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슬리 Parsley

박재웅 회화展   2007_0515 ▶ 2007_0523

박재웅_열 다섯 개의 파슬리_캔버스에 유채_40×40cm_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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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7_0515_화요일_06:00pm

한전프라자 갤러리 서울 서초구 서초동 1355번지 한전아트센터 1층 Tel. 02_2055_1192 www.kepco.co.kr/plaza

일상 사이로 자아(自我)를 반추(返芻)하다. ● 그림을 접한 사람이라면 우선 왜 이런 연작 그림에 화가가 골몰하고 심지어 지리할 정도로 식물의 변화과정을 그려가고 있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먼저 들 것이다. 그 정물 연작의 해답은 먼 데 있지 않았다. 그가 그린 인물화를 통해 그 해답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정물 연작 시도는 화가의 손끝으로 우리의 눈에 형상화된 인물로는 그 인생 한 컷, 한 순간만을 담아낼 수밖에 없다는 자조적 불만에서 비롯되었다 하겠다. 파슬리 등의 다양한 정물 연작을 통해 화가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대상의 변화를 가감 없이 그대로 화폭에 담아낸다. 또한 화가는 정물이 그림 속에서도 꾸준히 변화하고 있음을 드러내기 위해 유화의 무겁고 짙은 색감을 최대한 배제하고 한번의 붓 칠로 대상을 묘사하여 가벼운 느낌 속에 살아있음, 즉 변화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이 기법은 인물을 그리는 데도 그대로 이어진다. 식물에 비해 단 시간에 그 노쇠함을 기록하기 어려운 인물 역시 짙은 덧칠보다는 거의 반투명하게 보일 정도로 얇게 채색하고 색상도 의도적으로 가볍게 표현한다. 정물에서 인물로 이어지는 화가의 화풍은 색감의 변화가 곧 주름과 인생의 질곡으로 표현된다. 이로 인해 그 그림 사이에서 우리는 무수한 연상을 떠올리고 피상적 정태를 통해 동적 감각을 느껴볼 수 있다.

박재웅_브로컬리 플라워_캔버스에 유채_18×24cm×10_2007

그는 하찮은 채소라 할지라도 하루하루 변해 가는 겉모습을 보면서 생명의 본질을 탐색했을지 모른다. 생명체의 본원에서 떨어져 나와 시간적 추이에 따라 변형되어 결국 죽을 수 밖에 없는 대상들은 화가의 정물대 위에서 새 생명을 부여받고 의인화되어 다시 화폭에 새롭게 탄생하고 소멸한다. 이러한 시공간을 경계로 화가는 정물 사이에서 사색하고, 그런 사이에 그 정물과의 거리는 좁아지고 결국에 가서는 사라진다. 그 과정 중에 정물은 변색되고 변형되어 처음 자기들이 지녔던 신선하고 투명한 색과 윤기 나는 질감은 퇴색되고 일그러져 간다. 그 뒤엔 결국 산화되어 가루가 될 것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 인간의 생로병사를 연상하면서 작가 자신도 함께 그 속에 융화되어 갈 것이다.

박재웅_네 가지 정물_캔버스에 유채_40×40cm×8_2007

화가는 대상을 객체로만 인식했던 것이 아니라 눈앞에 보이는 대상을 관찰하고 손으로 표현하는 사이에 자신의 모습을 형상화하려 한다. 주객(主客)이 하나되는 물화(物化)의 경지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박 화백의 정물 연작은 동양적 풍치(風致)를 고스란히 노정하고 있다. ● 지금으로부터 천년 전쯤인 중국 북송(北宋)시기 문동(文同)은 대나무를 그릴 때 그 성정(性情)을 깊이 간파하고서야 대나무를 자신이 추구하는 이상과 융화시켜 그려낼 수 있었다 한다. 이를 통해 화가 문동과 정물 대나무는 그림을 통해 하나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문동과 절친했던 소동파(蘇東坡) 역시 "대나무를 그리는 사람은 반드시 먼저 가슴속에 온전한 대나무를 얻어야 한다(竹必先得成竹於胸中)"라는 진리를 그와 교유하는 사이에 터득하였다. 화가가 실물과 똑같이 그려낼 수 있다고 해도 자연 속의 대나무를 그대로 재현시킬 수는 없을 것이다. 자연은 한순간도 멈추지 않고 끊임없이 변화하기에 그림을 완성하는 순간에도 그 대상은 벌써 변화되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참다운 대나무 그림은 사실적(寫實的)인 노력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작가가 자신의 가슴속에 체득한 대나무를 그려낼 때에 비로소 진정한 사생(寫生)에 도달하는 것이다. 이런 과정을 박재웅은 자신의 작품세계에 담아내고 있다. 화폭에 그려진 대상이 그냥 박제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생생함을 그림을 통해 내 몸에 느끼게 하니 말이다.

박재웅_외 삼촌_캔버스에 유채_35×35cm_2004
박재웅_모자도(母子圖)_캔버스에 유채_150×160cm_2004

그의 작품 세계는 겉멋에 함몰되어 외부 세계에서 진리를 찾으려는 구도(求道)의 외양적 모습이 아니라, 외계사물을 통해 자신의 참 모습을 찾아가는 득도(得道)의 내재적 수양과정이었던 것이다. 외양적 치장보다 그 실존의 단아함을 추구하는 화가의 손끝에서 내 마음 역시 저절로 맑아진다. ■ 최재혁

Vol.20070519b | 박재웅 회화展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