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dge

류호 사진展   2007_0425 ▶ 2007_0508

류호_The Edge_흑백인화_45×45cm_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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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7_0425_수요일_06:00pm

학고재 B1 서울 종로구 관훈동 100-5번지 Tel. 02_739_4937 www.hakgojae.com

사막의 선인장을 보며 사물에 대해 겸손해지기 ● 사진전시 서문이 시작하는 패턴은 세 가지가 있다. 첫째, '1839년 다게르가 사진을 발명한 이래로... '하면서 사진의 기원을 들먹이는 것이다. 2007년 대한민국에서 만들어진 사진을 논하면서 1839년의 프랑스를 왜 얘기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사진이란 것이 깊은 뿌리를 가지고 있음을 강조하고 싶은 심정은 이해는 한다. 하지만 번쩍이는 것이 모두 금이 아니듯이, 1839 프랑스와 2007 한국 사이에는 거의 아무 관계가 없다. 혹시 두 다른 시간대 사이에 어떤 비약이 존재할지도 모른다는 역사적 상상력을 아무리 팽창시켜도 말이다.

류호_The Edge_흑백인화_45×45cm_2006

두 번째 패턴은 '사진은 단순히 사물의 모사가 아니라...'로 시작하는 형이상학적 고담준론형이다. 사진은 천박하게 사물의 외관을 베끼는 복사기가 아니라 사물의 깊은 속에 숨어 있는 고매하고 비물질적이며 초월적인 어떤 본질을 찾아 헤매는 구도자의 지팡이란 얘기다. 유감스럽게도, 그런 글을 쓴 분은 사진으로 깡통이나 연필 같은 아주 단순한 사물을 베끼는 것을 한 번도 시도해 보지 않은 분이다. 더군다나 사물이라는 것이 복잡한 문화와 역사, 개인과 집단의 사이에서 부단히 변전을 겪으며 안팎으로 보이는/ 보이지 않는 면모들을 갖춘 변화무쌍한 것일진대, 단순한 사물이라니. 참으로 괘씸한 노릇이다. 자고로 사물을 얕본 사람 치고 크게 된 사람이 없었으니, 이 세상 만물의 이치를 작은 사물 속에서 꿰뚫어 본 자만이 학문의 진리를 깨우쳤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사진은 그런 진리에 도달할 수 있는가? 인간의 잔머리를 초과해 있는 사물들의 질서를 파악하고 묘사하면 사진도 진리에 이를 수 있다.

류호_The Edge_흑백인화_80×80cm_2006

세 번째 패턴은 사진의 본질을 논하는 식이다. 두 번째 패턴과 비슷하게, '사진의 본질은 ~한 것이 아니라 ~한 것이다'는 식이다. 그 짧은 전시서문에서 설파할 수 있는 것이라면 사진의 본질이 아주 간단하고 명료해야 할 것인데, 문제가 그렇게 간단하다면 이론이고 평론이고 필요 없을 것이다. 그냥 곧바로 사진의 본질로 파고 들어가면 되니 말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 세상의 본질은 직관적으로 날로 먹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수도 없는 성찰을 통해 절벽에서 떨어져 깨우친 듯한 통각을 통해서만 도달될 수 있는 것이니, 전시서문에서 다룰 수 있는 성질의 것은 아니다. 그것은 마치 엔진오일 바꾸러 온 손님에게 자동차의 본질을 설파하는 것과 비슷한 일이다.

류호_The Edge_흑백인화_45×45cm_2007

그런 세 가지 패턴을 피하면서 사진을 해석하기 위해서는 이미지가 생겨난 맥락들의 교차지점을 설명하여, 막연하고 말도 안 되는, 허위의 보편성으로 가득 찬 뜬구름 잡는 엉터리 도사 같은 식이 아니라, 특수하고도 개별적인 사정들을 파헤쳐 봐야 할 것이다. 류호가 사진 찍은 미국 서부의 바위와 선인장들이 검은 실루엣 속에서도 디테일을 잃지 않고 있는 것도 다 이유가 있어서이기 때문이다. 가장 큰 이유는 기본적으로 바위와 선인장이 인간보다 위대하고, 그 위대한 사물들은 욕망과 잔꾀가 미처 스며들지 못한 장엄한 땅에 영감 어린 빛 속에 고고하게 서 있기 때문이다. 그 사물들의 외관을 그대로 베끼는 것조차 쉬운 일이 아닌 것이다. 너무나 복잡한 천지신명의 조화로 태어난 사물들이니 말이다. 이런 것들을 사진 찍을 때는 포착한다거나(take, capture) 묘사(render, describe)라는 건방진 말을 쓸 것이 아니라, 사물들에 대해 경배한다고 해야 맞을 것이다. 안셀 애담스가 요세미티의 자연에 대해 경배하는 태도로 사진을 찍었듯이 말이다.

