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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6_1107_화요일_05:00pm
후원_한국문화예술위원회
가산화랑 서울 강남구 청담동 9-2번지 Tel. 02_516_8888 www.gasan.co.kr
"새로운 예술은 조화로운 아름다움의 관조가 아니라 고통스런 쇼크의 체험이다? "(테오도르 아도르노) ● 작가 강성원의 작업실은 서울에서 아주 멀리 떨어져 있었다. 충남 논산시 양촌면에 있는 초등학교 분교가 폐교된 자리다. 전에는 한국 문화예술 진흥원소속 이었으나 지금은 논산시에서 관리한다고 한다. 아주 넓은 운동장은 말라버린 잔디와 새로 올라오는 것들이 겹겹이 쌓여 마치 폭신한 융단을 밟는 기분을 만들어 주었고 한쪽 편에는 녹이 쓸어 허물어져 가는 축구 골대가 덩그러니 서 있다. 수도는 녹이 쓸고 고장 나 물을 길어다 놓고 써야 하는 처지지만 주변 풍광은 싱싱하고 상쾌했다. 자연은 스스로 나고 죽어 가지만 그 모든 과정이 추하게 보이지 않으나 인공물이 삭아 가고 허물어지는 모양은 처절한 느낌을 자아낸다. 교사 옆 한 모퉁이에는 텃밭이 있어 고구마가 수확기를 놓친 채 익어 가고 있다. ● 작가는 이층으로 된 교사의 맨 끝자락의 교실 하나를 통 체 작업실로 쓰고 있었다. 여기에서 살기 시작한지도 벌써 10년이 되었다고 한다. 사연인즉 작가가 치루어야 했던 눈에 보이지 않는 희생 또한 이만 저만이 아니다. 그 중에서도 작가를 끝내 악몽으로 몰아 넣었던 것은 서울 화단과의 쌍방향 교류가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고 처음에는 예상치 못했던 이 문제가 주는 후유증은 날이 갈수록 돌이킬 수 없는 벽으로 다가온다고 한탄한다. ● 필자는 3년 전 인사아트센터에서 그의 개인전을 참관한 것이 계기가 되어 자청하여 이곳을 방문한 일이 있었다. 이곳을 처음 방문하였을 때는 그는 덜렁 혼자 관사로 쓰이던 집과 이층 작업실을 오가며 5천 평이 넘는 황량한 공간을 지키고 있었는데 당시에는 미술가로 살아간다 것이 얼마나 엄혹한가를 새삼 일깨워주는 살풍경이었고 이러한 황량함이 작가의 그림세계와 무언가 서로 어울린다는 느낌도 받았던 기억이 새삼 떠올랐다. 이번 두 번째 방문 시에는 입주자들이 늘어 제법 사람 훈기가 나는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고 작가가 머무는 학교 관사에는 흰 색깔을 한 진돗개 모자가 한 가족으로 편입되어 있어 분위기가 한결 부드러워져 있다. 그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이미 이곳의 터줏대감으로 정을 부치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작가의 작업실에서 맞이한 다가올 전시회를 위해 제작해 놓은 근작들은 150호 가량 되는 대형 화폭의 작품들로서 전시회 제목에서도 풍겨주고 있듯이 인류문명의 파탄을 연상시켜주는 폼페이(Pompeii) 폐허에서 건져 올린 토기들을 다양하게 변형한 것을 중심으로 인간의 환락과 타락과 멸망을 상징하는 사물들의 용해와 해체로 이르는 단면들의 암영을 잡아내고 있다. 언뜻 보기에는 이 세계가 무너져 내리는 듯한 광경을 묘사한 그림 앞에 서게 된 필자는 먼저 그 이미지의 총체적인 메타포가 주는 기에 압도당하게 되고 작가가 내 세우고 있는 '타락'과 '파멸'의 비전에 전율을 느끼게 된다. 요한 묵시록 안에 기술되어 있는 사치와 음탕함으로 하느님에 의해 유황불로 징벌을 받아 멸망한 소돔과 고모라, 바빌론의 패망, 단테의 신곡에 나오는 지옥도의 이미지가 바로 오버랩된다. 