear my second'라는 타이틀을 내세웠다. 작가 스스로 '친애하는 나의 두 번째씨'라는 한글번역을 병기하고 있는 이 타이틀은 우리로 하여금 그녀의 이번 작업이 '작가의 주체적 정체성 모색' 혹은 '작가의 또 다른 나 찾기'라는 범주 안에 포섭되고 있음을 쉬이 가늠케 한다. ● '한국인', '여성', '미술 작가'와 같은, 우리가 쉬이 떠올릴 수 있는 그녀에 관한 선입견적인 정체성 외에도 작가와 친분이 있는 이들은 보다 더 직접적인 그녀의 정체성을 몇 가지 더 떠올릴 수 있을 터이다. '아내', '엄마', '며느리' 같은 것이다. 생물학적 경계 아래서 틀이 지어져 사회적 질서 체계에 편입되어 있는 이와 같은 간략한 명명(命名)은 사회 구성원들의 다수가 공유하는 정체적 지표라서 그다지 구체화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작가의 정체성에 대한 기초적 이해를 가늠케 한다. 특히 한 미술가의 작품과 그 작가정신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작품론보다는 작가론이 보다 효율적인 텍스트가 된다는 점에서 작가에게 부여되는 간략한 사회적 명명은 '작품에 발현되는 작가정신의 독해'를 시작하는 출발지점이다. 게다가 정체성 모색이라는 김현주의 작품에 대한 주제의식을 보다 명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더더욱 그러하다. ●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그녀에 관한 간략한 명명이 '그 무엇'인가로부터 파생된 '관계의 지형학'에서 출발하고 있음을 생각해 보아야 할 것 같다. 그것이 더욱 구체화된다면 '한 남자의 아내, 한 아이의 엄마, 한 부부의 며느리'와 같은 '타자로부터 명명되어진 나'라고 하는 객관적 지표로 나타날 것이다. 혹 타자들의 평가적 인식이 개입된다면, '착한 한 남자의 아내, 귀여운 한 남자아이의 엄마, 자상한 한 노부부의 며느리'같은 타자들과 공유하는 정체성으로부터 차별되는 세분화의 길을 접어들 수도 있을 것이다. 게다가 또 다른 객관적 지표로서의 명명, 예를 들어 선생, 제자, 선배, 후배, 누이, 동생, 친구와 같은 명명들은 개별의 타자들과의 관계지형에서 변모하면서 등장하는 한 주체의 정체성으로 구체화되고 세분화된다. ● 한 주체의 정체성을 보다 근본적으로 언급해 본다면, 그것은 '타자와 대면한 개별 주체'임에도 우리들의 현실계에서 그것은 '타자(들)로부터 명명되어진 개별 주체'로 드러나 보일 뿐이다. 개별 주체가 적극적이고 주도적인 역할을 감당해내기에는 그 주체가 구성하고 있는 사회적 위계의 틀이 너무 강고한 탓이다. 개별 주체의 의미는 사회 체계, 담론 등의 사회적 요인들에 의해서 타자의 아내, 며느리, 동료, 후배 식으로 혼란스레 결정될 뿐이다. ● 케네스 거겐(Kenneth Gergen)이 언급하고 있는 이 같은 '사회구성주의(Social Constructivism)'적 현대사회는 우리로 하여금 수많은 주체와 자아를 동시에 가지게 하고 수많은 역할을 하도록 구속한다. 케네스의 결론적 언급을 빌면, 현대사회에 완전히 흡수되어버린 자아(saturated self)는 '진실한 자아(authentic self)'의 개념을 상실하고 '전혀 없는 자아(no self at all)'가 되고 말 뿐이다. 우리의 논의에 따라 바꾸어 말하면, 개별주체들은 현대사회가 보이지 않게 조정하는 타자(들)에 의해 수많은 자아와 주체들로 명명되어지는 주체일 따름이다. ● 그러나 우리가 김현주의 작업에서 발견하는 흥미로움은, 그녀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 '타자로부터 명명되는 나'로부터 출발하고 있음에도 그 현실 위계에 대한 위반의 욕망으로 꿈틀대고 있다는 사실이다. 