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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6_1018_수요일_05:00pm_사비나미술관
후원_경기문화재단
관람시간 사비나미술관 / 10:00am~06:30pm / 월요일 휴관 가일미술관 / 10:00am~06:00pm / 월요일 휴관
사비나미술관 / 2006_1018 ▶ 2006_1126 서울 종로구 안국동 159번지 Tel. 02_736_4371 www.savinamuseum.com
가일미술관 / 2006_1201 ▶ 2006_1220 경기도 가평군 청평면 삼회리 609-6번지 Tel. 031_584_4722 www.gailart.org
가면의 정치학, 가면은 어떻게 얼굴이 되는가 ● 푸른 나라, 푸른 연합, 푸른 운동회, 푸른 자살, 푸른 자화상, 푸른 풍경, 이렇듯 양대원의 근작의 주제는 온통 푸르다. 그러나 정작 그림은 푸르지가 않다. 푸른 그림이 없지는 않지만, 적어도 그것이 근작의 형식을 결정짓는 것 같지는 않다. 사실 푸른 그림이란 언어적 용법 즉 비유적 용법으로 도입된 것이다. 지금까지 작가의 전력으로 봐서 푸른 그림이란 반어법적인 의미를 함축하고 있으며, 비판의식을 내장하고 있다. 결국 작가가 하고 싶은 말은 붉은 나라, 붉은 연합, 붉은 운동회, 붉은 자살, 붉은 자화상, 붉은 풍경이다. 따라서 푸른 그림은 사실은 붉은 그림으로 뒤집어 읽어야 한다. ● 그 이면에는 푸른색과 붉은색에 대한 상징적 도식이 놓여 있다. 푸른색은 선한 것이고, 붉은색은 악한 것이라는. 푸른색은 이상이고, 붉은색은 현실이라는. 비록 붉은 악마들에 의해 붉은색에 깃들어 있던 빨갱이, 공산주의, 반공사상이 많이 희석되긴 했지만, 한편으론 붉은 악마란 것이 운동이라는 상징을 통해 경쟁의식과 경쟁사회의 판을 더 확대 적용시키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림에서 보듯 비록 붉은색의 대상이 북한으로부터 미국으로 옮아갔지만, 이때의 옮아감은 이해관계와 힘의 논리의 소산일 뿐이며, 거부감의 대상이 자리를 바꿔 잡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 우리나라는 과연 푸른 나라인가. 붉은 띠가 그려진 성조기 그림을 보면 원래 별들이 있어야 될 자리에 태극기가 그려져 있다(미국의 한 귀퉁이를 차지하고 있는). 그럼으로써 작가는 우리나라가 미국의 속국에 지나지 않음을 주지시킨다. 미국과 우리가 서로 포옹하며 동맹국으로서의 우의를 교환하지만 정작 보이지 않는 등 뒤에서는 서로에게 칼을 겨누고 있다. 명화를(레오나르도 다빈치와 일리야 레핀을) 차용한 푸른 연합 연작(아마도 UN이나 G7, 그리고 OECD와 같은 권력의 주체를 겨냥하고 있는)에서는 소위 동맹국들이 테러 타파를 위해 고민하며 서로 머리를 맞대고는 있지만, 이는 다만 미국의 일방 논리에 지나지 않으며, 더욱이 연합 자체가 또 다른 테러를 불러들이는 구실이 될 뿐이다.