필자가 어린 시절 일제시대 말기쯤 언젠가 동네의 빈터에 천막을 치고 인간이 죄를 지으면 그 죄과대로 지옥에서 온갖 징벌을 받는 광경들을 아주 사실적으로 그려 놓은 만화경을 본 일도 떠오른다. 그때는 볼거리가 없을 때라 이런 징그럽게 그려 놓은 그림들도 보는 재미가 있었다. 그 시절에는 영화광고의 서툰 간판의 그림조차도 흥분과 기대를 잔뜩 부풀어 놓는 힘을 가지고 있었고 근사하게 보였던 것이다. ● 아도르노가 말한 그림 앞의 "고통스러운 쇼크"가 바로 이런 것인가 싶었다. 작가 강성원의 작품들은 민중을 교화시키기 위한 종교서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삽화나 명상을 유도하는 만다라와 같은 도상화와는 달리 한 시대를 살아가는 작가가 그가 살고 있는 사회의 불의에 대해서 그 위선에 대해서 더 나아가서는 인간존재의 숙명적인 원죄에 대한 아주 실 랄 한 고발로 일관하고 있다. 이러한 어둡고 소름이 끼치는 이미지로 근 십여년을 일관해 온 작가의 화업과 장인정신이 범상치 않다. 한 작가의 양 심적 호소의 문제를 휠씬 뛰어 넘는 일종의 숙명에 와 닿는 예술가의 끈질긴 집념이다.
그의 작품들은 주제가 이러하니 대부분이 대형 화폭을 필요로 한다. 이번 폼페이의 인상은 전부가 연작으로 볼 수도 있다. 같은 계열의 독일 신 표현주의 거장 안젤름 키퍼(Anselm Kiefer)의'독일정신의 영웅들'이란 작품은 폭이 7 미터가 되며 다른 설치물 들은 그 경계가 없을 정도로 넓은 공간을 활용한다. 이런 대형화 경향은 시각을 교란하기 위함이 아니라 사람의 넋을 빼 버릴 정도로 그 성스러움, 엄숙함, 실재감을 전달하기 위해 사용하고 있는 수법이다. 아름다운 것만 성스러운 것은 아니다. 성스러운 것이 모두 아름다운 것도 아니다. 인류는 이미 자연이 주는 아름다움을 벗어나 공학적이며 소비적이며 사치스러운 곳에서 쾌락적 아름다움에 탐닉해 있다. 오죽 했으면 20세기 미술계를 주름잡던 요셉보이스(Josep Beuys)가 현대문명의 산물인 날씬한 제트기, 잠수함, 미사일등이 피카소의 큐비즘에서 자신의 쓰레기 같은 작품에 이르는 모든 현대미술 작품 보담 휠씬 더 아름답다"라고 탄식하였겠는가! 성당 제단의 넓고 높은 공간을 상상해 보라. 중세 고딕건축물의 첨단을 상상해 보라. 모든 숭고한 것은 그렇게 높게 장엄하게 다가오는 법이다. 그러나 역시 모든 웅장한 것이 모두 숭고한 것은 아니다. ● 작가 강성원의 일군의 근작들은 작가의 기독교적 사고가 베여있다. 그러나 그것이 어떤 경직된 교조적 관념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그의 독자적인 해석에 의해 견지 되고 있는 기독교적 패러다임이다. 그래서 그의 그림들은 신을 상실한 아나키적, 허무주의적인 관점에서는 벗어나 있다. 그가 증언해 내고 있는 인간의 악덕 타락 원죄의식이나 절대자와 우주의 선적 패러다임에서만 빚어질 수 있는 인간의 윤리적인 파탄에 대한 종말론적 심판을 의식하고 있는 것이 그렇다. 그러나 그의 그림세계는 종교성을 수용하고 있지 종속되어 있지는 않는다. 그래서 그의 표현되어지는 이미지들은 모두가 실증적 역사성을 깔고 있으며 '종교화'는 아니다. 안젤름 키퍼 역시 그가 다루웠던 다양한 문제들이 대부분 종교성을 띠고 있는 화제들이지만 인간의 역사적 사실속에서 그 모티브를 얻고 있다. 인간문제를 문명적 차원에서 심도 있게 천착하려면 종교성을 배제할 수 없다. 모든 문화적 컨텐츠가 예술을 위해 동원할 수 있고 연계되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필자는 강성원의 작품의 예술적 특성들을 작품을 제작하는 과정을 포함하여 그 저변에 깔려 있는 작가의 끈질긴 기독교적 실존의식과 세계관, 그의 인간 됨의 품성, 작품의 미학적 이디엄들(여기서는 그가 수학할 당시의 독일 신 표현주의의 스타일)을 모두 헤아리는 관점에서 그의 작품들을 보고 싶어지는 것이다.