즉 그녀의 작업에서 나타나는 '나의 주체적 정체성'은 더 이상 '타자로부터 명명되어진 주체'이기를 거부하고 '타자와 적극적으로 대면하고 있는 사회적 주체'로서의 작가 자신의 갈등과 번민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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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 타자와 대면하는'나' - 경계 위반의 주체 ● 작가 김현주는 이번 전시에서 퍼포먼스 작가들이 통상 퍼포먼스의 기록매체로 사용해 온 영상 미디어를 전면에 내세우고 그녀의 신작에 '영상 퍼포먼스(video performance)'의 지위를 부여한다. 퍼포먼스가 보편적으로 '개념의 행위 과정'이 중시되고 감상자의 소통이 '참여'의 형식으로 이루어져 자연스레 인터랙티비티에 집중된다고 한다면, 영상 퍼포먼스는 '개념의 행위 결과'가 애초부터 주요하게 고려된 탓에 굳이 인터랙션을 강조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감상자와의 소통은 단순히 '보기'의 형식으로도 가능해진다. 관객으로서는, 영상 퍼포먼스라는 장르의 속성상 퍼포머의 현실감 있는 '몸'의 행위성에 대한 직접 참여가 배제되거나 둔화되어 차분한 관조적 감상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 김현주의 영상 퍼포먼스에는 관객의 '몸'으로서의 참여는 배제되어 있지만 여전히 퍼포머의 '몸'으로서의 행위는 살아있다. 모든 영상을 스톱모션으로 찍은 후 이를 이어 붙인 '픽실레이션(pixillation)'이라는 애니메이션 기법에 의해 가능해진 '몸'의 분절화가 퍼포머의 '몸'으로서의 행위를 강화하고 있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그것은 더 이상 '타자로부터 명명되어진 주체'이기를 거부하고 '타자와 적극적으로 대면하는 주체'로서의 몸의 노동을 강조하고 있는 탓이기도 하다. 풀어 말하면 작가 김현주는 작업을 통해 누구의 며느리, 아내 식으로 '타자로부터 경계 지어진 대상적 주체'의 정체성에 주저앉아 있기를 거부하고 이내 '사회로부터 틀지어진 경계를 위반하는 적극적 주체인 '나'의 정체성을 찾아 분주히 몸을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 이번 전시에 작가는 세 가지의 디지털 영상을 보여주고 있다. 작가가 커다란 자개장을 가까스로 들어 올려 위태롭게 균형을 잡으며 고군분투하고 있는 영상과 작가의 시어머니가 부엌에서 끊임없이 그릇 쌓기를 반복하고 있는 영상 그리고 작가 자신은 물론 그녀의 남편과 시부모가 등장하고 있는 풍자적 내러티브의 영상 작업이 그것이다. 벽에 투사되고 있는 앞서 언급한 자개장이나 부엌과 관련한 두 영상은 또 다른 소전시장 벽에 설치된 모니터에서 상영되고 있는 내러티브가 있는 한 영상의 복선이거나 주제의 증폭을 위한 부가적 변주에 다름 아니다. 그런 면에서 이번 전시에 등장하는 영상 퍼포먼스들은 모니터에 담겨져 있는 내러티브가 있는 다음의 한 영상 퍼포먼스로부터 모두 파생한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실 메인 작업이라 불릴만한 이 영상 퍼포먼스가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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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자신이 직접 연출한 영상의 주인공 '젊은 여자'는 무거운 짐 꾸러미로 비유된 여러 색으로 칠해진 다섯 개의 박스를 힘겹게 들고 한 대문 안으로 들어간다. 