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일시_2004_1211_토요일_05:00pm
예일화랑 서울 강남구 신사동 585-11 삼마빌딩 지하1층 Tel. 02_548_0683
미술의 길을 묻다 ● 호감을 주는 그림의 요건은 무엇일까? 대략 두 가지를 들 수 있을 것 같다. 하나는 감상자를 편안하게 해주는 것이며, 두 번째는 우리가 보지 못하거나 소홀히 여기는 것을 다시 주목하게 만드는 것이다. ● 사실 불편함을 주는 그림을 좋아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 점에서 쉼과 여유, 아름다움을 갖춘 작품은 그것이 형상이든 추상이든 상관없이 감상자에게 사랑을 받기 마련이다. 한편 주어진 환경에 너무나 익숙하여 별 것 아닌 것으로 치부하는 사람들에게 화가는 실상의 중요성을 환기시킴으로써 그것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일깨워준다. 이때 미술작품은 실재를 더욱 소상하게 비추어주고 우리의 삶과 경험, 그리고 자연이 얼마나 큰 가능성으로 잠재되어 있는지 알게 된다.
이영기씨의 그림을 위의 분류에 따라 말하면, 아마 전자에 속하지 않나 싶다. 화면에 그려진 이미지나 형태는 없지만 그는 시간에 쫓기는 현대인들에게 잠시 여유를 주며 생각할 말미를 제공한다. ● 그의 작품은 비어진 공간이 많다. 말하자면 여백의 미를 살렸다. 여백은 채워지기를 기다리는 공간이지만 비어 있기 때문에 홀가분하다. 어떤 숙제나 일거리로부터도 벗어나 있다. 비어진 공간은 다시 말하면 유를 낳는 생성의 공간이며 침묵의 고요가 있는, 자신을 들여다볼 수 있는 자기성찰의 공간이다. 복잡한 생각을 가진 사람이 잠시 머무를 수 있는 처소요 고마운 쉼터라고 하면 어떨까? 이영기씨의 작업에 주목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 이번에 출품되는 작품들은 거의가 추상회화이다. 종전에 보아왔던 수묵 위주의 작업을 위시하여 아크릴을 사용한 것, 커피물이나 백토를 이용한 것 등 다채로운 평면작업을 선보인다. 고요한 내향성을 지닌 화면이며 거기에 잔잔한 색의 물결이 주위로 퍼져나간다. 소리가 메아리쳐 들여오는 듯한 공명과 잔음효과가 공간 안에 울려 퍼진다.
그가 사용하는 보라나 잿빛, 그리고 먹빛은 서로 다른 성질을 지닌다. 어떤 것은 화사하고 어떤 것은 서정적이며 또 어떤 것은 우아한 품격을 지닌다. 서로 다른 성질에도 불구하고 한가지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과시하는 대신 거듭된 연마로 충분히 정제되어 우러나온 색깔이라는 것이다. ● 이 고상함은 겉모습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내면의 질서와 조화에서 비롯되지 않나 싶다. 그의 맑고 고운 성정(性情)은 그림에서도 유감 없이 흘러나오고 있는 것이다. 인격이 곧 그림의 특성을 좌우한다는 말은 하도 들어서 진부하게 들리지만 그래도 그의 그림을 볼 때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 「또하나의 내일」,「내면의 소리」에 이어 작가는 「경계」 연작을 발표한다. 속도경쟁과 능률, 그리고 '기벽(奇癖)'을 추구하는 가치기준이 모호한 현실에서 그는 무엇이 진짜이고 가짜인지, 무엇이 아름다움이고 추인지, 무엇이 지킬만할 것이고 버려야 할 것인지 묻는다. 그의 물음은 예술의 기본 물음이고 또 자신의 작업진로를 좌우하는 핵심사안이다. 알 것 같기도 하고 모를 것 같기도 한 상태를 염두에 두고 '경계'로 부르지 않나 싶다. ● 그의 작업 중에는 뽀얀 잿빛으로 물들어진 그림이 있다. 흡사 비 오는 날 실내에서 바깥을 볼 때 창문에 붙은 빗방울 혹은 안개가 낀 호수를 보는 것 같다. 그러한 색상 위에 뾰족한 이미지를 넣어 화면에 긴장을 고조시킨다. 그런가 하면 어릴 적 해변이나 놀이터에서 모래장난을 하듯이 놀이성과 유희성을 갖고 천진난만하게 작업한 것도 있다.
이영기씨는 예술의 길을 묻는다. 정말 그가 가야할 길이 무엇인지 고민한다. 이 고민은 사실 그만의 문제가 아니라 이 시대를 사는 사람들의 커다란 관심사이기도 하다. 고민은 하되 여기에는 한가지 단서가 붙는다. 그것은 어중간한 '경계 자체'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그런 물음은 자신이 가야할 길에 대한 물음에서 비롯된 것이지 '끝도 없는 유동(流動)'이 목적은 아니기 때문이다. ● 미술 본연의 자리를 되찾아, 작품에 흡족한 미소를 띠며 아울러 행복한 미의 세계를 선보여줄 것을 소망해본다. 나는 이영기씨가 그런 용기와 역량을 갖추었다고 믿는다. ■ 서성록
Vol.20041211b | 이영기 회화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