류호_The Edge_흑백인화_45×45cm_2007

류호도 사막 저 끝에서부터 새어나오는 빛에 온 몸을 씻기우고 있는 바위와 선인장을 사진 찍기 위해 한없이 자신을 낮추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 않고서야 선인장의 윤곽을 감싸고 있는 빛의 줄기가 그렇게 청정하게 빛나 보일 수가 없는 것이다. 앞서 사진의 특수하고 개별적인 사정이라는 말을 썼는데, 류호의 사진이 나오게 된 역사적 배경을 거슬러 올라가면 안셀 애담스 같이 자연에 대한 경배로 사진을 찍은 이가 나오고, 그의 대선배이며, 자연에 도전하는 인간의 숭고함을 빛과 그림자의 조화로 그려낸 칼톤 왓킨스도 있으며, 사진이 아닌 회화로 당시 미국사람들이 꿈속에 그리던 이상향을 그려낸 화가 알버트 비어스타트 등이 있다. 물론 자연의 사물을 추상적인 실루엣으로 표현한 폴 스트랜드와 마크 클렛 등 더 많은 근대의 사진가들이 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류호의 사진이 개인의 기호나 정서의 표현이 아니라, 자연을 대하는 수많은 맥락들이 만나는 교차점을 이루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게 해서 선인장의 가시 하나하나가 역광 속에서 빛나는 모습을 우리가 볼 수나마 있게 된 것이다.

류호_The Edge_흑백인화_45×45cm_2005

여기에 작용하고 있는 것은 사진의 본질이나 초월적인 형이상학적 가치가 아니라, 선인장이라는 사물이 가진 특징이 사진가 류호가 카메라를 들이댄 어느 시점, 어느 햇살을 받아서 온전히 드러난 모습인 것이다. 만일 다른 시점에서 카메라를 들이대면 전혀 다른 사진이 된다는 것은 빛에 민감한 사진가라면 누구나 잘 알고 있는 것이다. 즉, 같은 사진은 절대로 두 번 찍을 수 없는 것이다. 사물의 본질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빛 속에 모습을 드러낸 그 충실하고 치열한 순간이 있을 뿐이다. 아마도 류호가 사진 찍은 선인장은 선인장의 가장 솔직한 모습인지도 모른다. 대기를 채우고 있는 뿌연 안개나 먼지가 개입하기도 전에 순수한 빛을 받고 서 있으니 말이다.

류호_The Edge_흑백인화_45×45cm_2005

그 선인장들이 발견되기까지 많은 세월이 필요했으니, 그들의 집인 조슈아트리 국립공원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5천년 전 쯤인 것으로 추정된다. 처음 이 지역에 살았던 사람들은 핀토, 세라노, 세메훼비, 카휠라 등의 사람들이었으며, 그 뒤를 이어 1800년대 초반에 목동들이 들어와서 가축들에 물을 먹이기 위한 저수지를 만들기 시작한다. 그리고 금광이 개발되어 땅이 파헤쳐졌으며, 20세기 들어서는 자작농장을 가진 이주민들이 들어와서 오두막을 짓고 우물을 파고 작물을 심어, 근대적인 토지로 탈바꿈하게 된다. 1994년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넓이 8만 에이커의 조슈아트리 국립공원은 더 이상 순수한 처녀지의 자연은 아니며, 미국에서 가장 큰 도시 중의 하나인 로스앤젤레스에서 차로 세 시간 떨어진 곳에 있으며, 인간의 개입의 결과로 선인장의 수와 크기는 해가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고 한다. 사진을 찍는 이유는 무엇인가? 사물을 보존하기 위해서다. 사물을 얕보는 천박한 시선으로부터, 사물을 학대하는 난폭한 언변으로부터 사물을 보존하여 항상 빛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사진을 찍는 것이다. 사물의 거칠음과 아름다움을 모두 보존하는 것만이 인간이 잔머리의 감옥에서 벗어나서 광명의 세계로 나아가는 유일한 길이다. 다른 모든 것은 다 소용 없다. ■ 이영준

Vol.20070429a | 류호 사진展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