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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6_1115_수요일_06:00pm
학고재 서울 종로구 관훈동 100-5번지 Tel. 02_739_4937 www.hakgojae.com
시원적 자연의 모습 ● 투명하고 담백한 청색과 녹색의 색채들이 화면 전체에 물처럼 흐른다. 비가 내리는 숲 속 풍경이 연상되기도 하고 잔잔한 수면에 떠도는 기운, 혹은 공기 중에 산개되어 퍼져나가는 기체의 흐름이 감지되는 듯도 하다. 다분히 서정적인 정취가 물씬거리는 화면에는 모종의 기운들이 운무처럼 번져나가고 조심스레 감지되는 활력이 화면 전체를 원형으로 감싸고 돈다. 이런 화면 구성과 운용은 이 작가의 초기작부터 일관 되게 유지되고 있다. 그것은 동적이고 시간성이 감촉되는 한편 생성적인 느낌을 강하게 자극한다. 근작은 자연과 생명체를 보는 시각이 부드럽게 녹아 유동적으로 흐르고 잔잔하고 시적으로 조율되고 있다는 인상이다. 꽃과 무수한 생명체들이 겹쳐져 구분 없이 공존하면서 다성의 울림을 준다. 물기로 적셔진 화면과 어울려 그 소리는 물소리, 새소리, 바람소리 등 자연계의 모든 소리들을 길어 올린다. 조심스레 들여다보면 사찰의 문창살이나 바시미 구조로 접속된 건축의 한 부분들, 또는 단청을 연상시키는 색채의 배열을 머금은 일정한 패턴들과 꽃과 새 물고기 등이 어우러져 무성하다. 꽃의 형상 사이로, 그려진 부분과 여백의 틈으로 무수한 생명체들이 연쇄적으로 잇대어있다. 자연과 인공의 흔적들이 공존하는 이 풍경은 거대한 고리로 연결되어 있어서 마치 숨은 그림 찾기를 하듯 이미지를 발견해내려는 시선들이 부산하다.
나팔꽃과 같은 형태를 지닌 꽃의 형상이 나무젓가락을 이용해 그려져 있고 그 주변은 엷은 채색이 반복해서 공간을 채워나갔다. 부분적으로 짙게 뭉쳤다가 물처럼 흐르고 다시 비처럼 내리다가 멈춰있는 형국이다. 모필과 나무젓가락이 만든 이질적인 선으로만 채워진 화면인데 결국 작가는 선이란 동양화의 중요한 요소를 거듭 부각시키면서 그 쓰임의 차이를 고려하고 있다는 인상이다. 특히 모필의 신체성을 벗어나 끊어질 듯 이어지면서 자아내는 예민하면서도 날카로운 맛을 드러내는 선이 쓰임이 두드러진다. 그것은 모필 만이 보여주는 부드러운 흡수, 일획의 단호함, 먹의 스밈과 번짐이라는 전형적인 방법론과는 다른 차원에서 기능한다. 펜으로 찍힌 잉크처럼 먹물들이 일정한, 제한된 시간 안에 자신의 운명을 다하면서 짧고 단속적인 선들은, 자취를 남겼는데 그렇게 그려진 윤곽선은 드로잉만이 감각적인 맛으로 충만한 편이다. 이처럼 붓을 벗어난 선의 맛은 예측하기 힘들고 우연적이면서 자연발생적인 효과를 발생시킨다. 자연스럽게 화면을 운영하면서 선의 색다른 맛들을 찾아나가고자 하는 것이 작가의 의도인 것 같다. 그러니까 단속적이며 짧게 이어진 바탕을 채운 선/채색과 먹을 찍어서 그어나간 자취들은 한 화면에 이질적으로 공존한다. 다시 그 위로 낙수처럼 흐르고 튕긴 자취, 얼룩들이 덮어나간다. 물기를 가득 머금은 바탕의 색칠, 다소 굵고 짧은 붓의 흐름과 뾰족하고 건조한 선들은 선의 다양한 운용을 대비적으로 보여주는데 특히 후자는 촉각성을 강하게 드리운다. 나무젓가락이란 도구에 의해 선은 화면에 단호한 선으로 남아 스며들거나 번지는 바탕과 대비를 이룬다. 이런 선의 대비적 쓰임과 효과는 마치 다양한 생명체들이 공존하는 자연계와 한 쌍을 이루며 그림을 지탱하는 방법론적 수단이 되어주기도 한다.