그 대문은 결혼이라는 사회적 제도 장치를 거쳐 시집 식구들이 거주하는 공간으로 진입하게 되는 풍자적인 진입로이자 제도권 혹은 타자들의 공간으로의 편입을 상징하는 은유체이다. ● 그 곳에는 실제 시아버지인 '나이 든 여자의 남자'가 그녀의 존재에 아랑곳하지 않은 채 신문을 읽는데 여념이 없고 한 쪽에는 실제 남편인 '젊은 여자의 남자'가 TV 보는데 온 정신이 팔려 있다. 반면, 부엌에선 실제 시어머니인 '나이 든 여자'가 그릇을 산더미처럼 쌓는 힘든 노동을 지속하고 있다. ● '나이 든 여자'의 방에 들어 선 '젊은 여자'는 '나이 든 여자'의 짐 꾸러미로 비유되고 있는 방 안을 가득 채우고 있는 커다란 자개장을 보고 허탈하고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잠시 망설인다. '젊은 여자'가 보기에 그것은 답답해서 치워버리고 싶은 폐기 대상이지만 '나이 든 여자'의 소중한 물건과 기억들이 담겨 있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애물단지이다. 이윽고 '젊은 여자'는 자개장 밑으로 기어 들어가 무거운 그것을 들어올리기 시작한다. ● 이내 영상은 옥상 위에서 '젊은 여자'가 버둥거리며 자개장을 들어 올린 이미지로 전환된다. '젊은 여자'는 들어 올린 자개장을 버리지도 그렇다고 다시 내려놓기도 버거운 갈등과 불안에 휩싸인 채 자개장의 무게에 짓눌려 힘겹고도 위태위태하게 균형을 잡고 있을 따름이다. ● 일견 이분법적이고도 직설적인 내러티브를 간직하고 있는 탓에 작가 김현주의 영상 퍼포먼스는 작품을 천천히 읽게 하는 깊이를 애초부터 방기하고 있지만, 그런 만큼 그 메시지는 매우 강렬하다. 작가의 직접적인 '까발림'의 메시지가 익살과 풍자로 풀어진 발언들은 관객으로 하여금 '오늘날의 사회적 현실'과 '타자와 대면하고 있는 개별 주체의 사회적 정체성의 의미'에 대해서 곱씹어 보게 한다. ● '젊은 여자'라는 한 개별 주체와 대면하고 있는 주변인들, 즉 타자들은 그들 각자가 명명하는 다양한 이름들을 통해서 그녀에게 혼란스러운 주체를 강요한다. 즉 부계의 은유적 우월성에 기초하는 가부장제의 현실이 작가의 정체성을 '나이 든 남자의 며느리, 나이든 남자의 아내의 며느리, 젊은 남자의 아내'로 명명하고 이를 받아들일 것을 무언중에 강요하는 것이다. ● 그럼에도 작가 김현주는 이러한 버거운 현실과 대면하고자 한다. '타자로부터 명명되어진 나'의 정체성을 벗고 '타자와 대면하고 있는 나'의 주체성을 확립하려고 시도한다. 즉 자신이 대면하고 있는 타자들을 '나의 시아버지, 나의 시어머니, 나의 남편'으로 회복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 이번에 선보이는 작가 김현주의 작품은 여성의 사회적 종속사(史)에 거세게 투쟁하는 저항적 페미니스트의 과제를 전유하고 있지는 않지만, '부계주의의 관계 지형과 그 경계에 대한 위반'을 시도하면서 주체로서의 여성 육체를 '재지도화'하려고 애쓰는 것만은 사실이다. 작품 속에서 '나의 시아버지'나 '나의 남편'이라는 남성들이 유희와 안식의 시간을 보내는 것과 대비되게 '나의 시어머니'나 '나'라는 여성들이 동일하게 '몸'을 부단히 움직이며 노동의 시간에 지쳐있는 상황을 드러내고 있는 것은 이러한 '여성주의적 작가 인식'을 우리에게 간접적으로 시사한다. ● 하지만 김현주의 작가주의를 이해하는 한, 보다 더 정확히 말하면, '타자와의 대면의식'이나 '경계 위반'의 대상은 '남성'이기보다는 '나 아닌 모든 타자들'로 상정된다. '시어머니'를 제도권으로 인식하거나 '시어머니의 젊은 시절의 짐 보따리인 자개장'을 자신의 짐 보따리와 비교하거나 그것을 작가 자신의 주체적 행위의 대상으로 삼는 제스처는 '남성 타자'를 넘어서 '나 아닌 모든 타자'와의 대면의식을 드러낸다. ● 그런 면에서, 생활 주변에서 작업의 주제를 찾아야 하는 여건이 작가 김현주의 작업세계를 '저항적 페미니즘'으로 정초시킬 수 있는 