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갤러리 상 서울 종로구 인사동 159번지 Tel. 02_730_0030
피상적(皮相的) 존재를 바라보며 ● 이야기구조를 가지지 않는 그림을 통해 작가는 상징적으로 자신의 정신세계를 드러낸다. 물론, 어떤 미술가는 역사적인 또는 일상적인 사건을 소재로 채택하여 그림을 그리기도 한다. 하지만, 박재웅이 선택하는 대상은 아무런 말을 건네지 않는 정지된-줄기에서 떨어져 나온- 식물과 무표정한 사람들이다. ● 「네 개의 천도복숭아」, 「인물 좌상-K」, 「인물 좌상-H」. 그림의 제목들은 작가가 대상을 몰개성적으로 다룬다는 것을 알려준다. '열 두 개의 시간'도 마찬가지이다. 시간마저 박재웅에게는 셀 수 있는, 측량 가능한 대상일 뿐이다. ● 박재웅은 구상 미술의 깊이를 더하기 위해 아니, 좀 더 정확히 하자면 구상 회화에 대한 연구를 자유롭게 하기 위해 한국에서 서양화 학부를 마친 이후 중국에서 수학하였다. 이는 다분히 한국 미술계의 구상회화에 대한 편견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 작가는 물리적인 대상을 소재로 하여 그리는 구상 회화에 몰두하면서 자연스럽게 그 대상-식물,인물-의 존재론적 성격과 맞닥뜨렸을 터이다. 정물대 위에서 시간의 흐름에 따라 노쇠 하는 석류, 복숭아와 바나나 등은 변화 자체로서 자신의 본성을 드러내는 것으로서 자각된 것으로 보인다. 시간에 따라 변화하여 급기야는 형태의 완전 소멸을 가져올 미래를 그려내게 되면 '존재'의 무상성(無常性)은 작가가 대상을 파악하는 데 있어 거의 절대적인 관념으로 자리잡을 수 있었을 터이다. ● 작가는 시간의 흐름에 대한 기초적인 접근으로 변화의 상태를 12개 정도의 단위로 잘라 제시한다. 이렇게 순간을 포착해 놓는 작업의 나열로 작가는 식물이라는 대상의 존재 안으로 다가간다. 초기의 두터운 물감층은 점점 얇아지고 이젠 한번의 터치만으로 칠해져 한 겹의 물감층으로 대상을 묘사한다. 이 기법은 인물에 있어서도 연이어 적용된다. 식물처럼 시간의 흐름에 따라 그 노쇠함을 기록하기 어려운 인물은 거친 마띠에르가 얇은 그것으로 바뀐다는 점에 있어서만 식물연작과 연결된다.
그의 인물 작품은 이제 막 일정한 실험단계에 들어 선 것처럼 보인다. 식물과 마찬가지로 두껍던 물감층은 거의 반투명하게 보일 정도로 얇게 채색되고 색상도 의도적으로 깊이를 배제한 듯 가볍고 경쾌하다. 박재웅은 매우 과묵한 성격의 작가로서, 초기 그의 유화 작품들은 묵직한 덧칠과 대상에 대한 사려 깊은 관찰을 엿볼 수 있다. ● 그러나 2000년 귀국 이후 첫 번째 개인전에서부터 발표되는 작품들은 작가가 대상을 대하는 진지함과는 사뭇 다른 효과를 보여주고 있다. 유화를 얇게 쓴다는 점은 유화라는 재료를 자유롭고 독창적인 기법-예를 들면 수채화나 동양화의 투명한 느낌-으로 시도해 본다는 것에 초점을 맞추어 그 의의를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색조와 밀도에 있어 매우 가벼워지는 이유를 작품의 내용적인 면으로 접근하여 볼 필요가 있다. ● 이번에 발표되는 그의 인물작품은 여러 가지 기법의 습작기를 지나 점차 박재웅의 스타일을 찾아나가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작품마다 등장하는 인물은 고유한 성격과 개성을 지니지는 않는다. 유학시기 동안 식물과 인물을 다루었던 따스한 정감도 엿보이지 않는다. 피부색과 눈빛과 꼭 다문 입매는 형태만 다를 뿐 마치 매우 신경질적인 한 사람의 존재가 거푸집만 다르게 쓰고 앉아있는 듯한 느낌을 풍긴다.