그리고 시골학교 운동장에서 행해지는 운동회(푸른 운동회 연작)는 경쟁사회의 축소판이기도 하다. 꼬마들의 천진난만한 놀이가 돈 잔치로 전락한 월드컵으로 확대 재생산되고, 월드컵에 환호하는 붉은 악마로부터 광장문화가 집단무의식과 공동최면으로 변질된다. 또한 스포츠가 대중들의 비판의식을 무력화하는 제도의 도구로 전락한다. 그리고 이런 경쟁사회가 공공연한 자살을 부른다(푸른 자살 연작). 사람들은 목을 매 자살하거나, 건물 밖으로 몸을 던져 자살한다. 부진한 시험성적에 자살하고, 왕따를 당했다고 자살한다. 잘못된 성형 때문에 자살하고, 실패한 다이어트 때문에 자살한다. 신용불량자로 낙인 찍혀 자살하고, 고리대금을 못 이겨 자살한다. ● 이렇듯 자살을 종용하는, 자살로 사람들을 내모는 사회가 과연 푸른 나라인가. 자신의 성채 밖으로 몸을 던진 정몽헌 회장의 죽음은 자살인가 타살인가. 만약 그가 죽음으로 내몰렸다면 이는 자살이 아닌 타살이다. 프랑스의 사회학자 뒤르켐은 주체할 수 없는 시간이 결국 자살에까지 이어지는 죽음을 권태에 의한 자살, 정신적인 공황에 의한 자살, 아노미형 자살이라고 부른다. 자살 사이트마저 공공연히 삶을 유혹하는 이 시대에 자살은 과연 유행병인가. 양대원의 푸른 자살 연작은 자살로 내모는 이 사회의 초상을 보여주고 있다. ● 푸른 자화상 연작에서는 미국과의 이중적인 관계로 인해 분열된 주체와, 경쟁과 자살로 내모는 살벌한 세상살이에서 살아남기 위해 눈에 잘 띄지 않는 얼룩무늬로 위장한 주체, 그리고 무표정한 가면 뒤에 숨은 주체를 보여준다. 사실 이들 주체는 작가의 초상을 넘어 우리 모두의 초상이기도 하다. ● 그는 다만 사람형상이란 것만을 추정할 수 있을 뿐, 실상은 크고 작은 원형들의 집합에 지나지 않는다. 그 형상이 마치 세포처럼 보이는가 하면, 뭉게구름처럼도 보인다. 그 자체 고정된 실체이기보다는 가변적으로 보이고, 박테리아처럼 끊임없이 부풀려지고 변형될 것만 같다. 이렇듯 가변적인 형상 속에는 가변적인 주체가 숨겨져 있다. 자아, 주체, 에고, 나의 이름으로 명명되는 실체에 대한 의심이 엿보이고, 우연적인 주체, 익명적인 주체, 돌발적인 주체, 자의적인 주체, 임의적인 주체, 상황적인 주체에 대한 긍정이 느껴진다. 이로써 주체란 한낱 상황논리에 지나지 않으며, 나아가 상황이 주체를 태어나게 하기조차 한다는 사실을 주지시킨다. 주체란 말하자면 언제나 어떤 전제, 상황, 문맥, 맥락에 대응하는 일종의 인식현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양대원의 그림에는 이처럼 그 자체 가변적이고 우연적인 주체의 대리물로서 동글동글한 형상이 등장한다. 이를 일종의 동그랑맨이라고 칭할 수 있을 것이다(작가는 이를 동글인이라고 부른다). 동그랑맨은 고정된 주체를 가변적이고 우연적인 주체로 해체시키고 변질시킨다는 점에서 후기 근대의 인간에 대한 존재론적 인식과의 관계 속에 있으며, 그 자체 상황논리로부터 비롯된 것이란 점에선 인간에 대한 사회문화사적 의미와 맞물려 있다. 그러니까 작가의 그림에서의 동그랑맨은 캐릭터와 아바타와 마찬가지로 인격을 대신하며, 동시대를 관통하는 아이콘을 대리하며, 현대인의 상황적인 초상을 연기하도록 도입된 것이다. 그리고 이는 양가적인, 양면적인, 이중적인, 다중적인, 그리고 무엇보다도 익명적인 가면과도 통하는 것이다. ● 작가는 나아가 가면이 사람들이 쓰고 있는 인격의 대리물이 아니라, 아예 사람들의 얼굴 자체가 이미 가면이라고 생각한다. 