폼페이의 인상에 등장하는 작품들은 각기 독립된 함의를 품고 있는 형상들이 그 고유한 상징성이나 우의를 품고 존재하고 있고 이를 전체로 통합하여 몽타주식으로 하나의 서사성이 짙은 메타포로 읽을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다. 몽타주는 원래가 영화의 정서적 효과를 극대화 하기 위해서 발명된 작법이다. 그러나 고정된 화면 속에서 서로 이질적으로 다른 표상이 구성적으로 전체에 통합되어 지는 전체의 함의와 조응이 필요해 질 때도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효과를 극대화하려면 이러한 고정된 하나의 화면 속에서 통합된 의미 망 혹은 비전을 보고 있어야 한다. 작가가 보고 있는 것은 인간행태의 시작이 아니라 끝에 자리하고 있는 몰락의 비장미다. 이는 마치 대하 소설의 구조와 비슷하다. 많은 서로 다른 이야기들이 내를 이루고 흐르다가 큰 강물로 흘려 들어가는 과정을 떠 올려 보면 쉽게 이해가 가지 않을까. 강물은 그 수원이 되어 주는 숲속의 개울물에서 많은 이야기를 보고 듣고 흘려오지만 커다란 대하로 합일된 후에는 또 다른 넓고 깊은 세계를 보고 새로운 이야기를 듣는 이치와 같다. 필자는 이점이 추상미술이나 개념미술과 신 표현주의의 그림들이 서로 확연히 다른점이라고 생각한다.
작품속에 이야기를 다시 복원시킨 것이 신 표현주의의 특징의 하나다. 순수 추상이거나 극단적으로 정제된 미니멀리즘 혹은 개념미술에 반기를 들고 이러한 서사적인 어법의 변용을 새롭게 보기 시작한 것이 전후 독일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던 신 표현주의였다. 십자가란 아주 추상적인 막대기 기호와 구상성을 띠고 있는 아이콘(icon)이란 성화가 서로 다른 어법으로 하나의 진리를 전달하는 차이와 같은 이치다. 그래서 포스트 모더니즘 일변으로 달려 나간 20세기 현대 미술에 제동을 걸고 다시 구상과 캔버스로 돌아 온 것이 신 표현주의다. 이 반동의 흐름속에 독일적 정체성의 문제가 내재해 있는 것이다. 당시 독일은 이차세계대전에서 함몰하다 시피 해체되어 그 정체성을 완전히 상실하였었다. 승승장구하던 미국이나 연합국들의 포스트 모던적인 화풍이 역으로 자신들의 고유한 문화컨텐츠를 구축하는데 방해가 되는 것을 알게 된다. 신 표현주의의 세례를 받은 강성원의 그림 역시 그렇다. 그의 그림에 자주 나오는 동물들은 각기 그 고유한 자연적인 생태학적 실재를 갖음과 동시에 이를 작가가 부여한 우의에 의해 지엽적인 줄거리로 독립된 서사성을 갖고 있으면서 통일된 전체의 메타포에 편입되어 있다. 요한 묵시록 속에 많은 동물들이 우의적으로 등장하는 사실을 연상시켜준다. 따라서 동물들은 그 본래의 구상성을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 사슴의 경우를 예로 들면 사슴은 완연한 구상으로 잡혀 있기 때문에 독립된 이미지로 나타나고 작가는 사슴이 갖고 있는 자연 생태적인 습성 중 무언가 불길한 파멸적인 진동을 예지한다던가 인간에 의해 일방적으로 회생되는 연약한 동물이란 함의를 안고 있다.