스스로의 함정에 빠트렸다면 이는 작가의 '의도하지 않은 오류'이자 작가 스스로가 냉철하게 경계해야 할 지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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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I. '또 다른 나' - 타자를 타자이게 하는 주체 & 자아가 싸우는 주체 ● "주체성이란 타자의 출현과 개입을 통해 비로소 발생한다"는 들뢰즈의 견해처럼 타자는 나의 주체를 인식하게 하는 조건이 된다. 그것이 '타자로부터 명명되어진 주체'이든 그 '경계를 위반하는 적극적 주체'이든 말이다. 김현주의 작업에는 타자들로부터 형성되는(되어가는) 작가 자신의 주체적 인식이 곳곳에 드러난다. 영상 퍼포먼스에서 작가는 무거운 자신의 짐을 들고 타자들의 공간에 들어서면서 비로소 주체적 자아를 처절하게 인식하기 시작한다. 타자의 아내, 또 다른 타자(들)의 며느리... ● 들뢰즈에 따르면, 타자는 나의 공간적 지각을 가능케 하는 조건이란 점에서 '선험적 타자(Autrui a priori)'이다. 즉 나의 지각장의 질서를 구성해주며, 나의 지각의 문법을 가능케 해주는 존재인 것이다. 그런 면에서 나의 주체 찾기는 타자와의 관계 지형 혹은 그 경계 근처에서 유발되는 소통의 측면에 집중된다. ● 그러나 나의 타자와의 소통은 주체와 주체 간 소통이 아니다. 들뢰즈는 "타자는 나의 지각장 속에 있는 대상도 아니며 나를 지각하는 어떤 주체도 아니다"라고 피력한다. 이러한 주장에 기대어볼 때, 논리적으로 타자의 타자성을 올바로 밝히려면 주체로서의 타자나 대상으로서의 타자라는 정의에서 떠나야만 한다. 타자(의 출현)는 나의 주체적 인식을 가능하게 하지만 타자는 타자일 뿐이기 때문이다. ● 이와 같은 관점은 작가 김현주의 영상 퍼포먼스에 등장하는 타자들의 모습에서 여실히 찾아볼 수 있다. '젊은 여자의 시아버지, 시어머니, 남편'인 타자들은 '젊은 여자'인 한 주체에게 어떠한 소통의 행위를 하려고 시도하지 않는다. 단지 신문을 보거나 TV를 보고 그릇을 부지런히 쌓으면서 그들의 일과를 보낼 뿐이다. 그러나 '젊은 여자'는 이 타자들과의 대면을 통해 자신의 공간적 지각을 가늠하며 스스로의 주체성을 인식하기 시작한다. 고민, 갈등, 깨달음이라는 주체 인식과 주체성 모색이 시작되는 지점인 것이다. 그런 면에서 김현주의 작품은, 타자와의 소통이 '주체와 주체 간 소통'이 아니면서도 타자의 출현에 의해 주체성을 인식하고 타자를 타자이게 하는 '들뢰즈 식 타자와 주체 이론'을 훌륭하게 작품으로 현실화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 한편, 우리는 여기서 타자를 타자이게 하고 주체를 주체이게 하는 김현주의 조형언어가 보다 더 심화되는 단계를 발견하게 된다. 타자와 대면하며 '또 다른 나'의 주체성을 찾아나서는 작가 김현주의 관점이 자신의 주체적 자아로 침잠하는 모습이 그것이다. 작가는 주체 안으로 스스로 파고 들어가 자신과 투쟁하는 '또 다른 나'를 모색한다. 그것은 프로이트 식으로 '이드(id)'와 '슈퍼에고(superego)'라는 본능과 초자아 사이에서 둘을 끊임없이 중재하다 생채기를 남기는 '에고(ego)'의 울부짖음처럼 보인다. 또는 이드와 슈퍼에고 사이에서 둘의 타협을 위해 스스로 싸우고 있는 에고의 간절한 몸부림이기도 하다. ● 자아의 처절한 투쟁과 몸부림은 '나이 든 여자 혹은 시어머니'의 까만 자개장 앞에서 시작된다. 버리려는 충동적 욕망과 버릴 수 없다는 도덕적인 심리 사이에서 자개장을 들어 올린 '젊은 여자'의 자아는 끊임없이 갈등하고 번뇌하며 그 타협에의 버거움과 무거운 짐에 짓눌려 스스로 괴로워한다. 