박재웅이 포착하는 사물의 한 국면은 감정의 개입 없이 순간을 있는 그대로 포착한다는 점에서는 카메라 렌즈의 눈과 닮은 듯 하다. 하지만 정작 사진으로 보여지는 대상의 모습이 온갖 색상이 혼합되고 명암이 조절되어 시각적으로 하나의 통합된 대상이라면, 박재웅이 표현하는 대상은 지극히 표피적이다. 사물이 가지고 있는 그 표피만, 그 껍데기의 변화만을 포착하고 있다. 게다가 물감을 아주 얇게 발라 그 표피의 가벼움을 극대화하는 듯 보인다. 따라서 통일된 존재로 다가오기보다는 색과 붓질에 의해 분석되고 읽혀버린 존재로 다가온다. 이렇게 표면에만 집착함으로써 오히려 정작 대상을 충실히 묘사하는 전통적인 구상회화에 반하는 효과를 일으킨다는 것이다. 단순히 성실히 묘사하는 것을 거부하는 듯한 이 방법을 통해 과연 박재웅이 대상으로부터 길어 올리려고 하는 존재론은 무엇일까? 이렇듯 그가 그리는 식물과 인물은 여러 가지 요소를 통해 무게감을 상실한 채 평면 위에 납작하게 달라 붙어있는 것이다. ● 퍼즐을 맞추듯이 박재웅이 인물과 식물을 표현하는 방식과 효과를 살펴보면 그는 대상의 본성을 파악하기 위해 철저히 대상과의 거리를 두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중국 유학 중에 제작했던 작품에서 느껴지는, 소멸을 필연성으로 내재한 존재에 대한 연민과 따스함은 그 거리 두기로 인해 일단의 후퇴를 한 것으로 보인다. 대상에 몰입하지 않고 철저히 감정을 배제하면서 그는 표현의 몰입에서도 한 걸음 물러선다. 어쩌면, 회화로서 접근할 수 있는 대상의 본질에 다가서기 위한 제3의, 그만의 방법을 모색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순환의 고리를 따라가 생성을 이야기하기에 앞서 소멸을 앞두고 있는 존재는 그 무상함으로 인해 헛되다. 어쩌면 영원히 순환함으로써-12개의 연작의 숫자는 완전함. 상징적으로 부족함이 없는 수이다- 완벽할 수 있으나 그러기에 더욱 현상태는 상대적일 수밖에 없다. 게다가 자신의 유일한 정체성을 찾지 못하고 순환되는 존재는 허망하다. 시간의 변화함에 그저 내맡겨지는 존재는, 순간적인 외형으로만 비쳐지는 존재는 의미가 없다. 박재웅이 펼치는 존재론은 가녀린 외피에 자신의 본성을 도둑맞은 듯한 실재의 피상성을 꼬집고 있는 듯 보인다. 시간의 흐름을 표현하는 식물의 변화상도 변화 그 자체에 무게가 실려 있다. ● 그가 지독히도 얇게 매우 신경질적인 이미지로 대상을 표현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 작가는 세계에 관해 느끼는 바를 작품을 통해 표현한다. 표현 방식과 심리적인 효과에 있어 철저히 상징되는 존재의 피상성은 무엇보다 작가가 대면하는 현실의 얄팍함을 거울처럼 보여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존재를 싣지 않아도 시간은 흐르고 껍데기는 변화한다. 우리를 뒤덮고 있는 현실은 성찰의 노력을 담지 않으면 무의식적인 힘에 의해 밀려간다. 아직은 본성의 문을 두드리기 전에 뒤덮은 가벼운 표피를 그 민감한 감성으로 쏟아놓는 것은 아닐까? 작가로서 그를 주시해야 하는 이유는 그가 진지한 회화적 접근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그가 표현하는 인물은 아직 정제되고 날카롭지는 않지만 천천히 대상에 접근해 들어가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유화라는 물성에 대한 꾸준한 익힘과 새로운 시도에서 그렇고, 대상에 대한 일정한 거리 두기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피상을 포착하는 것과는 반대로 자신의 내적인 흐름을 따라 천천히 대상을 파고 들어가는 움직임을 보여주고 있다. 현실 속에는 진실도 존재하지만 허위도 많다. ● 실상처럼 보이는 허상도 많다. ● 결국, 박재웅이 추구하는 회화는 허상을 뚫고 진실을 찾아 표현해내는 모색의 과정을 통해 구현되어야 할 것이다. ■ 신혜영
Vol.20030610b | 박재웅 회화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