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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6_1115_수요일_06:00pm
성보갤러리 서울 종로구 관훈동 192-14번지 Tel. 02_730_8478
의미와 무의미의 변증법 ● 햇귀를 머금은 흙돌벽 아래 개망초도, 저자거리의 소란스런 장사꾼의 외침도, 꽥꽥거리는 햇병아리 소리도 모두 언어였던 시절이 있다. 누구에게나 그런 시절이 있다. 그건 거창하게 말하자면 언어 이전의 시대, 역사 이전의 시대, 한 개인이 사회라는 울타리에 포섭되기 이전의 원형질의 시간이다. 누구나 한번은 이런 생육질의 시절을 겪었을 게다. 주위의 모든 소리와 풍경이 언어였던 시절 말이다. 그 시대에 우리는 무진의 아늑한 안개도, 홍천의 내린천도, 소록도의 푸른 사슴도 그릴 수 있었고 말할 수 있었고 노래할 수 있었다. 안개를 뚫고 지나가는 기적소리도, 품에서 듣는 엄마의 자장가도, 하물며 신의 섭리도 표현해 낼 수 있었다. 원형질의 세계는 언어의 도움이 필요 없었기 때문이다. 모든 게 예술의 원천이었고, 그래서 아무것도 예술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 예술은 존재자 그 자체, 현전이 필요 없는, 기표와 기의가 맞닿는 그런 세계였다. ● 언어의 탄생은 이런 개별자들의 이미저리를 모두 소거한다. 인간이 세상의 모든 사물을 호명하기 위해 만든 언어는 개별자의 독특한 질감을 없애고 오로지 인간이라는 주체의 집으로 개별자의 속성을 구속시켰다. 언어의 탄생은 주체를 탄생시킨 반면, 개별자의 이러한 싱싱함들을 오로지 하나의 개념 안에 포획함으로써 객체의 고유성을 죽였다. 이제 세상은 언어 없인 호명될 수 없고, 언어 또한 세상 모든 것들과 유사성 속에서만 작동하게 되었다. 이러한 여정 가운데 예술은 사물과의 유사관계 안에서 사유되어왔다. 이게 근대예술철학의 큰 덩어리다. 원형과 모사의 재현관계, 기표와 기의의 언표관계, 사유와 현전의 인식관계는 언어의 여정과 궤를 같이한다.
최정우의 「인식의 깊이」전은 이러한 언어를 시각화한다. 우리의 언어는 몇 근이고(이해의 깊이), 무중력의 언어는 사물의 현전만큼 무겁고(나는 진실만을 말한다), 언어는 자본의 무게만큼만 활발히 움직인다(나는 가난하지 않다). 사실 그의 작품에서 주체를 시각화하고 언표화한 '나'라는 주어는 탈근대 이후 끊임없이 해체된 주체, 즉 현존재를 적나라하게 복원한다. 그의 작품에서 주체는 벌떡 살아난다. 마치 미술사의 궤적을 다시 거꾸로 돌려놓는 듯 말이다. 그러나 작품 자체엔 주체의 흔적은 사실 없다. 오직 언어의 사라진 흔적, 혹은 무게, 무중력의 이미지만 있다. 최정우는 존재하면서 부재하는, 결코 기의에 도달할 수 없는 언어의 속성을 시각화한다. 우리의 일상 언어가 갖는 언어의 기능, 즉 의미전달이라는 원초적 기능에서 실패한 언어의 패잔병을 시각화한다. 의미의 무의미함! 마치 마그리트의『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처럼 그의 작품은 의미의 언어를 사실적으로 재현된 이미지 속에서 무의미의 언어로 전복시킨다. ● 비트겐슈타인의 말대로, 말할 수 없는 건 침묵해야 한다. 윤리, 종교, 그리고 미학 같은 과학적 명제로 규명할 수 없는 경우 말이다. 비트겐슈타인은 형이상학적 언어를 완벽히 배제한 과학적 언어로 세계를 그림처럼 그려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과학적 언어로 그림 그리기! 이는 작가 최정우가 작품 속에서 구현하고자 하는 것이다. 누구나 진실만을 말하거나 말하려고 한다, 고 생각한다. 언어의 진리란 서두에 말했듯 사물과의 유사성 속에서 찾아진다. 그러나 언어가 사물의 사물성을 온전히 드러내주지 못할 때 우리의 언어는 나약하다. 또한 그러한 언어의 성격을 표상한-재현의 재현-작품 역시 어떠한 기의와도 맞닿을 수 없다. 애당초 없는 기의, 의미, 원본에 대한 과도한 집착은 오히려 정신분열증을 낳는다.
작품의 의미는 결코 작품 속에 단번에 현전되지/하지 않는다. 의미는 작품 속에 존재하면서 부재한다. 『인식의 깊이』는 깊이 있는 인식만큼 허허롭다. 우리의 언어는 결코 현전에 도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오로지 그때그때 차이만을 드러내는 순간이 무중력의 언어가 의미를 획득하는 순간이겠다. 최정우의 작품 역시 가장 이성적인 기계인 저울과 감성적인 언어를 충돌시킴으로써 의미가 폭발하게 만든다. 일상적이고 개인적인 언어-"나는 진실만을 말한다", "나는 가난하지 않다"-는 공유된 일반적인 언어로 결코 재거나 달 수 없다. 이 끝없는 의미의 미끄러짐 속에 작품은 부단히 의미와 무의미를 재생산한다. 의미의 무의미의 의미! 일상언어는 과학언어(저울)로 논증될 수 없다. 그건 합리적이지도 않다. 그건 세상을 언어로 도단하고 구속시키는 이성의 폭압이기에 그렇다. 우리의 눈물과, 가슴과, 호흡은 언어밖에 있기에 그렇다. ■ 정형탁
Vol.20061121d | 최정우 조각설치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