이때의 가면은 질 들뢰즈가 머리와 대비되는 의미로서 사용하고 있는 얼굴의 개념과도 통하는 것이다. 즉, 인간은 전인적 주체와 사회적 주체(혹은 제도적 주체)로서 구조화돼 있으며, 이때 얼굴은 사회적 주체와 동일시된다. 얼굴에게는 사회적 주체로서의 삶을 살고, 연기하도록 요청된다. 얼굴은 말하자면 그 주체가 속한 사회적 계급과 동격이며, 일종의 사회학적 기호인 셈이다. 그 얼굴(가면)이 비록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지만(사실은 웃음과 울음을 연기하지만), 사실은 무표정하고 익명적이다. 이처럼 가면과도 같은(가면과 동일시되는) 얼굴로써 작가는 더 이상 그 속에 주체의 특정성을 담보하지 않은, 자연성과 야성을 상실하고 차이를 결여한, 무표정하고 익명적인 현대인의 초상을 대변케 한다. 그리고 이런 익명적인 가면의 배후에서 가변적이고 우연적인 주체의 몸은 그 고정된 실체를 잃고, 구름처럼 부풀려지고, 박테리아처럼 변질된다. ● 더불어 푸른 풍경 연작에서는 사람이 금붕어처럼 어항과 수조 속을 헤엄치고 있다. 그를 가두고 있는 틀이 없이 그려진 그림에서조차도 실상은 수조 속을 부분적으로 클로즈업해 보여주는 그림에 지나지 않는다. 그 수조 속에서 그는 인생은 망망대해라고 생각하고, 자신은 지금 힘겨운 세파를 헤치며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인생은 아득한 심연과도 같다고 생각하고, 수조 속에 그려져 있는 별을 삶의 의미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그는 마치 평생을 동굴 밖으로 한 번도 나가보지 않은 채 동굴 속에 비친 실제의 그림자를 실제로 알고 있는 플라톤의 동굴 사람과도 같다. 부처님의 손바닥 안에서 구름을 타고 이리저리 날아다니는 손오공과도 같다. 이런 그가 두말할 필요도 없이 우리 모두의 초상이고 현실임을 작가는 주지시킨다.
이와 함께 작가는 일종의 문자그림을 보여준다. 문자와 숫자를 이미지와 혼용한 이 일련의 그림들은 마치 숨은 그림 찾기를 연상시킨다. 그 내용을 보면 개새끼, 18놈, 니기미와 같은 원색적인 욕들이 등장하는데, 이는 작가의 작업을 관통하는 주제의식인 권력의 주체에 대한 거부감을 직접화법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러한 욕과 함께 성서에서 발췌해온 여러 문구들이 발견되는데, 이는 일종의 사람문자의 형식을 띤다. 즉 사람형상을 배열하는 방법으로써 '천지를 창조하셨다', '진실로 속히 오리라', '모든 것이 헛되도다'와 같은 문자 텍스트를 재구성해낸다. 이는 마치 권력의 주체에 대한 경고처럼 들리고, 우리 모두를 향한 경고처럼도 들린다. 미셀 푸코는 고도로 제도화된 사회에서의 권력의 주체는 따로 구분돼 있지가 않다고 본다. 그러니까 개별적인 존재 각자가 곧 권력의 주체이면서 이와 동시에 권력의 객체이며, 권력의 공모에 참여한다는 것이다. ● 양대원은 패러디를 통해 회화의 어휘를 확장하고, 문자그림을 통해 회화와 기호의 경계를 넘나든다. 그림과 상징을 넘나들며 사회를 반영하고, 직접화법과 간접화법을 넘나들며 권력의 실체를 조망한다. 무표정한 가면에 가려진 익명적인 현대인의 초상과, 가면 뒤에 숨은 권력의 주체를 드러낸다. 그리고 그 가면은 현대인에게, 그리고 권력의 주체에게 더 이상 탈이 아닌 얼굴 자체로서 현상한다. ■ 고충환
Vol.20061018c | 양대원 회화展