그 모습 자체가 스스로 괴롭지만 Dear my second라 부를 만큼, '갈등하고 자신 안에서 싸우는 나'는 연민할 수밖에 없는 '또 다른 나의 정체성'이자 주체 안에서 투쟁하는 '또 다른 나'의 모습(들)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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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V. 영상 퍼포먼스- 몸의 이데올로기와 시선의 정치 ● 퍼포먼스의 장에선 '몸'이 언제나 주요한 화두이다. 반면 영상 퍼포먼스의 장에선 장르의 특성상 '눈'이 '몸'과 함께 동급의 지위를 나누어 가지며 주요한 화두로 부상한다. 시각예술이 기본적으로 수렴하는 '눈을 통한 시각성'은 몸이 작동하는 퍼포먼스의 장에서도 예외는 아니지만, 영상 퍼포먼스의 장에선 더욱 유효해 보인다. '눈'의 지위를 앞세워 '퍼포머의 몸'의 논리를 풀어보고자 하는 관객을 늘 의식해야 하는 탓이다. ● 그렇지만 김현주의 지금까지의 작업에는 퍼포먼스든, 영상 퍼포먼스든, 오브제 설치든 '몸'에 종속되어 있는 '눈'의 존재가 역설의 방식으로 표출되어 왔던 것이 사실이다. 가면을 쓴 채 어린 시절의 경험을 추체험하는 작업「놀이터에서」나 가면을 쓴 채 보기(see)와 보이기(show)의 문제를 통해 자아의 정체성을 모색했던 작업「AUS」는 동일하게 시각성을 배제, 배반시킴으로써 시각적 인식의 문제를 심각하게 재고하게 하는 역설의 논리를 표방한다. 눈꺼풀 위에 가짜 눈을 그린 퍼포머들이 관객과 소통하는 작업「Stay Tuned」도 서로의 머리를 연결한 검은 가면을 뒤집어쓴 두 퍼포머가 서로의 손을 더듬으며 손금을 그려주는 내용의 작업「소통」도 앞서의 맥락과 닿아 있다. ● 퍼포머의 눈을 감금하고 시선을 배반시키는 행위를 통해 역설적으로 시선의 정치와 그 의미를 더욱 공고히 하려는 조형 방식은 김현주의 주요 전략 중 하나이다. 이를 통해 오히려 타자의 시선이 부활될 뿐 아니라 '몸'의 이데올로기와 위상은 더욱 강화된다. 마치 이것은 퍼포머가 벙어리 되기를 자처하는 논버벌 퍼포먼스(non-verbal performance)를 통해 '입 혹은 언어'의 의미를 역설적으로 공고히 할 뿐만 아니라 몸의 이데올로기와 위상을 더욱 극대화시키려는 것과 유사한 전략이다. 눈과 입이 탈각되어 몸의 전체성이 도드라지는 탓이다. ● 그러나 김현주가 탐구하는 몸의 전체성이란 시청각의 역할이 배제된 채 드러나는 몸의 촉각성이 결코 아님을 우리는 유념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전인적 몸으로 대별되는 주체적 정체성이다. 이를 위해 작가는 촉각성에 골몰하는 '옷을 벗은 몸'을 선택하기 보다는 '사물을 입은 몸'을 선택했다. 가면은 물론이고 사다리, 가방, 초, 테이블, 의자, 거울과 같은 오브제는 '몸의 이데올로기'를 강화하는 사물들이자 전인적 몸에 부여되는 '사회적 주체의 정체성'을 부연 설명하려는 사물들이다. 이번 전시에서 보이는 젊은 여자의 짐 꾸러미, 시어머니의 자개장과 그릇, 시아버지의 신문, 남편의 TV 역시 '몸의 이데올로기'와 '주체와 타자의 사회적 정체성'을 부연 설명하려는 사물들이다. ● 이번 전시의 작업들이 이전의 작업들과 크게 다른 지점이 있다면 '내러티브 구조의 드러냄'과 같은 조형언어의 외적 변모이기 보다는 다음과 같은 작가인식의 변화이다. 이전 작업들이 타자의 개념이 그다지 드러나지 않은 채 '개념적 자아의 정체성 모색'의 지점에 머무르고 있다면 이번 전시의 작업들은 타자의 출현이 선명하게 드러난 '사회적 주체의 정체성 모색'을 시도하고 있다는 것이다. '타자와의 경계를 위반하는 사회적 주체의 모색, 즉 '또 다른 나 찾기'라 결론지을 수 있을 것이다. ■ 김성호

Vol.20070529a | 김현주 개인展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