인간이 그 존재의 역사적인 맥락을 무시하고 자기 존재의 정체를 정립할 수 없다는 것이 미술에서의 신 표현주의의 주장이며 인간이 저질러 온 온갖 악덕은 그 역사적인 사실을 구체적으로 가시화하지 않고서는 진정한 반성, 참회 용서, 화해 ,평화를 기약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신 표현주의에서는 個가 있고 따로 보편이 있는 것이 아니라 個別性이 구성하는 요소 자체가 보편이며, 보편이란 장과 상황에 따라 개이면서 보편으로 출몰하는 마치 현대 물리학에서 파악하고 있는 아원 자의 정체성이 장에 따라 달라지는 현상과 같다. 보편을 역동적이며 실제적으로 인식하지 않을 때 오히려 그것은 보편이 아니고 이데올로기나 변질된 개가 되 버린다. 일본이 전후 반세기가 지난 오늘까지도 자신들이 일으키고 많은 무고한 사람들을 처참하게 죽어가도록 해 놓은, 아직도 전후문제의 종결을 이루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그들이 안고 있는 개별의 순수성과 보편의 범용성의 이치를 국가적인 차원에서 깨치지 못하고 있는 탓이다. 그들의 우익적 관점은 매우 국수적으로 폐쇄되어 있는 일본적이지 세계 보편적이라 할 수 없다. 역사란 먼저 수 많은 이야기로부터 다가 오는 것이 아니던가. 이야기 속에는 개와 보편이 부재하다. 혼유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아예 없기 때문이다. 모든 예술의 본질이 그러듯이... 신 표현주의와 역사가 필연으로 만나는 접점의 미학적 합당성도 이런 것이다.
인간 문명의 주락을 상징하는 비장함의 아름다움도 경우에 따라서는 어떤 긍정과 창조 혹은 부활 혹은 화해와 구제의 코드가 함께 숨어 있게 마련이다. 기독교에서는 죽음과 부활을 선적 패러다임으로 풀어가는 반면 불교에서는 멸과 공을 함께 보는데 순환적인 관점에 서서 인간의 존재감 존재이유를 살핀다. 기독교의 구제는 말씀(message)으로 오고 불교의 구제는 자기 비움 무화에서 觀으로 온다. 그 포교의 과정에서 각기 다른 '지옥도' 란 칼자루를 갖고 사람들에게 겁을 준다. 작가 강성원의 작업은 내일을 보기 위해 그 처음도 보아야 하지만 그 끝도 헤아려 볼 수 있어야 한다는 역동적이며 변증적인 발상에서 건져 올려진 이미지들의 집적이 품어 내는 말씀들이다. 곧 그것은 서사이며 이야기로 오는 것이다. ● 이는 타자를 위한 작업이지만 작업과정의 변증적이며 역동적인 해석으로 비 자기화된 또 다른 강성원이란 타자가 자아의식을 품고 있는 본래의 강성원이란 존재를 그 소름기치는 드라우마에서 건져 올려 구원해 내는 작업으로 볼 수도 있다. 이러한 내적 변증의 과정이 둔감해 지면 작품의 예술성이 떨어지게 마련이다. 마치 작품을 감상하는 관객들에게도 작가 못지 않게 더 깊고 유효한 창조적 해석을 할 여지를 안겨 주는 신선한 모티브가 살아 있어야 하듯... 예술가로서의 강성원이 있다면 자기 작품의 1차적인 감상자로서 강성원이 존재하고 있을 터. 작가 자신이 자신의 예술속의 전체적인 과정을 거치면서 스스로 구원을 얻지 못하는 어떠한 작업도 보편성을 획덕할 수 없다. 그 구원의 문제도 어떤 고정된 관념으로 굳어져 있어서도 안된다. 구원은 끝이며 시작이 항상 새롭게 등장하지 않는가. 그래서 끝도 항상 시작에 의해 그 명운이 달라지는 것이다. 필자는 안젤름 키퍼가 노후에 와서 독일을 떠나서 불란서에 정주하면서 전혀 다른 요가 같은 비독일적인 테마에 빠져 들어가 '소우주와 대우주 (microcosm 와 macrocosm)'로 상정되는 인류 보편의 문제에 새로운 지평을 열어 가고 있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이전의 작업의 필연적인 연장선상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 조규현
Vol.20061111d | 강성원 회화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