이 작품에서 보이는 자연은 전체가 생명으로 가득 차 있다. 생명철학에 따르면, 이러한 생명은 바로 우주의 본질이다. 우주의 본체는 하나의 커다란 생명인 것이다. 자연 속에서 수목, 동물, 인간으로 대별되는 생명을 지닌 자연적 대상들과 문양들이 서로 뒤엉켜서 제시되고 있다. 무엇보다도 그 대상들은 완전한 형상을 갖추지 못하고 형성되기 이전의 시원적 생명의 상태를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커다란 자연의 본질인 생명의식은 창조의 원동력으로서 끊임없이 생생(生生)하여 현상세계의 만물을 이루게 될 것이다. 자연은 멈추지 않고 오묘하게 운행을 계속하여 모든 것이 자연과 함께 끊임없이 생성. 변화하게 된다는 것이다. 작가는 그런 인식을 순환적인 화면 구성과 전면적인 시각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 특히 중심과 주변의 경계가 지워진 체 얽히고 연결되어 또 다른 존재로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 복잡한 구성은 무엇보다도 공간에 활력을 주고 단일한 시점의 배열에서 벗어나 화면 전체를 시선으로 받아들인다. 어쩌면 이런 시방식은 전통회화, 특히 민화 등에서 엿보이는 자유, 자재로운 시점의 이동을 차용한 결과이면서 이를 새로운 공간해석으로 발전시켜나간 자취로 다가온다. 따라서 화면을 이루는 모든 것들은 충일한 생명체 마냥 유동한다. 생성적인 화면이 된 것이다. 작가의 화면에 들어온 모든 것들은 살아서 움직이는 하나의 생명체로 변신하고 그 모든 것들은 생명으로 충만해 보인다. 덧붙여 원초적인 자연의 카오스적인 상태 또한 은연중 드러낸다는 생각도 든다.
전체적인 인상은 자연계의 모든 생명체가 평등하게 조화를 이루는 장면이다. 화면 공간을 부유하는 듯한 물고기, 생활 주변에서 흔히 발견되는 나무와 꽃과 새, 건축의 한 요소들이 서로 어우러져 있다. 여기서 모든 대상은 해체되고 종합된다. 모든 것을 카오스 상태로 환원시켰다가 서서히 새로운 질서를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이 같은 해체와 분해를 좀더 적극적으로 해석하자면 인간 중심적인 시각과 입장의 해체이자 분열로도 보여진다. 그러니까 삶은 인간의 삶이 아니라 만물의 그것으로 치환되며, 인간은 우주만물의 극히 작은 한 부분으로 등장하는 것이다. 인간의 눈으로 대상을, 자연을 바라보고 질서 지우고 재단하는 것이 아니라 동물과 식물의 눈으로 자연을 바라보고, 자연의 눈으로 인간을 바라보는 전도된 시각이 엿보인다는 것이다. 이는 단순히 만물을 평등한 모습으로 등장시키는 차원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범신론적인 사유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생명체 모두를 포용하며, 그 포용된 것을 주객으로 분리할 수 없는, 저마다의 독자적인 절대가치를 인정하는 세계를 지향하여 자연과의 조화롭고 평등한 관계를 이룩하게 하려는 의도가 담겨져 있다고 말 할 수 있지 않을까? 인간과 생물에게만 생명이 있는 것이 아니라 우주만상이 모두 동등한 정령을 지니는 생명체로 등장하며 그것들은 서로 융화하고 침투하고 또 변형되기도 하는 것이다. ● 따라서 이 그림에는 일정한 방위가 없고 원근법적 거리 개념 또한 상실되면서 지속해서 뒤집어지기도 한다. 화면 속 사물들은 하나로 엉켜 순환하고 있고 분리되지 않는다. 일상적인 시, 공간의 구분이 지워진 상태에서 모든 것들이 혼재되어 있다. 그 모든 것들은 결국 하나이다. 좀더 의미를 부여하자면 모든 존재는 모두 내재적 가치를 지니며, 온 우주에서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말이다. 작가의 근작은 그런 인식이 심화되어 가는 도정에 자리하고 있으며 그 위에 여전히 필선의 쓰임과 묘미, 수묵과 채색이 융합 등을 독자한 방법론으로 풀어내려는 시도가 함께 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 박영택
Vol.20061115d | 남정식 회화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