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이미지 속닥속다 Vol.20041211b | 이영기展으로 갑니다.
초대일시_2006_1123_목요일_06:00pm
금호미술관 서울 종로구 사간동 78번지 Tel. 02_720_5114 www.kumhomuseum.com
이영기의 화론(畵論) : 해석학적 개연성 자체의 매력, 또는 '너무나도' 인간적인 모호함 ● 이영기의 그림은 시각적이라기보다는 비시각적인 측면을 많이 가지고 있다. 그것은 그의 사유와도 깊은 관련이 있어 보이는데, 예컨대 그는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들이 더 중요하다"고 믿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적 맥락 안에서 작가는 보고 그리는 시각적 매개 대신, 체험과 느낌의 해석학적 상호소통에 훨씬 더 의미를 부여한다. ● 더구나 작가는 총체 인식에서 시각의 자율적 별개성이 가져왔던 위상에 그다지 동의하지 않는다 : "보이는 것이야 누구나 비슷하게(그렇다고 모두 같이 보진 않는다) 본다. 하지만 느낀다는 것에는 일단 자기 자신의 감정에 충실하고 솔직해야 한다." ● 이영기가 더욱 명료하게 동의하지 않는 또 하나의 예술론이 있는데, 그것은 주체의 생각, 이념을 고스란히 옮겨놓은 듯한, 소위 담론적인 그림들이자 설명조거나 설득조의 그림이다. 작가는 자신의 화론에서 다음과 같이 '그림은 결코 담론을 이끌어 내는 도구가 아님'을 분명히 한다. ● "자신의 생각을 그대로 드러내는 도구는 소설이나 영화가 더 적합하다. 그림은 소설보다는 시와 더 비슷하다. (...) 그렇기에 더 매력적인 것이며 다양한 감정의 울림을 일으키기도 한다." ● 그림은 냉정한 정보를 다루는 도구로선 적합하지 않다. 회화는 '자판만 두드리면 쏟아져 나오는 온갖 정보'를 위한 것으로선, 비효율적인 장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예술가는 자신의 주어진 분야에서 쉴 새 없이 지껄이는 지식인이 아니라, 우주 앞에서 함구하는 시인에 더 가까워야 한다는 게 이영기의 생각이다. 그러므로 작가의 그림들에서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없는 것은 그의 화론의 필연적인 귀결일 뿐이다. ● 작가는 많은 것들을 말하지 않을 뿐 아니라, 때론 거의 아무 것도 말하지 않는다. 많은 부분은 시작되지 않고, 많은 자리들은 그림이 종료된 이후에도 빈 자리로 남아있다. 물론, 많은 말과 설명과 제안이 반드시 많은 생각을 담보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은 생각이 오히려 빈 자리들에 의해, 즉 현학적 개념과 빼곡한 용어들로 된 화려한 수사에 의해서 보다, 해석의 여지로 둘러싸인 미완의 발화(發話)에 의해 더욱 추동된다는 것이다. 자신의 미학적 저변에 대해 작가는 이렇게 시적으로 함축한다 :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은 흰 바탕은 무엇이라도 그려질 수 있다." ● 작가는 무언가가 시작될 수 있는 시점, 가능태, 무한히 열려있음, 개연성 자체의 매력에 끌리고 있다. 이제 막 쓰기 시작한 텍스트, 바로 전에 나열되기 시작한 용어들, 불명료한 터치들, 희미한 채색.... 중요한 것은 시작 자체가 지니는 무한한 긴장감이다. 곧 훼손되거나 반감될 것이 틀림이 없는, 그 예민한 긴장감을 조금이라도 더 오래 유지시킬 수는 없는 것일까? 끝없이 가능성을 소모하면서, 종료, 대단원과 파국으로 치닫는 그 과정을 늦추고, 암담한 종료의 시점을 지연시킬 방도는 없는 것일까? 이런 맥락에서 이 영기의 그림은 단순한 미완(未完)이 아니다. 그것은 지나치게 완성을 중심으로 형성된 담론이다. 이영기 회화의 많은 부분은 미완이 아니라, 미시(未始), 곧 시작 이전인 것이다.
이영기의 이러한 화론, 명확하지 않으며 명쾌한 반전도 꾀하지 않는 것은 의미론의 차원에선 불가피 모호함과 불명료함의 원인이 된다. 이러한 유보적인 사유는 그의 작품 도처에서 눈에 보인다. 그가 십자가를 다루는 경우만 해도 그렇다. 십자가는 일반적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 수난의 역사적 기념이자 기독교도들에게는 구원의 상징이다. 죄인과 구세주, 고난과 용서, 사망과 부활이 교차하는 고밀도의 변증적 장이다. 하지만, 작가에게 그것은 그렇게 분명하게 정의되는 일반론과는 어느 정도 거리를 유지하고 있다. 그에게 그것은 수직과 수평의 긴장되는 교차가 역설적이게도 하나의 절대안정 점을 만들어내는 질서의 신비한 차원이기도 하다. 그렇더라도, 그것이 보편적으로 소통되는 종교적 상징과 전혀 무관한 것은 또 아니다 : "십자가, 직선과 직선 가로와 세로! 가 부딪혀 새로운 에너지를 볼 수 있다. (...) 신앙인들 중 몇 몇은 십자가를 보면 위안을 얻는다 한다. 나도 그럴 수 있을까?" ● 작가의 또 다른 고백처럼, 현 시대가 선악의 구분조차 어렵게 하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우리는 '과연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 진실인가를 묻게 되는' 수많은 상황들과 직면하게 된다. 세상이 바뀌어야 하는가? 물론 그럴 것이다. 하지만, 세상을 바꾸는 것은 적어도 당분간 작가의 관심사가 아니다. 그의 사유는 오로지 진실의 갈증에 기초하고 있을 뿐이다 : "난 (...)진실이란 것을 알고 싶고 추구한다." ● 이 영기는 정직하게 회의하고, 고통스럽게 자문한다. 그 질문들이 '문화적 제약' 안에선 답을 구하기 쉽지 않은 것들이기 때문이다. 이영기 회화의 빈자리는 '이 공란으로 남겨짐'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그러므로 당분간 그의 회화가 견고한 이야기나 세련된 형식적 질서를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은 결핍의 요인이 아니라, 진행형인 성취의 레토릭으로 독해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이 시대의 형식주의 미술은 그에게 의미 없는 세계일뿐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하나의 명료한 이야기를 들려준다는 것이 담지하는 권력의 작용 또한 반추해 볼 필요가 있겠다. 이런 맥락에서라면, 하나의 명료한 이야기로 우리를 사로잡지 않으려는 이영기의 태도는 '너무나도 인간적인'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 심상용
Vol.20061123e | 이영기 회화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